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기 전에, 뭐든 제대로 알고 써야 할 것 같아서 이것저것 좀 찾아봤습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노들섬의 '노들'은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을 뜻하는 말이네요. 그러니까 인간이 다리를 지어 그곳을 활용하기 전에는 백로가 강을 건너다 잠시 머물며 노닐던 새의 땅이었나 봅니다.
이명박,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이 땅에 오페라하우스 등 예술센터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 시장이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박원순 씨로 시장이 바뀝니다. 박원순 시장은 노들섬의 절반에 노들텃밭이라는 이름의 시민 텃밭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경작 신청을 받았습니다. 정리하자면 백로의 땅에 시멘트와 콘크리트가 부어질 뻔했다가, 여러 시민에게 농사짓는 땅으로 나뉜 상태입니다.
백로가 동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년에 우리 밭에 뿌린 씨앗을 비둘기, 참새 등 여러 새가 와서 많이 쪼아 먹었더군요. 씨앗이 발아할 때 나는 향기를 맡고 새들이 찾아온다고 들었습니다. 뭐 괜찮습니다. 새들이 저희 밭 옆에서 대기 타고 있는 게 재밌기도 하고, 어차피 함께 나눠 먹으려고 지은 농사니까요. 이 도시에 새들이 찾아와주는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안녕하세요, 정 후보님. 저는 노들장애인야학 친구들과 함께 노들텃밭 1-2구획에서 2년째 농사짓고 있는 김유미라고 합니다.
정 후보님, 텃밭이 놀고 있다고요?
며칠 전, 저는 집으로 배달돼 온 선거 공보물을 보고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정몽준 후보님이 만들어 보낸 공보물 때문이었는데요. '우리 서울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1000만 시민이 박원순 후보께 묻습니다' 하면서 다섯 가지 질문을 넣은 쪽에서 4번입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4. 4만여 평 노들섬을 텃밭으로 놀린 것은 심한 것 아닌가요?노들섬에 오페라 하우스 건립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하신 일입니다.그런데 3년간 텃밭은 심한 것입니다.이곳에 시민들이 즐기는 문화 여가시설을 건립하겠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좀 놀랍기도 했고, 기분도 많이 안 좋았습니다. 일단 노들섬을 텃밭으로 놀렸다는 문구에서 놀렸다는 표현에 좀 놀랐는데요. 놀렸다는 건 뭐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느낌의 말인데, 우리 텃밭에선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생산됐기 때문입니다. 제가 농사지은 1-2구획만 해도 작년에 오이, 호박, 참외, 가지, 고추, 상추, 아욱, 근대, 완두콩, 치커리, 감자, 옥수수, 방울토마토, 큰 토마토, 고구마, 배추, 무를 수확했습니다. 저희는 농사 경험이 부족해서 요 정도에 그쳤는데요. 주변 밭들을 돌아봤을 때 노는 밭이라곤 없었습니다. 밭이 놀고 있다거나 경작자가 자주 오지 않는다 싶으면 텃밭관리소에서 밭 주인을 교체해버립니다. 놀래야 놀 수가 없습니다.
밭에 수확할 게 한가득 있는데 제가 바빠서 밭에 잘 못 가고 있으면, '그 밭 참외가 참 달던데요'라거나 '너희 토마토가 문드러지고 있다'는 메시지들이 날아옵니다. 그렇게 서로 도와가며(?) 밭을 가꿨고, 많은 것을 생산했습니다. 놀렸다고 할 만한 기간이 있다면 11월 말부터 겨울 동안인데요. 물론 저는 그때 놀았습니다만, 땅속에 사시는 님들은 그때도 무언가를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저희가 밭에 가 있지 않은 지금도 무언가 하고 계시니까요. 그래서 텃밭으로 놀렸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사실과 맞지 않은 증거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정 후보님은 "3년간 텃밭은 심한 것"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심하게 좋았습니다. 저는 2013년에 운 좋게 경작을 시작해, 2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데요. 노들텃밭은 버스 한 번만 타면 바로 갈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휠체어를 탄 저희 학교 친구들이 밭까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좋고요. 화장실이 여러 칸 있는 데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된 칸도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규모 있는 공공 텃밭이 아니면 이런 환경을 갖추기가 어렵더라고요.
