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은 필수"… 과잉노동 허덕이는 외주 PD

[방송사 비정규직의 설움 ③] 외주제작 PD 2박 3일 동행 르포 下

대표적인 선망의 직업 중 하나인 피디(PD), 그러나 외주제작 PD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과도한 노동 강도에 시달린다.(☞ 관련기사 보기 : "외주 PD "종편까지 생기니 '빵 셔틀'만 늘었네요"") <프레시안> 기자는 외주 PD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기 위해 직접 외주 제작 현장으로 들어가 봤다. 지난 회(☞ 관련기사 보기 : "나는 매일 '원맨쇼'하는 독립 PD입니다")에 이은 르포 기사는 기자가 2박 3일간 한 외주제작사의 견습생이 되어 외주 PD들을 지켜본 관찰기다. 편집자주.

"방송 다섯 시간 전 촬영한 적도 밤샘 작업은 필수"

Scene#5. 방송 D-1,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어느 촬영장.

다시 촬영팀에 합류하라는 호출이 왔다. 방송 하루 전인데도 촬영이 안 끝났다는 얘기를 듣고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탔다. 긴급 상황인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왔건만, 촬영장에서 만난 4년 차 박영수(가명·30) PD는 어쩐지 태연한 표정이었다.

"방송 다섯 시간 전에 촬영해서 급하게 끼워 넣은 적도 있는데 이 정도 가지고 뭘….
어차피 밤새울 거니 벌써 힘 뺄 필요 없어요."

정보 프로그램을 맡은 외주 PD들에게 하루 밤샘은 필수, 이틀 밤샘은 선택이다. 이번 인터뷰에선 정면, 측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 두 대가 동원됐다. 편집 분량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얘기다. 방송 전에 그래도 한숨 자보겠다는 야무진 꿈이 깨졌다.

박 PD는 생초보인 나에게 덜컥 측면 촬영을 맡겼다. 똑같은 자세로 카메라를 들고 있자니 어느새 진동벨 울리듯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주문 외우듯 '빨리 끝나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촬영은 40분을 넘겼다. 카메라를 내려놓자 전날 뭉친 어깨, 팔 근육이 더욱 뻣뻣해진 게 느껴졌다. '죽다 살았다'며 안도하자마자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자, 이제 진짜 밤샘하러 갑시다."

S#6. 방송 13시간 전, 사무실.

전날 본 사무실이 맞나 싶었다. 어젠 제법 정돈이 돼 있었는데, 하루 사이 도둑 든 집처럼 어수선해졌다. 책상 위엔 빈틈없이 A4용지들이 깔려있고, 바닥엔 촬영 장비들과 각종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있었지만 다들 제 할 일이 바빠 치울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박 PD가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여기저기서 "나 바빠"하는 대답만 들려온다. 저녁 먹으러 가는 사람은 박 PD, 그와 동갑인 남자 PD, 그리고 나까지 셋뿐이었다.

S#7. 방송 12시간 전, 사무실 건물 내 어느 식당.

"나 어떡하지, 언제 편집하지? 이번 주엔 코너 두 개라 오늘 안에 다 해야 하는데."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앉자, 박 PD가 이제야 앓는 소리를 한다. 막상 편집할 시간이 다가오니 자신이 없어진 모양이다. 동료 PD가 반찬을 집어 먹으며 무심하게 "하루 이틀이냐, 어떻게든 다 하겠지"하고 중얼거린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끼니도 거르고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 김밥 몇 줄을 포장했다. 그리고 바깥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태울 동안 시시껄렁한 대화가 오갔다. 저녁 식사와 식후 담배 한 개비, 방송 전 그들이 만끽하는 마지막 여유였다.

▲영상 편집 중인 PD의 뒷모습 ⓒ프레시안(서어리)

"24시간이 모자라" 촬영부터 편집까지 모두 '원맨쇼'

S#8. 방송 10시간 전, 다시 사무실.

