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행정 업무', 기차가 가능케 했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6> 2차세계대전과 철도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북해연안의 벨기에부터 남부 프랑스-독일 접경지역의 알자스까지 이어진 참호 속에서 좀비처럼 박혀 있던 병사들은, 마침내 몸에 붙은 진흙 덩어리들을 털어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의 총성이 멎은 것이다. 병사들은 드디어 집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이 거대한 전쟁으로 700만 명의 군인과 또 그만큼의 민간인이 죽었다. 인류는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끔찍한 실체를 목격했다. 하지만 인류는 대(大)전쟁이 준 가르침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이는 후일 역사가 증명했다. 평화는 고작 20년 남짓 유지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평화로 은폐된 시간들이었다. 크고 작은 전쟁은 계속되었고, 더 큰 전쟁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월드컵이 열리기 1년 전에는 사전 점검 형식의 대회로 대륙 간 축구대회인 컨페드레이션컵 대회가 월드컵 개최 예정지에서 열린다. 이처럼 2차 대전도 한 번의 예행연습이 있었는데, 장소는 1936년의 스페인이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탄생한 스페인 공화국에 반대해 파시스트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기득권을 빼앗길 수 없다는 옛 권력의 수혜자들이자 배후들이 들고일어났다. 지주, 자본가, 카톨릭, 군부는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한 몸의 오크족 거인이었다.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의 최대주주는 히틀러가 장악한 독일이었다. 몸이 근질거리는 이 깡패는 새로 장만한 연장의 효과를 확인해보고 싶던 차였다. 신무기의 성능과 그 효과가 궁금했던 독일 군부에 스페인 내전은 최고의 실험장이었다.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마음껏 구사해볼 수 있는 '워-게임'의 장이었던 것이다. 영국 정부와 군부의 노골적인 반란군 옹호 행동, 프랑스의 소극적 지원 등으로 인해, 스페인 공화국은 반란군인 국민군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된다. 그러자 공화군, 즉 스페인 시민 연대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전 세계의 많은 양심 있는 사람들이 국제여단의 이름으로 참전했다.

언론사 특파원으로 종군취재에 나섰던 순수한 영혼 생떽쥐베리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헤밍웨이, 영국의 위건 부두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참전 기록 <카탈루냐 찬가>를 남긴 조지오웰, 최전선에서 응급헌혈방식을 도입하여 수많은 공화국 병사들의 목숨을 살린 닥터 노먼 베쑨,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 시몬 베유 등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수많은 지식인과 젊은이가 정의와 양심의 이름으로 기꺼이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섰다. 유례없는 전쟁이었다. 스타워즈 제다이 기사들처럼 53개국에서 온 3만5000명의 국제여단 병사들은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의 정예군대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스페인 공화국은 독일의 발톱 아래 철저히 유린당했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히 분쇄해버리는 폭격 방식인 "융단폭격"도 독일공군 콘도르 군단에 의해 자행된다. 폭격기들이 하늘에 줄을 맞추어 도시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카펫을 깔 듯 폭탄으로 뒤덮는다. 한 줄, 하늘의 괴물들이 지나가고 다음 줄이 차례대로 나타나 배를 열고 불덩어리를 사람 머리 위로 쏟아 놓는다. 판타지 소설 작가 존 로널드 로엘 톨킨은 1937년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쓰기 시작해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도 작업을 이어가 1949년에 완성했다. 혼란의 시기 상상으로라도 정의를 보고 싶었던 작가의 작품 속에는 거대한 용 스마우그가 등장한다. 하늘의 지배자 스마우그는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입으로 불을 뿜어 땅 위의 생물들을 심판한다. 톨킨이 스마우그를 작품 속에 등장시킨 해인 1937년에 실제로 하늘에서 떨어진 불의 심판을 받은 도시가 있었다. 둥글게 만 담요가 넓게 펼쳐지듯 도시를 덮은 폭탄들은 지옥을 만들었다. 불타는 지옥의 이름은 게르니카였다.

바르셀로나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선 스페인은 1975년 지배자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어둠의 봉인에 갇혀있게 된다. 1980년 전두환이 장악한 군부의 광주학살 이후 광주 시민들이 당시 프로야구팀이었던 해태타이거즈의 선전에 열광했듯, 카탈루냐 지역의 민중들은 축구팀 FC바르셀로나의 선전을 보면서 울분을 달랬다. 특히 프랑코 총통의 지지기반이자 총통의 관저가 있는 마드리드 대표,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는 엘 클라시코라 불렸고, 카탈루냐 지역 시민들에겐 져서는 안 되는 숙명의 대결로 여겨졌다.

