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가방족, 당신이 든 행복의 가치는?

[전순옥·권은정의 D-프로젝트] '가방 장인' 김종은 씨

그는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와 있었다.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간 오금동에는 지금 그가 일하는 회사가 있다. 이곳에서 근무한 지는 2년 정도. 전에는 동네에서 공방을 운영했다. 말하자면, ‘스카우트’된 것이다. 그는 가방을 만드는 일 중에서도 설계에 해당하는 패턴 전문가이다. 그, 즉 김종은 씨는 ‘이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냥 ‘선생’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가방 장인’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전부 다 한다고 보면 됩니다. 가방을 제작하는 전(全) 부문이지요. 디자인, 패턴, 제작 등 가방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다 한다고 할 수 있지요.”

김종은 씨가 가방을 만든 지는 어언 40년, 이제 오십 대 중반인 그는 16살 때부터 이 일을 해왔다. 그는 어릴 때 공부는 안 하고, 나무를 잘라서 뭘 만들다가 아버지에게 엄청 혼났던 기억이 많다고 한다. 만드는 솜씨는 타고난 게 아닐지….

▲'가방 장인' 김종은 씨 ⓒ프레시안(손문상)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서울에 있는 수출 가방 본사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에게는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

“정말 밑바닥부터 이 일을 배우고, 해왔지요. 하지만 이 일은 내 아이들에게 하라고 권할만한 게 못됩니다. 3D 업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은 힘든데 수입은 정말 적거든요.”

초창기에는 임가공료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했다. 학력이 짧고 배운 것 없는 젊은이에게 밥 먹여 주고 용돈 주면서 일거리를 주는 게 그저 고마웠다. 두 달에 한 번 봉급 받는 생활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열심히 배우면 더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면서 배웠다. 윗사람이 일하는 것을 따라서 해보고, 그것도 모자란다 싶으면 집에서 혼자 패턴을 그리며 낮 동안의 일을 되새겼다. 그는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배웠는가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봐야 한다고 믿는 이다. 그래서 동료들이 술 마시고 노름하고 경마장 갈 때 그는 외국어 단어 하나 더 익히려고 애썼다. 그는 가방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데 있어서 어느 한 수준에 머무르기를 단연코 거부했다.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다음 계단을 오르려고 다짐했다.

“밑에서 일하다가 미싱으로 올라가야지 마음먹고 일했지요. 그래서 오야 미싱(미싱 장(長))까지 하고 그랬는데, 또 한계가 있더라고요. 일을 하면 할수록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다른 길은 없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왜냐하면 다 같이 일하는데 누구는 저만큼 가 있고 누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왜일까?’, 그런 생각이 든거지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가진 이 기술이 바로 제가 가진 재산입니다. 내 조건이 나아지게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오늘 날 나를 만든 것이지요. 이제는 올라올 데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요즘 들어서는, 가방을 만드는 일을 한 것에 어느 정도 보람을 느낀다. 물론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이제 와 탓할 일은 아니다. 그전에 하청공장 운영도 해보았지만, 여섯 번이나 ‘엎어졌다’. 인력 문제나 수입이 안 맞아서, 또 주문받은 대로 일을 해주고도 대금을 못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힘 있는 자에게 할 수 없이 당한 것이었죠.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어요. 지금 그 정도까지 심한 경우가 없는 걸 보면, 사회가 조금이나마 투명해진 것 같다고 해야 할지….”

김종은 씨는 자신이 70년대 수출역군, 가방 수출의 선두주자라는 사실을 꼭 밝히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섬유나 전자 같은 분야만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고 기억하지만, 가방 제조업도 그 안에서 당연히 한몫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산업 현대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그가 기억하기로는 가방을 만들던 회사에서 가발 공장도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 시내 한가운데 가발과 가방 공장이 있었던 시대, 청년이었던 그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일을 배웠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제대로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희망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날은 좀처럼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전은커녕 당장 가족을 제대로 건사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쉬지 않고 일해도 생활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래서 ‘에라, 이 일 아니면 밥 못 먹을까! 때려치우자’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아예 ‘이 땅을 떠나겠다’ 마음먹었다.

서른 즈음이었나? 원양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오징어잡이 어선이었다. 배 측면에 달린 기계에서 자동으로 잡아 올린 오징어를 건져내는 일이었다. 하루 3시간만 자고, 밥은 6끼를 먹었다. 일종의 ‘죽음’이었던 시간을 목숨을 걸고 견뎠다.