본격적으로 편집 작업이 시작됐다. 편집 프로그램을 다룰 줄 모르는 나는 PD들 옆에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기로 했다. 어제오늘 김종태 PD, 박영수 PD, 그리고 내가 직접 찍은 영상들이 화면에 뜨자 나도 모르게 "오"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40분, 2시간, 길게 찍힌 영상들이 마우스질 몇 번으로 잘게 잘게 쪼개지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신기하다는 생각도 잠시, 30분도 안 돼 지루해졌다. 옆에서 지켜본 편집 작업이란, 지겨울 정도로 반복을 반복하는 일이었다. 쓸 만한 장면을 고르고, 인터뷰이의 말을 어절 단위로 끊고, 인터뷰이가 '음, 어' 하면서 뜸을 들이는 1, 2초의 장면을 또 잘라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똑같은 장면을 10번 이상은 더 돌려봐야 한다. 단 1초라도 낭비가 있어선 안 된다. 그래야만 3분이나 5분씩 할당된 시간에 맞출 수 있다.

외주 PD들은 촬영할 때 카메라맨부터 AD(조연출)까지 일인다역을 한 것처럼, 편집할 때도 어김 없이 '원맨쇼'를 한다. 본사 PD들은 AD가 촬영 원본 가운데 NG 장면을 들어내고 'OK 컷'만 모아놓은 1차 편집본으로 작업한다. 그러나 외주 PD들은 원본을 가지고 편집한다. 본사 PD에 비해 편집 업무가 훨씬 많은 셈이다.

굳이 밤을 넘겨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던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나마 작가들이 프리뷰(대화 내용 등 촬영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는 일) 작업을 마쳤기에 망정이지, 작가들마저 없었다면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어도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을 터였다.

영상 편집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료화면에 들어갈 수치 등 각종 기록들이 맞는지 확인도 해야 했다. 구경만 하고 있던 나도 열심히 인터넷을 뒤졌다. 여기저기서 확인 문의가 들어온다. 이제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다.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S#9. 방송 5시간 전, 사무실.

한참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하던 김 PD가 갑자기 어딘가를 흘끗거린다. 팀장이 나타났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PD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베테랑임을 자부하는 김 PD에게도 팀장의 잔소리 폭격탄은 여지없이 쏟아진다.

"초점이 잘못됐잖아. 누가 이런 내용을 궁금해 하겠느냐고요.
시청률 떨어지면 책임질 겁니까? 이 부분은 아예 들어내야겠네."

5시간을 남겨놓고 내용을 다 뒤집어야 할 상황이다. 열이 오르는지 김 PD는 줄곧 입고 있던 두터운 패딩 점퍼를 벗어 던졌다. 소매도 걷어붙였다. 그는 다리를 달달 떨고, 손톱을 깨물며 막판 작업의 초조함을 숨기지 않았다.

▲방송국 스튜디오 모습. ⓒ프레시안(서어리)

방송 늦을까, 실수할까 '벌벌' 떠는 PD들

S#10. 방송 1시간 30분 전, 방송국으로 가는 차 안.

차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꼭 잡았다. 출발하겠단 말도 없이 엑셀을 밟은
막내 송준호(가명·29) PD는 총알택시를 앞지르는 '마하의 속도'로 달렸다.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그러나 방송 시간에 맞춰 가려면 목숨을 건 도심 질주는 각오해야 한다.

"저번에 한 번은 저기 신호 앞에서 역주행한 적도 있어요. 그때 옆에 있던 다른 PD님이 '야 너 또 졸았냐'고 하더라고요. 사고 난 적은 없어요. 딱지는 많이 떼어도."

S#11. 방송 1시간 전, 방송국 본사 도착.

이날도 다행히 사고는 나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송국 출입문을 열었다. 한시가 급한데 바로 스튜디오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증을 끊어야 했다. PD들은 매주 오는데도 늘 이렇게 새로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이곳에서 일은 하지만, 본사 직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S#12. 방송 30분 전, 본사 스튜디오.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지난주 첫 출근 했다는 AD가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카메라 감독들, 출연진에게 인사를 하는 중에도 졸린
표정이었다. 그는 잠을 깨려는 듯 스튜디오실의 높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선배, 저기 위에서 떨어지면 잠 잘 수 있을까요?"
"잠을 잘 수 있는 게 아니라 잠이 확 깨겠지. 넌 지금 잠이 오냐. 방송 앞두고 졸면 어떡해."

