이창근 후원회원님께.
요 며칠 꽃샘바람이 아주 매섭습니다. 경칩 지나 닥쳐온 추위는 한겨울 그것보다 더 모지네요.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도 온 몸이 오그라드는데, 70m 위 굴뚝에서 맞는 추위는 어떤 것일지 저는 상상조차 못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무탈하신지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성적 소수자를 위한 공익법인이 되고자 하는 비온뒤무지개 재단 이사장 이신영입니다. 법인 등록을 하려고 1년 넘게 이곳저곳 쫓아다니며 애를 썼지만 아직도 허가 받지 못한 재단이지요. 굴뚝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창근님의 절망과 분노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미풍양속에 저해’ 된다거나 '치우친 주제'라 허가할 수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론 화가 치밀고 한편으론 맥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때 이창근님이 손 내밀어 주셨지요. 70m 굴뚝 위에서 말입니다.
저희 재단 정기후원자가 되셨단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해 있었습니다. 해고노동자와 성소수자, 굴뚝과 무지개의 신나고도 가슴 저린 만남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창근님이 함께 보내주신 메시지를 읽고서야 '아, 그렇지! 바로 이 마음이야!' 싶었습니다.
"(…) 하시는 일에 작은 돌 하나 놓고 오래도록 함께 하겠습니다. 세상 단순하게 살아왔는데 해고 이후 생각들이 많이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특히 굴뚝에 올라와서는 더한 것 같아요. (…)"
저도 그랬거든요. 제 아이가 성적소수자라는 걸 알기 전까진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는 법도 없었지요. 아무 일 없이 사는 걸 그저 제가 잘나서라고 여겼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것만으로 대단히 착한 사람인양 행세했지요. 그런데 아이 일을 겪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새로 깨닫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앞서 길을 낸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으로,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여태 잘 살았다는 걸요.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손을 내 밀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진짜 선한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행복 또한 지켜진다는 것도요.
아이가 너무 힘들어 할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저 혼자 되뇌던 말이 있습니다. '그래, 살아만 있으면 된다. 그거면 된다.'
어쩌면 지금도 그 말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쌍용차에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신 분이 스물여섯분이나 된다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 그리고 남겨진 분들의 고통을 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일찍 함께 하지 못한 저의 무지와 교만 탓인 것 같아 그저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은 지금 그 중심에 있거나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타자, 이방인, 낯선 사람들이라고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죠. 소수이고 힘도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권력과 자본의 논리에 설득당하지도, 속박당하지도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먼저 손 내밀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도 오래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곳에 먼저 손 내밀겠습니다. 맞잡은 손이 많아질수록 역사는 빨리 바뀌겠지요. 바뀌고야 말겠지요.
오늘은 그래도 바람이 잡니다. 꽃샘바람이 유난했으니 올 봄은 더 곱고 찬란하겠지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모두 복직되고, 굴뚝 위에서 내려온다는 봄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