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썸남'이 내 생리 주기를 안다?

[민들레]감시‧① 마음까지 읽는 '그'

"세상 참 좋아졌다"라는 말은 어르신들이나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이제 겨우 20대 후반인 나도 요즘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얼마 전, 자주 접속하는 사이트의 광고 배너를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다. 열리는 페이지마다 내가 곧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몇 번 검색해보았던 상품의 광고 배너가 나타났다.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여성의류를 검색하고 나면 여성의류 쇼핑몰 광고가 뜨고, 중국어 학원을 알아보고 나면 어학원 광고가 뜨는 식이었다. 내가 클릭했던 상품이 열리는 페이지마다 따라다니기도 했고, 심지어 광고 배너에 올라온 중국어 학원은 우리 집과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다. 네모난 광고 배너가 현재 나의 위치와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 정체는 구글이었다. 구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웹브라우저에 쿠키를 심어놓고 내가 무엇을 클릭하고 검색하는지 기록한 후에 그 데이터를 근거로 광고를 유치하고 검색 결과의 정확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초기에 인터넷을 쓸 때만 해도 나와 관련 없이 동떨어진 상품의 광고 배너는 그저 모니터 공간을 방해하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내 머릿속을 한 번 훑고 온 것 마냥 관심 상품을 소개해주는 광고 배너는 클릭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었다.

▲ 은 지난해 9월 8일 방송에서 "감시사회,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주제로, 개인정보를 통해 감시당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이면을 다뤘다. ⓒSBS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읽힌 듯 찝찝했다. 은밀한 개인공간이라고 생각했던 나만의 컴퓨터가 타인에 의해 감지되고 있고 누군가 나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불쾌감과 함께, 심지어 그 감시자는 정체도 불분명하다는 사실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고 나서 내 일상을 돌아보니,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주소, 메일주소를 여기저기 아무 생각 없이 적어낸 기억이 났다. 친절하게 회원가입을 권하는 매장 직원에게, 이름 모를 웹 사이트 가입란에, 무료로 무선인터넷을 쓸 수 있는 커피숍에, 경품추첨을 위한 개인정보란에도 거리낌 없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몇 가지 개인정보만 제공하면 각종 할인이나 혜택이 쏟아지고, 알뜰살뜰 포인트를 쌓을 수 있으며, 인터넷에서는 블로그나 홈페이지도 개설할 수 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으면 지도는 물론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 대중교통 상황까지 일사천리로 볼 수 있다. 친절하게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추적해 거기서부터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시간도 계산해준다. SNS에 가입하면 전 세계 사람들과 단번에 연결된다.

이 모든 게 공짜라는 사실이 더 놀랍다. 그들은 나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고 많은 시간을 빼앗지도 않으며, 그저 잠깐 짬을 내어 정보 몇 가지만 써내면 원하는 모든 편리를 제공한다.

소비의 밑거름, 감시

그들이 친절한 이유는 우리가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갈망하고 원한다. 동시에 불안해한다. 기업은 '감시'가 최고의 돈벌이 수단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인간의 욕망과 불안을 저울질하며 우리의 소비패턴을 줄줄 꿰고 있다. 그러면서 마치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이걸 사라, 저걸 사라, 신제품이 나왔다, 당장 바꿔라, 끊임없이 종용한다. 결국 짬이 날 때면 어김없이 온라인 쇼핑몰을 둘러보는 것이, 최근 유행은 무엇인지 검색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단편이 되었다. 감시자들은 인간의 얕은 욕망에 대한 신속한 만족을 제공하면서 마치 우리 삶의 질을 엄청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듯 젠체한다.

온라인상에서 회원가입을 하든, 물건 결제를 하든 뭔가에 '동의'해 달라는 수많은 체크박스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길고 복잡하고 딱딱하게 쓰인 약관이라니. 애초에 회원들에게 읽으라고 올려놓은 것도 아닌 듯 싶은데, 기계처럼 모든 약관에 '동의'를 하고 나면 컴퓨터 시작 페이지가 엉뚱한 것으로 바뀌거나 쓸모도 없는 툴바가 자동으로 설치되고 인터넷 화면은 광고 페이지로 엉망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한번은 한 보험회사가 스폰서를 맡은 경품행사에 응모를 했는데 당연히 경품엔 당첨되지 못했고, 대신 보험가입을 하라는 끈질긴 전화에 붙들려 고생한 적도 있다. 재미와 작은 기대로 써낸 개인정보가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누구를 탓할 것인가? 편리하고 손쉽게 서비스를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서 내 손으로 건네줘 버린 개인정보 아닌가. 제러미 벤덤이 고안한 원형 감옥 파놉티콘은 중앙 감시탑을 두고 가운데에서 탑 전체를 훤히 들여다보며 24시간 모든 죄수들을 감시 한다. 자신들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감시자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죄수들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 파놉티콘 구조도
최근에는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파놉티콘을 넘어 더욱 교묘해진 시놉티콘(역감시) 구조가 판을 친다. SNS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전시하는 데 더욱 과감해진다.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분 단위로 업로드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옷을 걸치고 무엇을 먹는지, 사진과 동영상까지 곁들여 만천하에 공개한다. 사람들의 인정욕구는 SNS를 통해 발산된다. SNS 아이디만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도 그 사람이 쓴 글이나 댓글의 흔적이 그대로 검색된다. 그 속에는 나를 좀 봐달라는 역설적인 욕망이 작용한다.

