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처럼 키운 소를 집 앞에 생매장, 밤에 불끄고 누우면…"

[구제역 재앙②] "나랏님 잘 못 앉으면 흉년과 돌림병이 돈다는데"

구제역이 국토의 2/3가량을 휩쓸고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까지 더하면 경남·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전염병이 퍼져 있는 셈이다. 구제역이 쓸고 간 지역엔 한숨과 눈물이, 구제역이 닥치지 않은 지역은 극도의 불안감에 떨고 있다.

아직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충북 영동에서 소 10여 마리를 키우는 한 농부. 구제역이 청원까지 내려오자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아무리 자기 축사에 방역과 소독을 철저히 해도 인근 축사에 구제역이 걸리면 꼼짝없이 모두 살처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다 옆 동네에 구제역이라도 생기면 원수가 되고, 내 축사에 구제역이 걸려도 이웃에게 내가 원수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게 막는다고 막아지는 병인지도 모르겠다. 빨리 시간이 갔으면 좋겠는데, 이게 내년에는 안 오고 내후년에는 안 온다는 보장 있느냐"고 한 숨을 쉬었다.

올 여름 채소 농사도 망했다는 그는 "나랏님이 잘 못 앉으면 흉년이 들고 돌림병이 돈다는데 딱 올해가 그 꼴"이라고 읊조렸다.

▲ 12일 충북 충주에서 또 다시 구제역이 확인 돼 방역 당국이 살처분 대상 돼지 매몰지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제역이 쓸고 간 자리에 남은 농민들은 한숨과 눈물 뿐이다. 경기도 파주에서 '새벽 목장'을 운영하는 박승대(46) 씨는 지난달 30일 키우던 106마리의 젖소를 차디찬 땅속에 묻어야 했다. 박 씨는 "한 마리 한 마리 작별 인사를 하면서 살처분 만이 능사인지, 한 마리라도 살릴 길은 없는지 답답했다"고 회고했다.

박 씨는 91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가 채소 농사를 짓다 92년부터 젖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에 7마리로 시작했지만 106마리까지 늘었다. 우유는 매일 1550kg을 생산해서 공급했다. 2009년 말엔 HACCP 인증을 받고 항생제, 바이러스, 질병 등 각종 위해 요소를 차단, 안전하고 신선한 우유를 생산하고 공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박승대 씨가 젖소를 키우는 곳은 고양시와 파주시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20여 축산 농가가 모여 젖소, 한우, 돼지 등 3000마리 이상의 가축을 사육해 왔다. 그러나 지난달 19일 인근의 한우 농가가 구제역 양성 판정을 받았다. 파주시에 구제역 방역 초소는 23일에야 설치됐고 그제야 몇몇 마을 길목이 통제됐다고 한다. 구제역이 이미 일파만파 퍼진 뒤였다. 결국 한 곳의 한우 농가를 제외하고 박 씨 마을의 모든 농가가 매몰 살처분 대상이 됐다.

박 씨는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됐고, 타시도로 확산하는 걸 차단하는데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기존 발생 지역은 농가의 살처분이 방치, 지연됐다"고 반발했다.

마을 사람들은 정신적 충격에 잠도 잘 못 이루고 있다. 박 씨 이웃에 사는 친구는 집 앞에 소들을 매몰했다. 그래서 친구의 어머니는 밤에 무서워서 잠을 못 잔다고 했다.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눈앞에 소가 보여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12일 진보신당이 주최한 '구제역 사태, 대안 모색을 위한 긴급 토론회'에서 이와 같은 수기를 발표한 박 씨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며 "살고 싶습니다"라고 울먹였다. 그는 "축산 농가들은 힘들겠지만 건강에 유념하면서 구제역 종식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토론회에 박 씨와 함께 온 같은 지역 이종수(46) 씨도 "소에게 개별적으로 다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애정이 많았다. 젖소 농가에서 소는 진짜 가족이다"라며 "손해가 있더라도 꼭 살리고 싶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농민들에겐 경제적 손실보단 가족 같은 소와 돼지를 죽여야 한다는 충격이 더 큰 듯했다. 돼지는 거의 생매장 당하고 있다. 도축 목적이 아닌 우유 생산을 위해 젖소를 키우는 농가에서는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 피해가 더 크다. 이런 불안감은 아직 구제역이 확산되지 않은 지역도 마찬가지다.

곧 설인데…"자식들 고향에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이번 달 초, 전라북도 지역은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구제역이 퍼진 충남 당진의 한 축사에서 새끼돼지 수천 마리가 진안과 김제 등으로 반출됐기 때문이다. 구제역이 잠복기를 거쳐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상으로 나타나 신고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반출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난 6일 진안에서 9500마리, 김제에서 2500 마리 등 총 1만2000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하며 일단 한시름 놓게 됐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지속되고 있다. 전라남·북도 지역으론 아직 구제역이 퍼지지 않았다.

