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부 맞지만 총파업 구호만으로는 안 된다"

[인터뷰]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下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은 2000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노동교육원에서 발행하는 <노동교육>에 ‘세계노동운동사’를 연재했다. 얼마 전 완간된 <세계노동운동사>와 관련된 최초의 원고다. 2007년부터는 세계노동운동사를 같이 공부하고 정리하자는 마음으로 활동가들과 공부 모임을 꾸렸다.

때로 사람이 오고 때로 사람이 떠났다. 60명 이상이 세계노동운동사 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한 회 한 같이 공부하고 토론한 결과물이 14년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갔다. 집단지성적 성격의 작업이었던 셈이었다. 국가 수로 40여 개, 시간으로 120여 년의 노동운동을 다룬 6권의 책 <세계노동운동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2013년 19세기부터 1945년까지의 세계노동운동사를 다룬 1~3권이 먼저 나왔다. 지난 2월 전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를 다룬 4~6권이 나오며 <세계노동운동사>는 완간됐다. 책 분량만 원고지 1만 6200매다.

김 이사장은 원래 함께 한 공부의 결과물을 또 한 번 사람들과 나눌 생각이었다. 3월 12일 출판기념회를 열어 참석자 모두에게 무료로 책을 나누어주려 했다. 그만큼 세계노동운동사에 대한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기를 바랐다. 아쉽게도 이 출판기념회는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무산됐다.

기념비적인 저술 작업을 끝냈지만 김 이사장은 <세계노동운동사>의 저자로만 설명되는 사람은 아니다. 그 자신이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계에 투신한 한국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간단한 이력을 보자. 1960년 4월 혁명 후 민주민족청년동맹 간부로 일했고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두 차례 투옥했다. 1972년부터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했고, 1976년 이후로는 한국노총 연구위원 및 정책연구실장을 지냈다. 그러던 중 전두환 정부가 노동계 ‘불순세력’을 척결한다며 취한 노동계 정화조치로 1985년 한국노총에서 쫓겨났다.

한국노총에서 쫓겨난 뒤에도 김 이사장은 노동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6년 홍은동 단칸방에서 노동교육협회를 만들어 1995년까지 87년 이후 언론노조 등 노조 조직화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많은 신규 노조가 노동교육협회의 교육을 받았다. 1995년에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한노사연)를 창립했고, 이후 민주노총 지도위원, 민주노동당 고문을 역임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어쩌면 <세계노동운동사> 저술도 이 같은 실천적 삶의 일환이었다.

<프레시안>이 지난 5일 한노사연에서 김 이사장을 만나 <세계노동운동사> 완간 이후의 활동 계획과 한국 노동운동 전반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한국 노동운동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어떤 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여든한 살 노(老)운동가의 눈은 기본에 가 있었다. 노동조합총연맹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사회에 대한 큰 그림, 전략 목표와 이를 실현할 조직노선, 투쟁노선이 정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 조직을 이야기할 때는 공부 모임과 일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노동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지식인, 전문가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때로 거칠게 나오기도 하는 말의 행간에서는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과 잘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읽혔다.

김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둘로 나눠 싣는다. 둘째 편에는 노동운동이 총파업 구호만 내세워서는 안 되고 실현 가능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조언, 플랫폼 노동자부터 산업재해까지 최근의 노동운동에 대한 생각, 현장 조직 차원의 공부 모임이나 일상 활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보수 정부 맞지만 총파업 구호만으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세월호 집회 때로 기억하는데 천영세 전 의원이 진보 진영의 가두집회를 이끄는 건 민주노총이라고 했었다. 노동운동 진영이 진보정권이라고 생각하고 밀어줘 왔는데 3년 지나니 전혀 아니다. 그게 드러난 거 아닌가. 이쯤 되면 노동운동세력도 독자적인 성장 전략, 강화 전략을 생각할 때가 된 거 아닌가.

김금수 : 선진 자본주의 국가처럼 정당을 통해서 집권까지 가는 길도 있지만. 집권까지 못가더라도 정당을 통해 개혁 과제를 관철하는데 그게 막혀 있다. 정당이 안 되면 정책과 제도 개선을 어떻게 할 것이냐. 임금, 근로조건은 단체교섭으로 한다 하더라도. 가면 갈수록 정책과 제도가 더 중요해진다. 그걸 개혁할 수 있는 통로를 아까 말한 투쟁 노선에서는 내놔야 한다.

경사노위 못 들어가면 노정교섭 하자는 거다. 공무원 외에는 노정교섭 하는 나라도 없거니와 정부가 할 리가 없다. 법제화된 통로가 아니다. 특정 주제에 대해 간담회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상시적 기구는 아니다.

