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간에 걸쳐 이뤄진 김정은 위원장의 '보고'는 자력갱생 의지와 강력한 대미 경고를 두 축으로 하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담겼다. 미국에 크게 실망했고 기대할 것도 거의 없어졌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을 호소한 셈이다.
우선 김 위원장은 "일방적으로 매여있을 근거가 없어졌다"며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중단 유예를 재고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명시적으로 쓰지 않고 "새로운 전략 무기"라는 표현을 썼다. 'ICBM이 아니냐'는 해석을 유도해 미국을 압박하면서도 명시적인 표현은 자제함으로써 판을 깨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이는 트럼프의 빈말에 분노를 표하면서도 북한의 ICBM 중단을 최대 업적으로 내세워온 트럼프의 체면도 배려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 비핵화의 종말을 경고하면서도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아울러 "우리의 억제력 강화의 폭과 심도는 미국의 금후 대조선 입장에 따라 상향 조정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는 미국에 공을 넘기겠다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종말을 고하고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을 감수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태도를 달리해 한반도 비핵화를 다시 추구할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보고 서두에 강조한 것은 '미국과의 장기 대결의 불가피성'이었다. 그런데 막바지에는 "미국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조미 관계의 결산을 주저하면 할수록" 미국이 곤란한 처지에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은 장기전에 대비하고 또한 이를 경고하면서도 조속한 문제 해결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정은의 발언에 대해 트럼프는 "우리는 비핵화에 대한 계약서에 사인했다"며, "나는 그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럼프도 신뢰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김정은이 '금지선'을 넘지 않도록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의 끈을 놓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셈이다.
하지만 '대화를 위한 대화'는 끝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미국의 대화 제의 의도가 시간을 끌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잇속을 챙기는 데에 있다고 보고, 미국의 확실한 태도 변화가 없는 대화에는 흥미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냉정하게 보면, 약속을 안 지킨 쪽은 미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단하겠다던 한미 군사훈련도 실시했고, 하겠다던 종전선언도 차일피일 미뤘으며, 북한의 긍정적 조치에 따라 완화하겠다던 대북 제재는 오히려 강화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신뢰구축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만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친 셈이다.
지난해 악화일로를 걸어온 한반도 정세에서 반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필수적이다. 그 중심에는 미국의 대북 제재 중독 치유가 있다. 제재를 앞세운 "최대의 압박"이 어떤 역효과를 내는 지는 거듭 분명해졌다. 사정이 이렇다면 미국이야말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북한의 긍정적 조치에 부응하는 제재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최대의 공감'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거의 닫힌 비핵화의 문을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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