송 PD는 가볍게 꾸중하면서도 안쓰러운 듯 "처음엔 졸린데 하다 보면 다 적응하게 돼 있어"라고 말했다.

S#13. 방송 시작, 본사 부조정실.

"10초 전, 스탠바이(대기)…, 스타트(시작)."

팀장이 마이크로 '디렉팅(소품, 출연진 동선 등을 지시하는 것)'하는 동안, PD들은 자기가 만든 영상이 제대로 화면에 나가고 있는지 확인한다. 완성된 영상들을 TV 화면으로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괜히 뿌듯하고 신기하죠? 다들 이 맛에 힘들어도 PD 해요."

김 PD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런데 옆에서 한 PD가 악 소리를 지른다. 자막에 오타가 있던 모양이다. "아까 정신이 없어 발견을 못 했다"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작은 거면 크게 티가 안 날 텐데, 만약에 큰 실수를 하면 큰일 나는 거죠. 실수한 게 쌓이면 나중에 평가에도 영향이 있을 테고."

방송이 끝날 때까지 PD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S#14. 방송 종료. 본사 부조정실.

"페이드아웃(화면 전환), 스타트.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끝났다. 자잘한 자막 실수 외 큰 문제는 없었다. PD들 얼굴이 그제서야 폈다.

"여기서 7개월 다녔다고 하니 '오래 있었다'더라"

S#15. 방송 끝난 뒤 사무실 인근 음식점.

2시간 만에 PD들은 본사에서 제 사무실로 돌아와 인근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풀이 시간이다. AD는 이제야 좀 잠에서 깬 듯했다. AD가 "진짜 촉박한 것 같다. 매주 이렇게 밤을 새야 하느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PD들 얼굴이 사색이 된다.

"그래도 계속 할 거지? 너 안 나올까 봐 걱정된다. 제발 나가지만 말아줘."

PD들이 AD에게 "제발"이라며 부탁한다. 밤샘 작업에 못 견뎌 나가떨어진 AD가 한둘이 아니라니, 하소연하는 게 이해됐다.

AD의 첫 방송을 축하하며 다 함께 잔을 부딪쳤다. 술안주로 닭볶음탕 국물을 후루룩 먹던 남자 PD 한 명이 축하 분위기를 깼다. 그는 "방금 사표 내고 왔다"고 했다. 다들 놀랐지만, 이내 "그래, 잘 했다", "언제까지 출근이냐"고 했다. 워낙 이직이 잦다 보니 외주 PD들에게 '그만둔다'는 얘기는 꺼내기 어려운 말도 아닌 듯했다.

"사장님이랑 아까 면담하는데, '저 여기서 7개월 있었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너 그렇게 오래 있었냐'고 하던데요? 나갈 때 됐죠."

뒤풀이가 끝나고 식당 밖으로 나와 다들 담배 한 개비씩 입에 물었다. 아무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지만 한솥밥 먹던 동료가 떠나는 게 아쉽긴 아쉬운 모양이었다. 김 PD가 "내가 먼저 나가야 하는데, 너희가 먼저 나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괜히 타박이다. 사표를 낸 PD가 말했다.

"돌고 돌다 어디선가 또 만나겠죠."

식당 앞 사거리에서 이들은 각자 흩어져 집으로 갔다. 어제오늘 함께 밤을 새우고, 방송국에서 같이 방송을 확인하고 뒤풀이를 하던 PD들, 이들은 6개월 뒤, 1년 뒤 어디에서 어떤 방송을 하고 있을까. 밤샘 피로 탓인지 방금 먹은 반주 탓인지 비척거리며 걸어가는 불안한 뒷모습들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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