유일하게 제시되어 있는 게 경사노위인데. 이러이런 식으로 바꿔라. 제안을 해서 바꿔놨다. 거의 다 수용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못 들어간다. 내부 사정 때문에. 대의원대회 붙여보니 안 된다. 대의원대회 할 때 정파끼리 갈등 때문에 올려봐야 안 되는 거다.

프레시안 : 정파에서 반대하는 논리는 뭔가.

김금수 : 각각 다르다. 주로는 이 판국에 총파업이나 투쟁으로 가야지 들러리 서서 그게 가능하겠냐.

프레시안 : 말씀대로라면 경사노위 참여 안 하고 새로운 투쟁노선 제시 못 하고 그러면 고립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김금수 : 그렇다. 총 노선이 있어야 하고 투쟁노선이 있어야 하고. 제일 중요한 게 정부와의 관계다. 이게 없다. 이게 없으니 '총파업으로 돌파한다.' 총파업은 쉬운 게 아니다.

총파업이라는 게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상 몇 개 없다. (해방 전인 1929년) 원산 지역 중심 총파업. 그다음 부산 부두 노동조합 중심 소규모 총파업. 해방 이후에 9월 총파업, 단정에 반대하며 2·7 총파업. 그런 정도고 87년은 파업이기보다 노동항쟁에 가깝다. 교섭을 하다 결렬이 돼고 노동조합이 주체가 돼서 이건 아니니까. 그리고 크게 지목할 수 있는 게 96년, 97년에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맞선 총파업. 그건 총파업이다. 양대노총이 공조도 했다. 그런 정도다. 그 뒤는 명실상부한 총파업은 없었다.

프레시안 : 일종의 상투적 총파업이고 내실 없는 총파업 만능주의 비슷한 경향이 보이는 것 같다.

김금수 : 총파업이라는 형식을 갖추려면 한 지역에 있는 조직 노동자가 중심이 돼서 가거나. 아니면 산업별로 금속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서 금속 노동자 전체 조합원이 100%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참여한다거나. 그게 쉬운 게 아니다.

산업별 교섭 추진되면 그래서 결렬되면 총파업으로 갈 수가 있다. 우리의 임금 근로조건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그리고 산별의 통제력과 집중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처럼 느슨한 형태의 산업별 노조 체제에서 교섭을 사용자 단체와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총파업이 뿔뿔이 다 흩어진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하청과 원청 사이의 차이도 있고.

한 몇 년 정말 이슈가 어떤 건지 보고 빈부격차. 비정규직 문제 여러 가지 다 나열할 게 아니라 핵심적인 한 가지 갖고 한 1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 선전도 하고 소규모 투쟁도 합쳐야 한다. 소규모 투쟁이 이어지지 않으면 총파업, 큰 투쟁을 할 수가 없다.

사전 준비도 많이 해야 하고 자금도 있어야 하고 선전 활동도 있어야 하고 조합원뿐 아니라 국민들 생각 지지도 얻어야 된다.

프레시안 : 다른 한편으로는 문재인 정부 자체가 친노동 정책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민주노총이 경사노위 들어가면 현실적으로 바꿔낼 여지가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김금수 : 내가 있을 때 보면 경제부처 입김이 굉장히 세다. 국무총리 공관에서 조찬 갖고 노동정책 회의해 보면 청와대 쪽은 발언권이 없으니 참관만 하는 거고. 노동 쪽은 노동부 장관 한 사람이다.

나머지는 경제부처인데 특히 경제부처 수장은 거의 관료 출신이다. 잽이 안 된다. 경제는 언제든 어려우니 핑계를 대면 그만이다. 그런 형편이니까. 대화의 통로가 공식화되고 강제성이 있고, 홍보 선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이런 전제 없이는 어려울 거다.

프레시안 : 저는 지금 노동운동 상황이 갑갑하고 노동운동세력이 적극적이고 건설적으로 못 나가는 측면도 있지만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말하자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가 최소한 노동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공정한 룰만 만들어도 달라질 것 같다. 예를 들면 노동자 지위 문제를 굉장히 좁게 해석한다든가. 법원은 민사소송에 있을 손배가압류를 노동에 적용한다든가. 우리 사회 결정권 가진 사람들이 노동운동 세력에 굉장히 불리한 적대적 스탠스 취하는 것도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김금수 : 그것도 노동운동이 사회적인 권위를 가지면 상당히 해소될 거다. 조직적 힘도 권위지만 대 사회, 대 정부, 대 국민에 대한 구체적 전략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촛불항쟁 때만 하더라도 사람도 대고 돈도 대고 회의장소도 제공하고 하면서도 단상에 오르는 건 꺼린다. 경원시 된다.