프랑코와 히틀러의 만행을 퇴치하지 못한 인류는 2년 후 전 세계 곳곳의 도시를 게르니카로 만들게 된다. 비극의 시대였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정규군의 침략 공격에 대한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고 발표했다. 독일의 반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9월 27일 폴란드의 항복을 받아낸다. 9월 17일 폴란드로 진격한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폴란드의 몰락을 앞당겼다. 나중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면서 폴란드를 독차지하게 되지만, 일단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나눠 가졌다. 유럽이 다시 전쟁에 휘말리자 전쟁을 수행하는 군부의 작전 참모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참모들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병력과 탄약 등 전투 수행에 필요한 보급 열차의 운행 스케줄을 짜는 것이었다. 1차 대전 당시에도 철도는 전쟁 수행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였다. 철도망이 더 확장된 2차 대전 때는 그 역할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유럽을 장악한 전술은 전격전이었다. 전격전은 요새화된 방어기지 마지노선을 신봉한 프랑스군 수뇌부의 안일함과, 진격로의 정체 때문에 수 킬로미터의 길을 가득 메운 독일 전차 부대에 대한 연합군 공군의 수수방관 등, 몇 가지 요행과 기적이 겹쳐진 결과였다. 어쨌든 전격전은 2차 대전 초기 독일군이 승세를 잡게 했던 중요한 작전이었다. 독일군은 1차 대전 당시 4년을 싸우고도 뚫지 못했던 방어선을 단 4일 만에 돌파했다. 전격전은 항공기와 포병의 집중 지원을 등에 업고, 전차 등 기갑부대 및 기계화보병사단을 축으로 하는 강력한 화력을 집중시켜 신속히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을 말했다. 공수부대를 이용한 후방 침투 교란작전은 적의 방어력을 분산시켜 전격전의 효용성을 높여준다. 여기서 핵심은 기동성이다. 이것은 철도로부터 확보되었다. 전격 기동전의 핵심은 전차와 장갑차 같은 기갑부대인데 기갑부대는 전장에서만 기동하는 게 효율적이다. 만약 기갑차량이 중장거리 이동까지 하게 되면, 연료를 감당할 수 없고 유지보수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작전은 전선 부근의 철도역까지 수송열차를 편성해 기갑차량을 이동시킨 뒤 이루어져야만 했다. 당연히 적국의 철도역과 차량기지, 철도 노선은 공군의 주요 타격 목표였다.

여기서 잠시 참전 군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차 대전 당시 독일 기갑 전력의 상징인 티거의 전차장을 맡아 연합군 전차를 150대 이상 격파해 에이스의 호칭을 얻고 백엽 철십자 훈장을 받은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의 증언이다. 그는 '진흙 속의 호랑'이라고 불렸다,

"다행히도 우리는 철도역이 폭파되기 전에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열차에 탑승한 후 가치나로 달려갔다. 우리 말고도 많은 물자가 가치나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소방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급히 서두르게 되는 건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우리의 불안은 적중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가치나의 큰 철도역은 이미 적의 포격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거기서 내릴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 대대의 제1중대가 이미 투입되었다가 소련군에 대(大)타격을 입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전차를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진흙속의 호랑이-오토 카리우스 회고록, 길찾기)

▲히틀러가 이끄는 나찌는 유대인 수 백명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살해했다. 사진은 영화 <바스터즈:거친녀석들> 중 한 장면 ⓒUPI 코리아

학살, 나치는 그것을 '과학'이라 불렀다

독일이 무너뜨린 폴란드는 도미노게임의 시작 블록이었다. 바로 뒤에 있던 덴마크가 넘어지고 이어서 노르웨이가 쓰러졌다.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뚫리자 프랑스는 장기판의 외통수에 걸린 왕 꼴이 났다. 독일군에 밀린 영국, 프랑스, 벨기에군 40여만 명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안까지 쫓겨났다. 바다를 등지고 포위된 연합군은 엄청난 양의 무기를 버리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다. 거대 규모의 패잔병들은 영국해군과 긴급히 징발된 민간 선박들에 의해 몰살 직전 탈출에 성공했다. 2007년 제작된 영화 <어톤먼트>는 전쟁영화가 아니지만, 이 덩케르크 해안 장면이 5분간의 롱테이크신으로 이어진다. 전의를 잃고 '멘붕'에 빠져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현장 중계하듯 잘 재현해냈다.

