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학자의 관찰 노트>(에드워드 O. 윌슨·조지 셀러 외 지음, 마이클 R. 캔필드 엮음, 김병순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 ⓒ휴먼사이언스 |
이 순간 필요한 것이 기록이다. 기록은 기억의 지속시간을 종이와 연필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연장시킨다. 이 대목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 한 권이 있다. <과학자의 관찰 노트>(에드워드 O. 윌슨·조지 셀러 외 지음, 마이클 R. 캔필드 엮음), 김병순 선생님께서 옮기시고 휴먼사이언스에서 펴낸 책이다.
<과학자의 관찰 노트>는 하버드대학교의 곤충학자 마이클 캔필드가 자신을 포함한 세계적인 자연 연구자 15명의 관찰 노트를 엮은 책으로 원제는
우선 그들은 관찰 노트를 어떻게 작성하고 기록하는지, 현장 탐사에서 만난 문제는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고 거기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지를 실제 관찰 노트에서 발췌한 내용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또한 마이클 캔필드는 세계적인 자연학자들의 다양한 관찰 노트를 소개하면서도 어느 것이 좋다고 판정을 내리거나 '진정한' 관찰 노트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지 않고, 다양한 관찰 노트를 통해 독자 자신에게 알맞은 관찰 노트를 스스로 찾기를 권하고 있다.
이 책이 더욱 소중한 이유는, 관찰 노트를 작성하는 방법과 기록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사례와 조언의 제공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자연 과학자의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 또한 담겨 있다. 연구 대상을 찾아나서 만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과학자로서 엄밀하고 냉철하게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모습과는 또 다른 것으로,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은 결국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따라서 자연과 소통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관찰 노트라고 할 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다면 알고자 하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기록의 객관성과 정확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세 또한 관찰자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우쳐준다.
이처럼 관찰 노트는 자연 연구자의 진실한 숨결이다. 기록 당시에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누구를 의식하며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을 알기 위해 지나야 하는 모든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이 관찰 노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찰 노트는 자연 연구자의 온전한 속살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거장들의 숨결과 속살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볼 수 있다는 것은 <과학자의 관찰 노트>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 ▲ 생태학자 로저 키칭이 파랑띠물총새를 관찰 기록하고 그린 것. ⓒ휴먼사이언스 |
다윈 이전부터 자연사 연구자가 관찰한 내용을 기록하는 오랜 전통은 '종이와 연필'을 쓰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 화석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종이와 연필을 사용하여 자신의 관찰 노트를 작성한다.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현재는 노트북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 지피에스(GPS) 좌표 기기 등 다양한 도구를 통해 기록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자연 연구자들이 여전히 종이와 연필을 통해 직접 쓰기를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곤충생태와 생물다양성을 주로 연구하는 생태학자 로저 키칭(Roger Kitching)의 표현을 빌려본다.
"잉크는 전자의 단순한 분극보다 더욱 항구적이다. 우선, 잉크는 자기장의 영향으로 변질되지 않으며, 인간의 시각 인지 체계(다시 말해, 읽기)는 세월이 흘러도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수첩은 지금도 여전히 기록을 보관하는 필수 수단이다. 수첩은 또한 어떤 기상 상황에서도, 전기 공급이 끊어져도 기록할 수 있다."(116쪽)
또한 2002년 <디스커버 매거진(Discover Magazine)>에서 선정한 가장 중요한 여성과학자 50인 중 한 명이었으며 고생태학자인 애나 케이 베렌스마이어(Anna Kay Behrensmeyer)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관찰노트는 (비가 오나 햇볕이 내리쬐나) 어떤 순간에도 기록할 수 있으며, 전지가 닳아 없어질까 고심하지 않아도 되고, 떨어뜨려도 망가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GPS 좌표를 노트에 기록하는데, 디지털 파일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파손되는 경우를 대비한 조치다."(146쪽)
게다가 많은 자연 연구자들은 그림 솜씨와 무관하게 관찰 노트에 그림을 그려 넣으라고 권한다. 그림은 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그림은 글과 사진에 비하여 관찰 대상과 동행하는 시간을 길게 해준다. 사진은 셔터 한 번 누르는 것으로 피사체가 기록되지만 그림은 훨씬 더 긴 시간을 요구한다. 결국 대상에 대한 관찰의 깊이와 대상에 대한 간절함에 있어서 그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림은 자연 연구자의 관찰 노트에서 빠질 수 없는 운명적 요소가 된다.