구제역 위험에 떨고 있으니 기자의 취재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처음 취재를 시도했던 전북 진안의 한 농민은 "모두가 긴장 속에 있다. 최근 진안 지역 돼지 살처분으로 인해 모두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서 전화 통화도 쉽지 않다"고 전했다. 왕래뿐만 아니라 말 한마디도 아끼고 있는 살얼음 같은 현장이다.

김제에서 100여 마리의 한우를 키우고 있는 고상현(51) 씨는 계속되는 방역 작업에 잠도 못 이룰 정도이다. 하지만 자신의 전 재산이자 가족 같은 한우들을 잃지 않기 위해선 힘들어도 있는 힘껏 방역에 임하고 있다. 20년 동안 애써오던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다.

당장 가장 불편한 점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혼식장도 상갓집도 못 가고 발이 묶여 있는 상태다. 그는 "이웃집이나 포도시(겨우) 간다"며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는 게 영 아쉬운 듯 말했다.

당장 다가오는 설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이다. 친척들 일부가 같은 지역에서 한우를 키우는데 모두들 타지에 사는 자녀들에게 명절에 내려오지 말라고 당부를 해 놓은 상태다. 어느 때보다 쓸쓸한 설을 맞게 됐다.

경북 김천시는 아예 주민들에게 "자녀들의 귀향을 자제하도록 당부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김천시는 또한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북도지사에 이와 같은 내용의 특별 담화문을 발표해 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고 씨는 지난해 쓴 사료비나 시설비 등을 위해 쓴 빚도 갚아야 하는데 한우가 대목인 명절을 앞두고도 도축이 여의치 않다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전라북도는 아직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아 폐쇄한 도축장은 없으나 구제역 확산을 우려한 축산농가들이 출하를 서두르고, 유통업체들이 설 물량 확보에 나서면서 도축장은 이미 북새통이다. 이 틈을 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날개를 달아다는 소식에 한 숨만 더 나온다.

또한 송아지는 아예 이동과 판매가 제한돼 이 역시 농가 살림에 보탬은 되지 못하고 있다. 고 씨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라며 "그저 빨리 종결되기만을 바란다"라고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 충남 태안에서 백신 접종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정부는 백신 접종을 전국으로 확산키로 했지만, 백신을 거부하는 농가들이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연합뉴스

도축, 백신 접종 어려움…버스, 편지도 끊긴 마을

다른 지역 상황도 도축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미 78%의 구제역 예방 백신 접종률을 보인 강원도는 도내 5개 도축장 중 횡성 도축장에서 지난 11일 구제역 확진을 받은 한우가 발견되면서 하루 만에 다시 폐쇄됐다. 설을 앞두고 쇠고기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되면서 설 명절 특수는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횡성축협이 운영하는 한우 판매점은 지난해 비축한 물량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정부가 12일 백신 접종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했지만 백신 접종에 대한 논란도 또 다른 갈등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1일 (사)전국한우협회 보은군지부와 이 지역 브랜드한우인 '조랑우랑' 작목반은 충북 보은축협에 모여 백신접종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그동안 쌓은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구제역 차단에 나섰는데, 발생지와 동일하게 백신을 접종하면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키워 그동안의 노력을 공염불로 만들 것"이라며 "백신 접종에 따른 효과보다 손실이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또한 "백신을 접종하면 청정지역 지위를 잃게 되고 출하지연 등으로 농민들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며 "축산농가 피해방지 대책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백신접종을 거부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구제역 예방접종이 지지부진하자 충북도는 접종을 거부하는 농가에 과태료 처분을 하는 등 제재를 가하기로 해서 향후 농민들과의 갈등이 깊어질 전망이다.

농민들이 이처럼 불안에 떨며 생활하는 가운데 지역 사회에서도 크고 작은 불편과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은 구제역 확산방지를 위해 농어촌도로 8개소를 폐쇄한 데 이어 시내버스도 단축운행하고 있다. 한우 사육농가 근처에는 구제역 발생 여부와 상관없이 시내버스가 서지 않는다.

또한 구제역으로 인해 집배원들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우편배달이 지연되면 분실 우려가 있고 각종 고지서는 연체 발생 위험이 있어 조심하고 있지만 배달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가 취소됐는가 하면 전남 해남에서는 농협조합장 선거도 연기됐다. 구제역으로 인해 지방에서는 시계가 잠시 멈춰 있는 양상이다.

조류인플루엔자(AI) 역시 전남 지역을 휩쓸었고, 충청·경기 지역까지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는 등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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