왜 그렇게 됐나. 시민사회단체보다도 권위가 더 떨어졌다. 그 이유는 조직적인 힘도 100만이 넘어서 합치면 200만이 되는데 적은 수가 아니다. 조직률 자체는 12%밖에 안 되지만, 그 힘을 가지고 정치세력화 혹은 정책과 제도 개선에 대한 거 명확한 방침을 갖고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조합원 홍보 선전뿐만 아니라 대국민 선전도 큰 활동의 하나다. 그런 게 취약하다.

프레시안 : 실제로 할 일은 다 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국민에게 설득하는 데 취약하다.

김금수 : 그러니 인상이 맨날 뻥 총파업만 하는 걸로. 부정적인 측면만 자꾸 부각된다.

저쪽은 아주 튼튼한 경제부처가 있고 경제인들도 있고 경제를 꾸려가야 한다고 (경제인들이 하는) 홍보도 다 통한다. 거기 대응하자면 역량이 상당히 커야 한다. 역량이라는 게 꼭 투쟁역량뿐 아니라 조직 역량, 대국민 선전 역량 다 중요하다. 맨날 싸움꾼으로만 보이면 안 된다.

▲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플랫폼부터 김용균까지, 최근의 노동운동

프레시안 : 한노사연이 작년 12월에 플랫폼 노동자 등을 다룬 <노조 조직화 사례 연구>를 발간했다. 플랫폼 노동자 조직이 유의미할 정도로 커지고 있나.

김금수 : 활발한 편이다. 새로운 분야가 개발됐다는 것도 있고. 또 하나는 학교비정규직 같은 경우는 수가 몇만이다. 호응도 좋고. 잘 조직적으로 훈련하고 관리하느냐 이 문제인데.

프레시안 : 아까 말씀에 따르면 기존 노조 조직보다는 자발적인 게 강한가.

김금수 : 들어왔으니 훈련도 하고 일상 활동도 하고 지도력 발휘해야 하는데 어떻게 되느냐가 관심거리다.

앞으로 어떻게 보면 언론에서 그래서가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운동. 배척할 건 아니지만 굉장히 여유가 있다. 대신 중소기업이나 플랫폼 노동자는 굉장히 열악하다. 일정 시기까지는 이렇게 가다가 어느 시기부터는 (중소기업이나 플랫폼 분야의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재끼고 나올 수도 있고.

다만 조직화되고 난 뒤에 일상 활동, 교육 활동, 조직 이런 게 문제다. 산발적 투쟁은 사회적으로나 개별 노동운동으로 봐도 별로 바람직한 건 아니다.

프레시안 : 대기업 노조는 노동귀족이라는 비난도 받고. 대기업 노조에서 비정규직 노조와의 연대. 되고 있나.

김금수 : 굉장히 취약하다. 오히려 하청 파견 용역 이쪽의 대우를 올려주면 자기들 것, 기득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노동자 스스로가 차별로 가니까.

프레시안 :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하면서 노동의 종말 소리가 나오는데 플랫폼 노동자 사례가 있다고 해도 앞으로는 노동자 조직화가 더 어려워지는 거 아닌가.

김금수 : 브라질 갔을 때 금융노조에 갔었다. 비교적 크고 거기 가봤더니 사무 자동화되면서 노동형태가 어떻게 바뀌었고 고용형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 10년 치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게 없다. 그런 게 있어야 대처할 방법이 나올 텐데.

프레시안 : 작년 이후 김용균 사망 포함해서 산업재해 문제가 시민사회에서 굉장히 많이 이야기되고 있고 사회문제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정부에서는 그렇게 크게 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문제를 기존 노총이 하나의 이슈를 잡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김금수 : 물론이다. 옛날부터 특히 금속 같은데 제조업 쪽에 노동조합이 연대 모임 가지면 조사부장, 교육부장 하는 식으로 분야별로 또 소모임 갖는다. 제일 결속력 있는 데가 산안부장(산업안전부장)들이다. 정보교류도 하고.

프레시안 : 그분들은 그걸 굉장히 절실한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나 보다.

김금수 : 과거에는 산업안전 보건에 관한 연구소는 별로 없었는데 요즘에는 생겨났다.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거나 독자적으로 역량을 키워나가거나 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주로 하청 노동자다 보니 (정규직이) 자기 문제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건보다 더 중요한 게 생명인데.