유럽 대부분은 독일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인류사의 치욕적인 악몽이 시작됐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의 조용한 주택가 암 그로센 반제 거리 56번가의 저택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나치국가의 제국 보안부(RSHA)의 부장이자 경찰 및 비밀공작 기관의 우두머리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관했다. 유대인 담당부 부서장 아돌프 아이히만을 포함한 나치 관료 13명과 회의를 기록한 타이피스트까지 16명이 회의의 참가자였다. 회의의 주제는 "유럽 유대인 문제의 총괄적 해결"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 마련에 대해 회의 참석자들과 논의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이드리히가 언급한 1100만에 이르는 유럽 유대인에 대한 해결책은, 그 거대한 숫자만큼 회의 참석자들의 의지와 각오도 새롭게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은 목표 수치에 용해되어 사라져버렸다. 회의 참석자들이 쏟아놓은 노골적인 표현들은 '이주', '최종해결', '특별처리', '대피', '청소' 등의 용어로 세탁되었다. 이제 '학살'은 나치독일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행정업무'가 되었다. 이 행정업무의 필요조건은 철도였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은 나치가 공유하는 기본 가치가 되었다. 나치의 모든 성원들은 이 숭고한 가치의 실현에 매진했다. 나치의 국민들은 적극 동조하거나, 눈을 감거나, 침묵으로 권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1942년의 독일 제국철도는 50만의 공무원과 90만의 노동자를 가진 거대 조직이었다. 제국철도를 이용해 군수부가 보급품과 군대를 수송했고 제국보안청은 유대인 이송을 담당했다. 제국철도는 3개의 지역 총국으로 나뉘었는데 이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동부총국이었다. 학살수용소행 열차 편성과 운행을 이 동부총국에서 관할했기 때문이다. 동부총국 국철 지부의 운영과 33반이 수용소로 가는 여객열차를 담당했다. 유대인들은 화물열차에 실려 이송되었으나 부과된 요금은 여객열차 승객의 운임을 적용했다. 제국보안청은 군부가 동원 가능한 기관차와 객화차를 모두 선점하기로 했다. 선로용량 부족으로 강제이송에 차질을 빚자 일찍부터 예약에 나서 열차를 확보해야만 했다. 아이히만은 열차 시간표 작성이 "과학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출발과 도착 시간이 분 단위로 확정됐다. 기관차와 차량을 제공할 역을 지정하고 이송이 끝난 빈 열차를 어떻게 순환시킬지 조정해야 했다. 제국보안청과 동부총국은 점령국 철도와의 연계 및 환승, 국제열차 운송에 따른 환전과 운임 정산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전쟁통에 치러야 할 일로서는 상당히 복잡한 작업이었다.

유대인들은 평소 일궈왔던 삶의 공간에서 퉁겨져 나와 게토로 불리는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됐다. 어느 시대에나 차별은 분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최종 해결" 정책이 전면화되자 게토의 유대인들은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철도는 유럽 각지의 게토에서 진공청소기처럼 유대인을 빨아들여 수용소 앞마당에 뱉어 놓았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 앞에 나타나 총을 들이대며 내일 아침까지 간단한 짐을 챙겨 역으로 나오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삶의 터전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임박한 죽음을 향해 떠나야 했던 수 백 만 명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스와 수도요금을 완납하고 20~50킬로그램(Kg) 이하의 가방에 꼭 필요한 물품만 챙기라는 명령을 받은 유대인들은 역에 모였고, 열차에 올랐다. 승강장과 이송용 화물차 위에서 소총을 든 군인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가족들은 서로 떨어지지 않고 같은 칸에 타기 위해 손을 잡았다. 널빤지로 마감된 화차 안은 아무 시설도 없었다. 겨울에 열차를 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화차 틈 사이로 들어오는 영하의 칼바람이 살을 깎아 냈다고 한다. 화차 안은 언제나 시큼한 악취로 가득 차 있었는데, 구석에 마련한 소변 통에서 나는 냄새였다. 승객들은 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 화차의 널빤지 틈 사이로 역의 이름을 보고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가끔 연계열차로 바꿔 타기 위해 열차에서 내려야 할 때도 있었는데, 수백 명이 짧은 시간 안에 군인들의 재촉 속에 이동하면서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헝가리의 솔노크 역에서는 친위대 장교의 멈추라는 명령을 어긴 채 눈에서 놓친 아이를 찾아 나선 엄마의 얼굴에 채찍이 내리 찍혔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엄마는 유대인에게 이미 공포로 주입된, '동쪽'으로 가는 열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비엔나 역 플랫폼에서 아이를 잃어 반쯤 미쳐버린 어머니가 오스트리아 스트라스호프 강제수용소에서 아이를 다시 찾는 뜻밖의 행운도 있었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열악한 이송 열차에서 아기나 노인들은 쉽게 죽어갔다. 지옥행 열차의 승객에게 주어진 운명은 어차피 죽음이었지만, 가장 연약한 이들부터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게슈타포 총수였던 하이드리히가 폴란드 점령 지역 독일군 특수부대에 내렸던 지령을 보면 유대인에게 철도는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집단 수용 장소로 사용될 도시들은 기차 연결 지점이든가 아니면 최소한 철도가 놓여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펴냄)