“그런데 고생을 하더라도 육지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극기 훈련 삼아 했는데, 거기서 얻은 게 있습니다. 아주 큰 교훈이죠! 세상에 안 될 게 뭐가 있는가! 그걸 안거죠. 힘들 때마다 그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다시 가방 만드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방 제조 환경을 바꿔보고자 했다. 지역을 옮겼다. 일본으로 건너가 17년간 가방을 만들었다. 1992년의 일이었다. 가타가나(かたかな)와 히라가나(ひらがな)도 몰랐던 그는 일본어를 차근차근 배워가며, 도쿄 근교에 자신만의 공장을 차렸다. 운 좋게 큰 가방회사에서 함께 일하자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일본에서는 가방 만드는 기술자인 자신을 한국에서와는 아주 다르게 대우해줬다고 한다. 물론 벌이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디자인 샘플을 만드는 일을 한 지는 5년 되었다. 그동안 국내 가방 트렌드(흐름)를 제대로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우리나라의 가방 제조 현장이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빨리빨리! 그렇게 일하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에요. 그렇게 하면 품질이 떨어지는데도 말이죠. 당연히 기술도 떨어지지요.”

그는 결국 가장 손해 보는 이들은 소비자라고 한다. 제 돈 주고 제값의 물건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돈은 돈대로 지불하면서 질 낮은 가방을 들고 다니게 된다는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 가방 제조업의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가방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가 없습니다. 대가 끊어지고 있어요. 이렇게 5년에서 10년이 지나면, 아마 역수입해 와야 할 겁니다. 우리 주문을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 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지금 가방 만드는 일이 옛날처럼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제조업 현장에 고학력자가 많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전문대 이상 졸업자들이 와서 일다가도 금방 가버리고 마니까요. 비전도 없는데다, 실컷 일해 봐야 초봉이 120만 원에서 150만 원정도 밖에 안 됩니다. 게다가 일하는 시간은 길고, 온종일 본드 냄새도 맡아야 하니 못 견디는 거죠. 우리야 배고픈 세대였으니 견뎠지만요. 인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장 못 이기고 나가고 마니,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가방 제조 인력을 키우기 위한 공적 지원 시스템은 없는 것일까.

“현재 정부에서 소상공인 즉, 하청업자들에게 운영지원금을 주는 게 있다는데 우리는 ‘컴맹’인데다가 배운 것 짧으니, 지원절차를 제대로 알 수 없어 신청하기가 어렵죠. 또 신문 볼 시간도 없으니, 세상에서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지요. 일에 얽매여 있으니, 우물 안 개구리에 맨 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니….”

ⓒ프레시안(손문상)

그는 자신을 '에이 클래스(A-class)'에 속하는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부심도 있고, 외부에서도 그렇게 인정받고 있다. 앞서 그는 대통령 영부인의 해외순방 용 핸드백을 제작했고 최근에는 대통령의 서류가방을 만들기도 했으니, 자타공인(自他共認) ‘가방 명장’이다.

“제일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을 다 잘하니 장인이라고 보는 거죠. 패턴부터 가죽 재단, 기계로 가죽을 깎아 두께를 조절하고 본드를 칠하고…. 과정 전체의 기술이 단계마다 완벽해야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습니다. 지금 가방 제조업 장인을 꼽으라면, 대한민국에 한 스무 명 정도 될 겁니다. 그런데 하나에서 열까지 다 잘하는 이는 아마 다섯 명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부분만 잘해도 장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러 가지를 다 잘하는 이가 진짜 장인이 아닌가요?”

만드는 전 과정의 난이도를 따져 볼 때 옷은 가방의 3분의 1정도에 그친다고 말한다.

“힘이 많이 들어요. 가죽을 만지는 일이라서요. 같은 봉제업이라 할 수 있지만, 여자가 하기에는 힘든 일입니다. 여자 힘으로는 버거운 일이죠. 수출 열풍이 한창이었을 때에는 여성 인력이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가방 제조 현장에서 여성을 찾아기란 어렵습니다.”

가죽을 다루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 외에도, 그는 가방 제조 현장의 조건이 의류와 구두에 비해서 제일 열악하다고 말한다.