▲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어떤 형태로든 공부 모임이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 : 세미나 계속하신다 그랬다. 거기서 이른바 모범답안 나올 수 있는 건 아닌데 아까 말씀하신 전략 목표 같은 부분에 대해 일종의 제안이랄까 그런 걸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김금수 : 연구소 같은 데서 해야 하는데 학습서클에서 하고 싶어 하는 건 지금 참여하는 사람이 기수를 떠나서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한 11명 되는데, 숫자가 좀 부족한 거 같다. 최소한 열댓 명은 돼야 이야기도 나오고 의견도 분분하고 이럴 것 같다.

기존에는 책으로 발제하면 됐는데 (지금 하는 건) 참고서적을 주고 이걸 가지고 만들어라. 영국의 노동조합은 처음에 어떻게 돼서 지금은 어떤지 특징은 뭔지 우리가 뭘 배워야 하는지를 정리해봐라는 거다. 그렇게까지 하려면 꽤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런 공부를 한 번 해보자는 거다. 노조에 제안 목적은 아니다.

프레시안 : 심화 공부모임을 계속 꾸려가겠다는 이야기다.

김금수 : 어떤 형태로든 공부 모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세계노동운동사 아니라도 좋다. 인신매매 여성이었다가 탈출한 수기 같은 것도 읽어보면 참 사실적이다. 본인이 경험한 이 사회 한 단면이다. 예를 들면 그런 거를 내놓고 같이 이야기를 하면 주변 문제, 운동의 문제 논의가 될 거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걸 해보자. 그걸 안 한다. 민주노총하고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하고 작년 상반기 하반기에 9차례 걸친 전후 운동사를 했다. 우리나라 빼고 한 대륙에 네 나라씩 16개 나라 했다. 학습해가지고 오라고 하면 안 올 것 같으니 아예 PPT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9개월에 걸쳐서 했는데 그런 거라도 해야 한다.

뭔가 모여서 공부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모임이 있어야 된다. 옛날에 70년대 원풍모방 같은 데는 10인 별로 조를 만들어서 일주일 동안 내가 반장에게 당한 부당한 대우에는 어떤 게 있었나. 또 근로기준법 공부한다든지 했다. 일상 활동을 하니까 민주노조로서 기초조직이 튼튼했다.

(지금은) 간부들도 그런 기회가 전연 없다. 이왕 공부할 거 같으면 세계노동운동사가 제일 낫다. 사건별로 이어지기도 하거니와 생각하게 하니까. 아니면 소설이라도 좋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해보면 객관적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의견하고 다른 사람 의견 뭐가 차이 있는지 비교도 해볼 수 있고 그래서 창의적인 게 나온다. 그런데 참 공부를 안 한다.

프레시안 : 흔히들 일상활동이라는 것도 하고 노조 혹은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한 자기주도적인 학습이나 토론이 별로 없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지적인 것 같다.

김금수 : 동부 지역 비정규노동센터가 중심이 돼서 2년 반 정도 학습모임을 꾸린 적이 있다. 주로 현장 활동가들이었다. 금속노조 동부지역지회 뭐 이런. 학교비정규직도 있고. 밤에 분류하는 작업하는 비정규직도 있고, 학교 선생도 왔고 2년 반 동안 정도를 했다. 나는 볼 때 굉장히 기특했다. 질문도 굉장히 생생했다.

그건 교육을 조직하고 집행하는 사람의 열성이 있어야 된다. 연락도 하고 발제도 다른 사람 시켰는데 혹시나 싶어서 자기가 해온다. (조직하고 집행하는 사람이) 사람 관리를 잘하니까 유지가 되더라. 그 사람들도 안 바쁜 게 아니다.

프레시안 : 교수님이 와서 가르친다고 학습이 되는 게 아니라 현장 조합원 토론으로 현실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김금수 : 제일 생생한 거다. 원풍모방 때 노총에 있으면서 (평소) 일요일 되면 갔다 오고 그랬다. 노동계 정화조치되고 난 뒤에 (경찰에) 장구도 압수되고 그랬는데 (경찰 조사 과정에서) 내 이름이 안 나왔다. 그만큼 결속력이 단단했다. 그런 일상활동과 투쟁을 거치면서 이른바 의식화가 되는 거다.

여하튼 뭐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데 못 찾고 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거나 87년 투쟁처럼 동기가 있거나 민중항쟁이 있거나 아니면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서 치고 나가거나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조건의 문제라기보다 의지가 있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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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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