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노동'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은수미, 노동의 재구성] "노동의 종말? 노동의 재구성!"

제레미 리프킨이 1994년에 <노동의 종말>을 쓰기 이전부터 노동의 종말론이 풍미했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의 세계화가 진전되는 한편 전 세계적으로 노동조합 조직율이 하락하고 신중간계급이 부상한 것이 중요한 증거였다. 환경, 생태, 여성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부상하면서 시민운동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 역시 또 다른 이유였다.
이미 1973년 다니엘 벨은 <탈산업 사회의 도래>에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산업구조 변화와 인터넷 및 월드와이드웹의 발전에 따라 노동이 아닌 지식이 핵심 가치로 바뀐다고 했다. 지식기반 사회 즉 노동이 생산의 원천인 노동가치론이 아니라 지식이 생산의 원동력인 지식가치론을 강조했다. 지식이 권력의 원천이고 교육이 계층이동의 수단이며 정보와 지식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즉 사회적 자본이 산업 및 금융 자본을 대체한다고 했다. 다양한 사회 문제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나 '계급' 문제로 전화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며 "'고양된 학생의식'조차도 '억압'에 대한 의식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결핍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가난이나 불평등과 같은 생활수단의 결핍과 달리 희소한 특권과 지위 때문에 발생하는 결핍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보다. 최근 근로빈곤, 비정규직, 저임금, 양극화 등 노동과 불평등이 전 세계적인 이슈이다. 지난 50여년 간 성장이 가장 중요한 기치였던 한국에서조차 복지 논쟁이 들끓고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최우선이라고 한다. 가난은 게으르거나 능력 부족 때문이라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과거보다 교육수준이 더 높아지고 인터넷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청년층은 잃어버린 세대 혹은 저항의 세대이며 영 옥스퍼드 출판사 선정 올해의 단어가 '쪼그라든 중산층(squeezed middle)'이다. EU의 학자들은 이중화의 시대(The Age of Dualization)를 거론하고 OECD는 2011년 <갈라진 우리: 왜 불평등이 증가하는가>라는 등 보고서를 발간했다. 올 1월 25일 시작한 다보스 포럼의 주제 역시 '대전환: 새로운 모델의 형성(The Great Transformation: Shaping New Model)'이다. 심지어 <세계는 평평하다>로 유명한 미국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은 갑자기 "평균은 끝났다"며 시침 뚝 떼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자기관리, 자기계발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구조나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청년 백수가 무슨 벼슬이냐"며 힘든 일을 싫어해서 청년실업이 발생한다는 의견이 없지 않지만 빈도나 강도가 현저히 줄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노동으로 되돌아간 것일까?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가 이전의 연어가 아니고 내 손을 스쳐 흘러가는 강물이 이전의 강물이 아니듯이 지금 불거지는 노동문제는 이전의 것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이 생산의 원천이고 자본은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지라도 드러나는 구체적인 내용은 바뀌었다. 과거 노동의 표준은 제조업, 정규직, 생산적 노동이다. 노동자는 자신을 채용한 사용자의 작업장에서 1일 8시간의 일을 하고 사용자 및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준 대가로 임금을 받았다. 그것이 표준 노동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다른 업체가 낀다. 조선시대 지주가 소작을 부칠 때 중간에 마름을 낀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최근 일반 청소업무를 직접 채용하는 기업은 매우 드물며 대부분 용역 업체에서 노동자를 받아 일을 시킨다. 고학력과 전문적 기술을 요구하는 업무도 업체가 끼는 경우가 많다. 300인 이상 대기업 병원 중 80% 이상이 간호조무나 간호보조에서부터 간병·환자배식·세탁 업무를 용역이나 파견업체 소속 노동자에게 맡긴다. 은행이나 보험사 등의 금융계는 2000년대 초반에 상당수의 업무를 용역이나 기간제로 바꾸었고 거대 통신회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선·철강·자동차 등 전통적인 제조업 역시 비슷한 현상이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의 교수나 시간강사를 파견하는 업체가 생기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농담이 농담 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백화점과 할인마트는 그야말로 비정규직의 전시장이다. 장을 보기 위해 차를 끌고 할인마트에 가면 주차관리를 하는 용역업체 직원이나 시간제 노동자와 가장 먼저 마주친다. 쇼핑카트를 정리하는 직원에서부터 매장 내 각종 판촉 직원, 판매사원 역시 대부분 용역이나 파견이다. 장을 다 보고 계산대에 서면 계산을 도와주는 비정규직을 만나고 사은품을 받으려고 고객서비스 센터에 가도 그러하다.
노동자인지 아닌지 애매한 경우도 많다. 대학을 졸업한 학원 강사들이 가장 많이 듣는 것이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는 말이다. 1주 5일 이상 학원에서 근무하고 학원 일정에 따라 강의를 하지만 급여명세표나 근로계약서는 없다. "저는 급여라고 생각하는데 학원에서는 수수료나 뭐 다른 말을 써요." 학원 강사 8년차 이지현씨(32세)의 대답이다. 보험회사 판매원, 골프장 캐디, 대리운전기사, 퀵서비스, 트럭 운전사 등 많은 직종도 노동자성이 논란이다. 가사도우미, 노인간병사나 요양사 역시 일을 하지만 노동자인지 불분명하다.
이와 같은 노동을 과거의 노동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정규직이 아니다", 혹은 비(非)정규직이다라는 것만으로는 너무 애매하다.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 함은 나는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닌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방식이다. 정확한 정체성을 알 수 없거나 존재하지만 비어있는 무엇인가를 굳이 지칭해야 할 때 이와 같은 잔여적 범주를 사용한다. 그 자체로 닫히지 않고 뒷문이 열려있는 0이 아닌 무한대이다보니 불안정하다.
지금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노동, 바로 우리가 하는 노동을 정규직이 아니라는 것 외에 적절히 부를 이름조차 없는데 노동문제가 폭발했다. 따라서 노동가치론을 부정하거나 과거의 노동가치론을 그대로 읊는 것도 답은 아니다. 노동의 종말이나 노동의 복원이 아니라 '노동의 재구성'을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노동3권을 보장받고 인간답게 살 헌법적 권리를 갖는 것. 차별 없는 적정한 임금이나 근로조건만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국민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갖는 것.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칼럼의 문패가 노동의 재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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