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뒤 박근혜, '지지율 함정'에 빠졌나?

대통령은 왜 남재준을 해임하지 않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중순 경부터 남재준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수시로 받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북한 문제를 비롯해, 공공기관 관료들의 동향 등 국내 상황까지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남 원장을 "단 한 조각 사심도 없는 사람"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그런 남 원장이 최근 국정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해 박 대통령에게 어떤 보고서를 올렸는지, 현재 알 수는 없다.

증거 조작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인한 큰 파문에도 불구하고 남재준 원장은 결과적으로 살아남았다. 국정원 직원의 증거 조작이 검찰에 의해 사실로 확인된 지난 14일 저녁, KBS <뉴스9>는 첫 꼭지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68.5%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남재준 원장에 대한 책임을 묻기에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너무 높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럽다.


▲박근혜 대통령과 남재준 국정원장 ⓒ연합뉴스

박근혜의 지지율과 남재준의 버티기

지난 2월,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이 불거진 후 여당 내에 '남재준 사퇴론'이 확산된 적이 있었다. 국정원이 정보원의 존재를 노출시키고, 노출된 정보원이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을 기도한 후에 박 대통령은 처음으로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박 대통령은 3월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며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그러자 당내 비주류 인사들이 들고 일어섰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의원은 박 대통령 발언 다음 날인 3월 11일 "(증거조작) 사실 확인이 되는 대로 책임있는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조 친박'이었던 유승민 의원도 같은 날 "이번 일은 국가권력기관이 사법체계를 흔든 국기문란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했다. 보수언론들도 남재준 원장 사퇴를 촉구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가 3월 26일 다른 분위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국정원이) 위조를 지시했겠나"며 "조선족 협력자 김 모 씨에게 국정원이 놀아나지 않았나"라고 했다. 남 원장의 "팬"이라며 그가 경질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추이와 정치권의 반응은 얼추 들어맞는다.

박대통령 지지율은 간첩 사건이 처음 촉발된 지난 2월 14일 이후에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3월 초 소폭 하락했으나 박 대통령이 "유감"을 표한 뒤 다시 반등했고, 윤상현 수석의 "경질 가능성 없다"는 말이 나왔다. 검찰 수사가 막바지에 달했던 4월 들어서 정부의 태도는 더욱 굳건해졌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4월 3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유우성 씨 사건을 "간첩 사건"으로 규정하며, "사건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직시하라"고, 의혹을 제기하던 야당 의원들에게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갤럽의 박 대통령 지지율 여론조사 추이 ⓒ한국갤럽


결국 예견된 상황이 벌어졌다. 국정원 앞에서 쩔쩔매던 검찰은, 3급 국정원 직원 주도하에 발생한 일부 '개인들의 일탈'로 결론을 냈다. 보수 언론조차 사설을 통해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검찰총장은 취재 기자들에 대한 화풀이로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14일 서천호 국정원 2차장의 사퇴와 15일 남 원장의 사과문 발표, "또 다시 (국정원이)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은 하나의 잘 짜여진 기획물처럼 보였다. 전대미문의 국정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이 "일부 증거 조작 시비(황교안 법무부장관)"로 둔갑한 것은, 박 대통령의 일관된 인식에 따른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박근혜, '지지율의 함정'에 빠졌나?

박 대통령 취임 이후 국정원은 줄곧 구설에 올랐다. 18대 대선 개입 의혹에서부터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파동,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 간첩 증거 조작 사건까지, 국정원은 휘발성 강한 이념 이슈를 끊임없이 생산해 냈고, 심지어 여의도 정쟁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조직의 안위'를 위해 비밀 정보원의 존재를 대중 앞에 노출시키거나, 탈북자 증인이 제출한 비공개 탄원서를 언론에 공개하는 등 각종 공작까지 서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국정원에 대한 국민적 여론은 점점 나빠졌지만, 반대로 박 대통령은 취임 초 40% 대 지지율을 임기 1년 2개월만에 60%대로 끌어올렸다. 오죽했으면 야권의 한 인사는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정치권에 국정원을 뚝 떼 주면서 야당과 국정원이 서로 상처입는 피투성이 싸움을 시킨 것 같다. 큰 틀의 '기획'이 아닌가. 야당이 국정원과 물어 뜯고 뜯길 때, 박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고, 청와대는 지지율 관리에만 신경을 써왔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정치적 악재의 방패막이로 나선 국정원이 대리전을 펴는 사이 박 대통령은 짐짓 논란과 무관해 보이는 착시 효과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과 국정원은 여론조사에서 따로 가는 경향이 있다. <매일경제>와 여론조사 전문기관 '메트릭스'가 지난 3월 14일~16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재준 원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은 55.2%, 사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은 23.4%로 나타났다. <국민일보>와 글로벌리서치가 비슷한 시기인 지난 3월 1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박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는 63.3%로 나타났다.

이는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국정원의 행태에 비판적이면서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과는 무관하게 인식한다는 걸 보여준다. 뒤집어보면 큰 틀에서 박 대통령 통치 행위를 지지하는 여론 안에는 각종 사안별로 '불만 여론'이 곳곳에 도사린 셈이다.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이 국정 운영 자체보다는, 국정운영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지적한다. 이른바 '지지율의 함정'이다. 높은 지지율에 도취된 순간 고비가 찾아온다.

'지지율의 황제'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랬다. 그는 1992년 12월 15일, 대선 직전 터진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높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난 18대 대선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비슷한 초원복집 사건은 임기 내내 관권 선거 논란으로 김 전 대통령을 괴롭혔지만, 임기 초반 지지율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이 취임 1년을 맞은 1994년 2월, 당시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69.5%를 기록했다. 그 해 5월에는 같은 기관 여론조사에서 82.1%까지 치솟았다. 여론조사 업계에서 우려를 표명할 지경이었다. 임기 2년이 끝날 무렵인 12월에도 지지율은 57.9%였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지방선거 패배를 기점으로 하락세를 탔다. 그 이후 여권 내부 권력 다툼이 본격화되고 IMF 사태까지 겹쳐 여당은 정권을 내주게 된다.

현재 박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측근의 실수를 덮고, 보수층의 이탈을 막는 버팀목이다. 여권이 지방선거를 낙관하는 바탕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다. 그러나 이는 당청 관계의 비대칭,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국정운영이라는 기형적인 상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지율의 함정에 빠진 후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크게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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