절멸 수용소의 상징 아우슈비츠에 거대한 유대인 수용소가 세워진 이유는 단순했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오는 철도와의 연계 및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학살 초기에는 총으로 유대인을 죽였다. 유대인들은 거대한 구덩이를 판 뒤에 연결 통로 두세 군데를 만든다. 이후 통로 입구에서 유대인이 가진 모든 것의 압수 절차가 진행된다. 남는 것은 전이될 수 없는 것. 알몸인 신체뿐이었다. 처음 옷 벗기를 머뭇거리던 사람들은 보안경찰의 가차 없는 폭력에 머리가 깨지는 것을 봐야 했다. 사람들은 서둘러 옷을 벗어 던졌다. 모두가 벌거벗겨지는 상황에서 부끄러움은 개입할 여지조차 없었다.

옷을 완전히 벗은 유대인들이 통로를 통해 구덩이로 입장해 가장자리부터 눕게 되면 보안경찰이나 친위대 병사들이 목덜미에 대고 자동 권총을 쐈다. 상당수 보안 경찰들은 사수의 뒤에서 자동 권총 탄창에 총알을 장전, 다 쏴버린 권총을 바로 교체할 수 있게 했다. 이어서 들어온 유대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경악했지만, 피를 흘리는 시체 위에 자신들도 누워야만 했다. 오전에 시작된 처형이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다. 키예프 외곽 바비야르의 골짜기에 파인 구덩이의 크기는 길이 150미터(m), 너비 30미터, 깊이 15미터였다. 이런 규모의 구덩이에 밑바닥부터 시체가 쌓였다. 벌거벗은 사체들은 산이 되었다. 어린아이도 예외는 없었다.

이런 총살 방식은 곧 벽에 부딪혔다. 워낙 많은 유대인이 몰려들어 '처리'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치에 맹종을 했다고 하더라도, 총살을 집행하는 보안요원이나 군인들이 받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문제였다. 죽는 자가 아니라 죽이는 자에 대한 배려로 새 방식이 고안됐다. 유대인에게는 총알도 아깝다는 논리도 동원됐다.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최종 해결"을 위해 제시된 대안은 독가스였다. 초기에는 가스차가 동원되었다. 함석으로 만들어진 트레일러 안에 유대인을 '채워' 넣고 자동차의 배기가스 관과 연결된 호스를 트레일러의 구멍 속으로 밀어 넣은 뒤 시동을 걸었다. 관계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60명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고 만족했지만, 현실은 더 높은 효율을 요구했다. 바르샤바 북동쪽 1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 트레블링카는 아예 역을 수용소의 입구로 사용했다. 기차에서 내리면 바로 독가스가 나오는 "소독 샤워실"로 이어졌다.

생존자의 증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재판정의 증인으로 나섰던 리하르트 글라차르의 말이다.

"트레블링카로 도착한 열차 화물칸들의 연결이 풀렸다. 500명의 사람들이 들어있는 경우도 많았고, 1000명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모두 내려. 좀 더 빨리. 손가방은 가져가고 무거운 가방은 그냥 둬. 나중에 운반될 테니까.' 진입 경사로를 지나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탈의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초록색 울타리가 쳐진 장소였는데, 우리는 거기서 소독을 위해 발가벗어야 했다. '남자들은 오른쪽, 여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왼쪽으로.' 여자들은 이발소로 끌려가서 삭발을 당했다. 여자들의 머리카락으로 엔진의 개스킷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모두 차례차례로 호스관처럼 생긴 통로를 지나 수용소 두 번째 구역으로 끌려갔다. 통로는 가시 철조망으로 된 좁다란 골목길이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사나운 동물들을 서커스 원형 경기장 안으로 몰고 갈 때 이용하는 출입문을 연상케 했다."(<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펴냄)

죽음이라는 '행정 업무', 기차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트레블링카역에서 사용된 '샤워 소독실'의 가스는 약탈한 러시아 탱크에서 떼어낸 엔진들을 이용해 만들었다. 소독실 밖에 설치된 대형 탱크 엔진들이 가동되면 배기가스가 10개의 가스실에 퍼져나갔다. 40분 만에 1000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트레블링카는 다른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의 처리 능력이 커지자 가동이 중지되었다. 1942년 이후 유대인을 태운 거의 모든 열차는 아유슈비츠로 향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이 대규모로 신축되면서 새로운 가스가 쓰였는데 치클론B 가스였다. 최초의 희생자들은 900명의 소련군 전쟁포로들로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된 치클론B 가스가 사용됐다.

