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김남주가 죽은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뜨거웠던 고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여러 행사들이 잇달아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내게는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고인을 추모하는 산 자의 움직임이 그의 시처럼 낯설다. 확실히 나는 그와 함께 호흡했던 세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 김남주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며칠 전 김남주의 이름을 신문에서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도 다름 아닌 이 노래였다.
모처럼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니 문득 이 노래가 지금은 잃어버리고 우리 곁에 없는 과거의 어떤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함께 걷는 길’이라는 관념에 대한 것이다. 길은 대개 상반된 두 가지 의미망을 형성한다. 하나는 방랑과 유랑, 그리고 고독의 이미지로 채색되어 있다. “내가 지금껏 걸어온 이 길은 흩어진 발자국만 가득하고 내가 이제 걸어갈 저 길은 텅 빈 고독으로 가득하네.”(봄여름가을겨울, <내가 걷는 길>)라고 노래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하나의 익숙한 심상을 생각해보라.
이와는 다르게 목적(telos)에서 연역적으로 생성되는 길이 있다. 그 길은 비록 냇물처럼 여러 지류로 흩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마침내 하나가 되어 역사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아무도 그 길을 걸으라고 일러주지 않는다. 내면의 진정성이 그를 그 길로 인도한다. 하지만 이 내면은 자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적인 것이어서 타인과 공동체와 역사를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그 길은 결코 혼자 걷는 법이 없다. 작은 시내가 가뭄에 말라버리듯 일개인은 결코 험난한 길의 목적에 당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대는 이미 저문 지 오래다.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같이의 가치”를 읊조리는 것은 이제 시인이 아닌 NH 농협생명의 일이 되었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배우고 따라 부를 무렵엔 민주노동당이라는 당이 있었고 나는 그 당의 당원이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같이’ 할 수 없었던 이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좇아 헤쳐 모였고, 하나였던 당은 그렇게 세 개가 되었다. 산산조각이 난 것은 ‘같이의 가치’만이 아니었다. 모든 진보적인 기대와 믿음이 강력한 회의에 부딪혔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점점 안 좋아지는 것으로 체감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길이 끝나는 곳에 해방과 통일의 참세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길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막다른 길의 끝에 난데없이 버티고 선 커다란 사각의 링을 마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링이라는 곳이 서로의 어깨를 걸기보다는 상대의 다리를 걸어야 하는 곳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삶은 원래 정글이고 야만인데, 무엇인가에 깜빡 속아 이것을 까먹고 있었다는 듯이 맹렬하게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것이 링의 문법(文法)이었다. 링의 세계는 살아남은 자가 살아남았다는 점에 대해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세계이이며 “언제나 네 자신을 보호하라(Always protect yourself)”(<밀리언달러베이비>)는 주문은 링에 선 존재가 받들어야 할 유일한 정언명령이 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길이 끝난 곳에 링이 펼쳐지는 현재의 세계를 ‘액체 근대’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들 것이다.
“이는 현대적 삶의 다른 매개변수들처럼 진보 역시 '개인화' 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좀 더 핵심을 말하자면, 진보 개념에서 공적인 성격이 빠져나가고 사적인 것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 그것은 이제 공적인 성격이 사라졌다. (중략) 또한 그것은 개선이라는 문제가 이제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기획이 되었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제 자신들의 지혜와 자원과 근면함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좀 더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끌어올리고, 불쾌한 현재의 조건들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바로 개개 남녀들이기 때문이다.”
길의 세계는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는 반면, 링의 세계는 바꿀 수 있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신 밖에 없으며 폭력적인 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에 근거한다. 소위 말하는 ‘자기계발’은 이렇게 공적 성격이 빠져나가고 개인화 된 진보의 관념이 널리 퍼진 결과이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함께 꿈 꿀 수 있는 공통의 목적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는가? 가령 우리는 어떤 삶이 안녕한 삶이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가?
“실천주체가 - 어떤 실천주체이든지 간에 - 세상을 개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자꾸만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두 세기에 걸쳐 수많은 붓을 가지고 다양한 색으로 그려낸 행복한 사회의 이미지들은 모두 이룰 수 없는 백일몽이거나, (그 사회의 도래가 선포된 경우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중략) "도대체 어떤 사상이 보편적 해방을 향한 과정에서 (...) 아우슈비츠를 피해갈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물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 유토피아적인 역사적 목적을 이야기하려면 이제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조화로운 이상을 노래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찬란함을 노래하는 것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어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접할 때 우리는 자주 기이한 무기력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앞으로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절망은,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내가 조금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하나는 존재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물론 자기 자신이다. 이렇게 길은 끝났고 링을 무대로 한 고독한 여행의 막이 오른다.
김남주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내가 김남주의 기일(2월 13일)을 빌어 이런 객쩍은 소리들을 늘어놓는 이유는, 혹여나 김남주를 ‘기념’하는 일이 치열했던 과거의 정신을 무매개적으로 다시 꺼내놓는 일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것으로 김남주의 ‘현재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편한 자기위안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의 정신과 오늘날의 세계 사이에 놓인 뚜렷한 거리에 있다. 이 거리는 김남주 식의 치열함을 일방적으로 요청하는 것으로 좁혀질 수 없으며, 오늘날의 세계를 무기력하게 추인하는 것으로도 좁혀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김남주를 매개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일이다. 이 모색은 아마도 많이 불편하고 아파야 할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김남주의 2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모쪼록 많이 불편하고 아픈 자리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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