웹상에서, 철들기 전에 썼던 글이라도 검색되면 낯부끄러움을 감출 길 이 없다. 학생 신분으로 술자리에서 찍힌 사진이나,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 웹에 떠돌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발각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는 아이돌 가수들도 왕왕 등장한다. 기업에서는 지원자의 SNS나 개인홈페이지 주소를 이력서에 명시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 정보만 가지고도 지원자의 취향부터 정치적 성향까지 들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잊힐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미 온라인 공간에 자발적으로 뿌려진 신상정보와 일상은 자신이 원하더라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미지의 공간을 떠돌다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어느 순간 발목을 잡기도 한다.

현대 도시의 감시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는 편의점이다. 전상인의 <편의점 사회학>(민음사 펴냄)이란 책에서 보면, 볼록거울과 CCTV가 없는 편의점은 세상에 없다. CCTV 카메라는 편의점 아르바트생, 거래처 직원, 일반 손님, 금전등록기와 상품진열대를 감시한다. 편의점 점주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카메라 단 하나뿐이다.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의 비밀은 편의점 계산기의 '객층키'라는 것이다. 객층키는 손님의 연령과 성별에 따라 어떤 물건을 언제 구입했는지 통계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객층키를 눌러야 계산이 완료되며, 소비자의 모든 데이터가 축적된다. 이 책에 인용된 김애란의 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2005년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 펴냄)에 수록)를 보면 상황은 더욱 끔찍해진다.
"그는 나의 고향을 안다. 편의점에 겨울옷을 정리한 택배를 부치러 갔을 때, 그는 수수료를 받으며 내 주소를 확인했다. 그는 나의 생리 주기를 안다. 그는 정기적으로 생리대를 사 가는 나를 본다. 그는 콘돔갑을 뒤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 나를 본다.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 있다."

CCTV는 이미 방송가를 장악한 리얼리티 쇼에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 한다. 최근 주말 예능을 장악한 MBC <아빠 어디가>나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육아 리얼리티를 표방하며 아빠와 아이들을 밀착 촬영해 방영한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카메라들이 출연 연예인과 자녀들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일반 시청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동하는 차 안에도 작은 카메라 들이 여기저기 부착되어 있다. 노는 것과 먹는 것은 물론 씻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도, 심지어는 무방비 상태로 잠든 리얼한 순간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를 통해 공중파에 내보낸다. 사람들은 여기서 단순한 시청자가 아니라 은근히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감시자가 되고, 현실과 연출의 경계 또한 애매모호해진다.

기계로 맺어지는 인간관계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에 너무 익숙해진 걸까. 24시간 누군가의 사생활을 관찰하는 건 이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 사생활이 사라져가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다. 최근 <유리감옥>(이진원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이라는 책을 펴낸 니콜라스 카는 말한다. 가장 최신의, 가장 자동화되고 가장 편리한 도구가 항상 최선의 선택은 아니라고 말이다. 또 우리의 고귀한 의무는 제도적, 상업적, 기술적 힘 중에 우리의 영혼을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어떤 힘에라도 저항하는 것이라고. 저자의 말대로, 이젠 감시사회의 본질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고 달콤한 유혹의 손짓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중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게 된 건 어쩌면 빅 브라더가 바라던 시나리오가 실현되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소비사회를 만들기 위한 교묘하고 철저한 밑그림에서 출발한 '감시사회'이지만, 실은 우리 스스로 그 감시문화에 동의하고 체계를 구축해가게 하고 있다. 불안과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부유하는 자가 다름 아닌 '나'인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은 사장님이 자리를 비워도 딴청 부릴 틈이 없다. 부모들 역시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 자녀들의 동선을 확인하고, 연인들은 스마트폰으로 서로의 위치를 자동으로 보고받는다. 상사가 직원을 감시하고, 부모가 자녀를 통제하고, 남편과 아내를, 연인을 의심하며 이어가는 사람의 관계라니. 손쉽게 얻은 편리라고 하기엔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 카카오톡에서는 친구가 자동으로 추가되고, 페이스북에서도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친구를 알아서 추천하는 친절 덕분에 친구 목록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정작 외롭고 힘든 일을 겪을 때 곁에 있어줄 정말 '친구'를 찾기는 점점 힘들다. 군중 속의 고독이다.

우리가 눈부신 기술의 진보에 환호를 보내고 있는 동안 믿음과 배려가 기반이 된 전통적인 인간관계는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걸 알아서 빠르게 처리해주는 기계에 의존하고, 오늘도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을 보며,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네모난 스크린을 통해 관찰한다. 우리는 눈을 잃은 셈이다. 다음엔 더 중요한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