“인력이라고 해봐야 한 공장에 3~5명 정도, 많은 곳이라고 해봐야 10명을 넘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감은 늘 부족하지요. 판매회사 쪽은 재고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적은 수량만 주문하니 생산량이 늘지 않고, 단가가 최저 액수이니 이윤이 전혀 남지 않아요.”

거기다가 국내 하청일 경우, 임금이 외국보다 높아 단가를 낮추려고 외국에서 가방을 만들어 오는 회사가 점점 늘고 있다. 역수입이다. 국내 가방 기술자들이 할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 기능공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는 단언한다.

“가내공업이 죽으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제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봐서 잘 압니다!”

국내 가방업계가 되살아나기 어려운 현실에는 다른 배경도 있다. 가방을 포함해 어떤 분야건 돈이 좀 된다 싶으면, 대기업이 손을 대 결국 소규모 업자들이 망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투자하는 즉시, 작은 규모의 업체 목숨이 끝장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대기업은 자기들이 조그만 공방의 숨통을 얼마나 많이 조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돈 냄새만 맡고 멋대로 사업에 손을 댔다 잘 안 되면 바로 털고 나간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어제오늘의 것도 아니다.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정부에서 우리 같은 기술자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일지 의문만 품다가 그냥 포기하고 마는 거죠. 전순옥 의원이 같이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최근 토요일이면 회사가 쉬어 다행이지만, 하청 공장 형편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남들 쉬는 것처럼 한 달에 4번 쉬면 손에 남는 게 없어요. 쉬는 만큼 수입이 줄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쉴 수가 없죠. 그나마 하루도 안 쉬고 일해야, 그게 자기 수입으로 돌아오니까요!”

국내에서 좀 이름 있는 구두회사에 납품하는 하청공장들도 사실 알고 보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하고, 죽지 못해서 일한다고 보면 맞을 거라고 한다.

“공장하는 한 친구가 얼마 전에 이렇게 하소연하대요. 수금해서 직원들 월급주고 나니, 내 손에 남는 게 고작 17만 원이더라!”

ⓒ프레시안(손문상)

김종은 씨는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공장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짧은 거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제조업은 서울과 경기도 하남·부천 지역에 몰려 있는데, 그중에 서울지역이 제일 많다. 중랑구 일대 중곡동, 면목동, 중화동, 망우리 등에 가방 제조 공장이 자리해 있다. 거기에만 약 200여 개의 공장이 있는데, 거의 전부가 지하에 있다. 그래서 이들을 ‘지하공단’이라고 한다며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가방공장은 길가 건물 지하에 있었다. 구희회 사장이 두 사람을 데리고 일하고 있었다. 사장은 열심히 미싱을 타고(미싱질을 하고) 있었다. 대형 여행용 가방에 쓸 큰판의 가죽을 박음질하고 있었다. 젊은 남자 직원과 새댁쯤으로 보이는 여자 직원(조선족 여성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우리말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이 가죽 부분에 약칠을 하고 있었다. 본드 칠을 하는 중이라는 말이다. 공장 안에는 본드 냄새가 가득했다. 그나마 이 공장은 공간이 넓어서 숨 쉴 만 했다. 지난번 다녀온 유홍식 명장의 구두공방이나 양영수 구두 장인이 수업하던 교육장에서 맡았던 본드 냄새가 떠올랐다. 봉제공장에 떠돌던 먼지는 또 어떤가! 제조업에서 실내 환기가 왜 중요한 작업 조건에 들어가는지 다녀보면 알 수 있다.

구희회 사장은 말로는 인사를 하면서도 손을 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미싱 박음질 틈틈이 눈을 들어가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손님들이 왔다고 일어서서 차를 준비할 여유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그들에게 내가 ‘차를 드시겠냐?’고 물었다. 손님이 커피를 타면 왜 안 되는가! 나는 기꺼이 차 심부름을 맡았다. 민망해하는 구 사장에게 인스턴트 커피를 건네주고는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을 전해준다.

“전화가 왔어요. 올해 무슨 디자인학과 졸업생이라고 하는데, 여기 와서 일 좀 배울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가방 만드는 일을 배우고 싶다고요.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요. 뭣 하러 배우려고 하는지 참….”