아우슈비츠의 열차 승강장에 발을 내디딘 사람들의 90%는 곧바로 가스실로 직행했다. 혹독한 여행에 지친 승객들은 승강장을 내려가 한 줄로 친위대 장교 앞에 서야 했다. 간단한 면접조사가 이루어졌다. 열쇠공 왼쪽, 관리인 오른쪽, 목수 왼쪽, 농부 오른쪽, 교사 오른쪽, 은행원 오른쪽, 트램 차장 오른쪽, 의사 왼쪽. 아버지와 아들이, 형제자매가 서로 다른 줄로 나뉘었다. 나이가 많거나 어린 경우에는 질문 없이 바로 분류가 이루어졌다. 첫 관문을 통과해 가스실로 직행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을 것은 없었다. 그 중 대부분은 잠시 지연된 죽음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유대인들은 수용소 안에서 영양실조와 온갖 질병으로 인간의 모습을 잃은 채 가스실로 가기 직전의 사람들을 '이슬람교도'라고 불렀다. 앙상한 뼈, 초점 잃은 눈, 처진 어깨로 삶을 지탱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던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생각은 복잡함 그 자체였다. 그것은 그들을 불쾌해 하면서도, 문뜩 자신도 어느새 '이슬람교도'가 되어가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극단적인 희생의 대상자들이 된 유대인들이, 그 안에서도 더 끔찍하게 비인간화된 존재들을 '이슬람교도'라고 부른 것은 블랙 유머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유머의 현실적 발화는 공포의 순환이 된다. 적대화된 상징적 존재로 유대인의 의식 속에 퇴적된 악은 이교도인 무슬림이었다.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중동에 대해 펼치는 정책의 씨앗이 오래전부터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궁극적으로 제거 되어야 할 기생충으로 여겼듯, 좀비화된 유대인은 비인간이고 이들은 '무슬림'이란 칭호를 받아도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얻게 되는 답은 아리아인의 적 유대인에 대한 '정당한 해결'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를 파괴하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 된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에게 총을 겨누는 현실은, 프리모 레비가 나치 독일의 만행에 대해 '인간이란 이런 것인가'라고 절규한 것을 오늘의 이스라엘에 다시 묻게 된다.

아우슈비츠는 효율적인 분업체계를 갖추었다. '처리' 대상의 분류, 대상이 갖고 있는 물건 압수 및 처리, 금니 등을 제거하는 후처리, 소각, 청소 등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산업화된 공장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철저한 분업으로 죽음을 생산하는 공장이 된 아우슈비츠는 삶에 대해 죽음이 완벽한 승리를 이룬 장소가 되었다. 본디 인류는 죽음을 존엄한 영역으로 유지해왔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이 삶의 일상인 풍경이 되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수천 켤레의 주인 없는 신발, 시체 소각로 입구에 널부러진 팔과 다리, 끊이지 않는 소각로 굴뚝의 연기, 미처 처리하지 못해 대기 중인 시체 더미들 속에서 그들은 죽음과 함께 삶을 살았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죽음이 사소하고 행정적인, 그리고 일상사인 곳이 바로 절멸수용소라고 말했다.

종종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끝까지 존엄을 지킨 사람들이었다는 말을 듣는다. 삶의 희망을 놓치지 않고 생존에 꼭 필요한 물을 아껴 얼굴을 씻은 존엄자의 이야기는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도착 순간 처리되는 대부분의 승객들에 비해 운이 좋아 살아남은 자들이 의지의 담지자는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나치 독일을 대신해 유대인을 관리함으로써 가스실행을 면한 경우도 있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그의 저서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아우슈비츠는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품위가 아닌 것이 되는 장소, 자신의 존엄과 지존을 잃지 않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장소였다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진정한 증인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시간을 통과한 익사한 자들이지, 구조된 자들이 아니라고 한다.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본 사람들은 익사한 사람들이지만 이미 가라앉아 있기에 증언할 수 없다. 이 같은 현실의 아이러니는 생존자 프리모 레비를 줄곧 괴롭혔다. 프리모 레비는 익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단 하나의 드넓은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고 험하고 가파르며,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아우슈비츠에서든 팽목항 앞바다에서든 인간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의 길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진짜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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