하루 종일 밖에서 무언가를 쉬지 않고 관찰하는 동물행동학자, 조류학자, 생태학자, 고생물학자, 식물학자, 곤충학자, 인류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기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데 관찰노트와 같은 기록의 중요성이 그들 과학자에게만 필요한 것일까?
| ▲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김성호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어느 누구도 그 기록이 책으로 엮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오는 단어가 10개를 넘지 않는다. 둥지, 암컷, 수컷… . 게다가 날마다 비슷비슷한 일들이 벌어진다. 똑같은 모습으로 나무를 파내 둥지를 짓는 과정은 2주가 이어지고, 암수가 2시간 간격으로 교대를 하며 알을 품다 밤이 되면 수컷 혼자 둥지를 지키는 것도 2주가 이어지며, 역시 암수가 교대로 먹이를 날라 어린 새를 키우는 과정은 4주가 이어진다. 물론 새들의 움직임을 분 단위까지 기록했다.
그러나 이처럼 지루하고 따분한 이야기를 누가 책으로 엮어줄 것이며, 또한 누가 읽겠는가? 그럼에도 책이 나오고 더군다나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보이는 모든 것과 느끼는 모든 것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날마다 하루가 어떻게 열리는지, 바람은 어디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 둥지를 튼 나무의 잎은 날마다 어떻게 색을 달리하며 그 크기가 변하는지, 주변에서는 어떤 소리들이 들리는지, 햇살은 둥지에 시시각각 어떻게 와 닿으며 빗줄기는 또한 둥지의 어떤 방향으로 와 닿는지, 자연은 어떻게 날마다 옷을 갈아입는지를 빠짐없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 기록이 책으로 묶여 세상과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 제대로 된 디지털 카메라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며, 스마트폰의 카메라 성능도 뛰어나다.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참으로 많이도 찍는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만 있다는 것이다. 이제 노트와 연필을 더불어 지니기 바란다. 노트와 연필에 상당하는 것이라도 상관은 없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기 전 <과학자의 관찰 노트>를 꼭 읽어보기 바란다. 무언가를 온전히 남기고 싶다면 말이다.
| ▲ 인류학자 캐런 크레이머가 마야 족 마을에서 일어난 일과 활동을 날짜 순서대로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휴먼사이언스 |
| <과학자의 관찰 노트> 중에서 "나를 행동하게 하고 무엇보다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 것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동물들의 형태 또는 '외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호기심이었다. 동물들은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1950년대와 1960년대, 내가 기본으로 챙겨 다니던 그림 도구는 스케치북이나 고급 백지철, 주머니칼, B연필이었다. B연필은 심이 뾰족한 상태라면 연필을 바꾸지 않고도 그림의 명암과 묘사를 아주 세밀하게 잘 표현할 수 있다." (동물학자이자 예술가 조너선 킹던) "잘 정리된 관찰 노트는 당신이 관련된 다른 많은 자료를 체게적으로 수집할 수 있도록 "중앙 통제 센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관찰 노트에 기록하는 것 이외의 많은 정보, 이를테면 사진, 녹음 자료, 야외에서 수집한 표본, 다양한 형태의 컴퓨터 파일 같은 것이 생겼을 때, 그 데이터를 모두 관찰노트를 기준 삼아 매우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지 조사에 합류하기 전에, 그 일을 마쳤을 때 어떤 종류의 기록이 가장 중요할지 미리 생각해 보면 좋다. 관찰 노트의 또 다른 가치는 당신의 새로운 생각과 관찰 의견을 생성해 내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옥한 산실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노트에 흥미진진한 관찰 내용과 의문점 등 온갖 다양한 생각을 적다 보면, 그것은 어느새 새로운 실험과 프로젝트를 위한 강력한 촉매제로 바뀌게 된다." (동물생태학자 에릭 그린) "천국이 있어서 내가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무한한 생명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탐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말고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끝없이 쓸 수 있는 노트를 가지고 갈 것이다. 연구실에만 앉아서 연구하는 사람들(대개 분자생물학이나 세포생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 "동식물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개인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 여러 모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과학 지식의 축적에 기여하기도 한다. 취미로 새를 관찰하며 목록을 작성하는 활동은 새 분포 현황을 상세하게 파악하는 데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적어도 북아메리카와 유럽에 걸친 지역의 방대함과 고립된 개체군의 분포, 저밀도의 집단 이동이나 방랑 형태들을 볼 때,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엄청나게 중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것은 실제로 전문 조류학자들이 아니라 아마추어 새 관찰자들 덕분이었다." (탐조가 켄 카우프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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