그는 이런 일은 비전이 없다고 말했다. 내 자식한테도 가르칠 생각이 없는데 남의 귀한 자식한테 이 일을 하라고 하면 그건 ‘사기’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일을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건 맞지요. 하면 될 것 같은데, 이런 여건이면 어렵다는 겁니다. 결과가 눈에 뻔히 보이니까요. 그걸 알면서 하라고 하면 내가 그를 속이는 거죠.”

구 사장이 말을 이어간다.

“물론 본인 생각에 달려 있어요.”

그는 덧붙여 말하고 싶어 했다.

“그 어설픈 대학 만들지 말고 기능직을 키우는 고등학교나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대학 다닌다고 부모 등골 다 빼먹고 졸업해서 이런 봉제공장에서 일자리 찾는다면, 사회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는 자기도 시민들이 모이는 시청 앞에 나가 할 말 좀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런데 못 나가지요. 시간이 없어요. 내가 나가면 누가 물건(가방)을 만듭니까? 물건을 못 만들면 우리는 당장 굶는데요! 그러니 할 말이 있어도 나갈 수가 없는 겁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종은 씨가 구 사장이 박음질해놓은 가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 이 부분, 이것도 두 번 더 마무리 과정을 거치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제품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죠.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판매업자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공정을 두 번 더 거치면 공임이 그만큼 추가되니까요. 안 해도 팔리는데, 뭐 하러 돈을 더 들이냐는 거죠.”

김 이사는 이렇게 가방을 하나 만들면, 노동자가 받는 공임이 총 판매가격 중 얼마나 되는지 짐작해보라고 했다. 대충 계산을 맞추려 속셈을 하는 사이, 김 이사가 먼저 말한다.

“6퍼센트입니다. 겨우 6%에요! 우리가 10퍼센트 받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이 대목에서 또 다른 나라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나오는 세계적인 명품 가방 공장을 가면, 다섯 또는 일곱 명 정도의 장인들이 작업실에 앉아 일일이 공들여 가방을 꿰매고 있다고 한다. 가방 한 개를 만드는데 한 달도 괜찮단다. 그들은 아마 중간 중간 차도 마시고, 눈을 들어 창밖도 바라보고 할 것이다. 가죽에 실을 꿰매고 있는 이 계절, 나무와 하늘의 빛깔을 느끼면서 작업을 할 것이다.

모든 물건에는 만드는 사람의 숨결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느끼면서 만든 제품과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만든 제품 중에 어느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일까. 과연 우리는 그게 무슨 차이냐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우리가 명품이라 일컫는 제품에는 제대로 대우받는 노동자의 생활과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노동자의 시간은 그래서 곧, 품질로 직결되는 것이다.

‘장인의 숨결이 배인 명품’은 그저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핸드메이드(hand-made)’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제대로 대우받는 노동자의 수작업일 때 내세울 수 있는 말이다. 본드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에서 자세 한번 바꿔 앉을 여유 없는 노동자의 손은 그저 ‘기계화된 손’일 뿐이다. ‘사람의 손’이 아닌 것이다.

▲ 왼쪽은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 오른쪽은'가방 장인' 김종은 씨. ⓒ프레시안(손문상)

김종은 씨는 스스로 입바른 소리 잘하는 이라고 한다. 할 말을 다하고 살면, 사는 게 좀 팍팍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괜찮다고 한다.

“내 기술을 믿으니까요. 제 정도 실력이면 아직 쓰임새가 좀 있는 편이니까요.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려면, 실력 역시 중요하죠. 하하하….”

그는 가방 만드는 이들이 힘을 모아서 할 말 좀 하면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동안 우리 쪽에는 모험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없었어요. 그저 다른 누군가가 다리를 놓아주면 그 다리를 건너갈 마음만 있지, 다리를 함께 만들겠다는 마음은 없었던 거죠.”

평생 가방 만드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이들 중에는 자포자기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1980년대 가방 수출업계의 선두 주자들이 이제는 기술이 있어도 갈 데가 없고 열심히 일해도 가족을 먹여 살릴 형편이 못 된다. 그러니 열에 아홉은 자기 집이 없고, 가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혼자 고시원에서 사는 이들이 많다. 이게 가방 제조업계 종사자들의 현실이다.

“좀 나아지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방 장인’ 김종은 씨가 뭔가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해야 아름다운 물건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지금처럼 분명하게 알게 될 줄 몰랐다. 지금 가방을 들고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여, 당신의 가방 속에 담긴 행복의 크기가 얼마만 한 것인지 함께 들여다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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