아무쪼록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도 쉽게 버스를 탈 수 있게 한강대교 중간에 횡단보도가 빨리 설치되면 좋겠습니다. 버스 타려고 다리 끝까지 걸어 나가다 보면 저도 전동휠체어 타고 싶어진답니다. 그리고 정 후보님이 당선되신다면 저상버스를 많이 확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서울시 저상버스 도입률은 30% 정도라 저희가 버스 한 번 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저흰 오페라하우스 같은 문화시설보다 저상버스가 더 필요합니다. 혹시나 모르실까 해서 설명하자면, 저상버스는 출입구에 계단이 없어서 휠체어나 유모차가 타기 편한 버스입니다.
정 후보님, 1년만 노들텃밭에서 농사지어 보세요!
노들텃밭이 좋은 건, 텃밭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사귀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옆 밭 아주머니, 아저씨랑은 농사에 관해 궁금한 걸 이것저것 막 물어볼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요. 수북이 자란 쌈 채소 앞에서 이걸 어떻게 하지, 충격 먹고 있을 때 스르륵 오셔서 도와주는 어르신들도 있었습니다. 작년엔 꼬맹이, 아저씨들이랑 모내기도 같이 했고요. 울력 같은 행사 땐 이 사람, 저 사람하고 부침개에 막걸리도 나누고 재밌게 놀았습니다. 어디 가서 이 좋은 사람들을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노들텃밭만한 문화시설이 또 어디 있을까 싶은데요. 게다가 여긴 무려 '생태' 문화 여가시설입니다. 제 말이 의심스럽게 들린다면 내년에 경작 신청하셔서 딱 1년만 농사를 지어보시면 바로 아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경작 신청하셔도 밭을 못 얻을 수 있습니다. 신청자가 많아서 추첨을 하니까요. ^^
아, 경작 신청을 해도 떨어지는 사람들 때문에, 이 노들텃밭이 몇 안 되는 시민에게만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하셔서 공보물에 그렇게 쓰셨을 수도 있겠네요. 경작 신청하셨지만 탈락하신 분께는 저도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저도 떨어졌으면 지금 이런 글 안 쓰고 있을 겁니다. (ㅎㅎ) 귀한 기회를 얻은 것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러 시민이 즐기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신다면요. 노들섬은 반쪽이 더 있고, (아 거기는 백로 땅인가), 한강은 기니까 활용할 수 있는 둔치들도 있을 테고, 새빛둥둥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있는 곳도 있고, (저 거기 가봤어요. 비싸서 아무것도 못 먹고 나왔다!), 찾아보면 농사지을 수 있는 장소는 많아요. 텃밭이 그런 거잖아요. 시민 텃밭을 더 많이 만들어서 농사짓고 싶다고 줄 선 시민들에게 나눠주면 될 것 같아요.
저희가 만든 쌈 채소에는 정 후보님이 중요히 여기는 농약 따위 없어요!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들이 대형슈퍼마켓 식품코너에서 오고 있지만, 실제론 더 먼 곳에서 옵니다. 땅에서 오고, 농촌에서 오지요. 그래서 농사도 중요하고, 농촌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걸 노들텃밭에서 농사지으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먹으니까요. 이 외에도 노들텃밭이 제게 알려준 것이 참 많습니다. 정몽준 후보님도 텃밭 농사지어보세요. 이 아스팔트로 뒤덮인 거대한 도시에서 파릇파릇한 녹색의 기쁨을 맛보게 해준답니다. 당선되시더라도 노들텃밭을 그대로 두시면 좋겠어요. 그곳은 단 하루도 놀지 않고 많은 것을 생산하고 있으니까요. 전기가 없어도 되고요, 가스가 없어도 돌아갑니다. 물과 거름 그리고 애정을 담뿍 주시면 됩니다. 자전거 타고 가시면 심지어 버스비도 안 들어요. 버스비 1150원이에요. 이만한 여가 문화시설이 또 어디 있을까요?
저희가 선물하는 노들텃밭 쌈 채소에 맛있는 거 싸 드시고, 노들텃밭에 대해 다시 잘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쌈 채소에는 정 후보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쁜 농약 따위 들어있지 않습니다. 노들텃밭은 화학비료를 쓰지 못하게 돼 있거든요. 잘 삭힌 음식물찌꺼기와 똥오줌이 최고의 비료더군요. 맛있게 드시고 꼭 다시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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