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비키니 안 입어서'? 게임업계 또다시 '페미니즘 검증' 논란

게임사 '프로젝트문', 입사 전 불법촬영 규탄 SNS 빌미 여성노동자 해고

모바일게임 개발에 참여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입사 전 불법촬영 규탄시위를 지지했다는 등의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여성·노동계는 "페미니즘 사상검증으로 인해 여성 창작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일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며 반발했다.

모바일게임 <림버스 컴퍼니>의 제작사 '프로젝트문'은 지난 25일 김지훈 총괄디렉터(대표) 명의의 공지를 통해 "논란이 된 직원분과 계약은 종료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게임 <림버스 컴퍼니>의 남성이용자들 사이에선 '게임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스트인 것 같다'는 식의 노동자 사상검증 기류가 일었다.

게임 내 여름이벤트용으로 제작된 삽화에 여성캐릭터가 등장했는데, 해당 캐릭터가 '비키니 등 노출이 있는 옷이 아닌 전신수영복을 입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담당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스트 여성인 것'이라는 말이 일부 남성이용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었다.

▲게임사 프로젝트문의 게임 <림버스 컴퍼니> 속 여성캐릭터의 모습. 일부 남성이용자들은 해당 캐릭터가 '노출이 적다'는 이유로 게임사 직원들에 대한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진행했다. ⓒ림버스컴퍼니 사이트 캡처

해당 삽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가 남성이라는 점이 밝혀지자, 이용자들은 게임제작에 참여한 여성 직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해당 직원은 입사 전 개인 SNS에서 불법촬영 규탄시위를 지지하거나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글 등을 올렸는데, 이용자들은 이 같은 행위가 '남성혐오'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용자들은 게임 리뷰 점수에 1점을 주는 방식의 별점테러를 진행했고, 일부 이용자들은 25일 당일 프로젝트문 본사를 직접 찾아가 대표면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 대표의 해고 공지는 남성이용자들의 이 같은 공격이 이어진 지 반나절 만인 25일 밤에 이뤄졌다.

김 대표는 공지에서 "SNS 계정이 회사와 연관될 가능성을 없애달라고 전체 공지 등을 수차례 했다"라며 이번 해고의 이유를 "재차 주의를 드렸던 사내 규칙에 대해 위반이 발생한 건"이라고 설명했다.

게임업계 내 '페미니즘 사상검증'과 그로인한 여성노동자의 해고는 2016년 불거진 '김자연 성우 사태'부터 지난 7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당시엔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의 성우 김자연 씨가 페미니즘 후원 티셔츠를 인증하면서 남성이용자들의 공격 대상이 됐는데, 넥슨 측은 이 일을 김 씨를 성우직에서 하차시켰다. 이후 <트리 오브 세이비어>, <소녀전선>, <마녀의 샘> 등 다수의 게임에서 여성 창작자들에 대한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일어났다. 남성이용자들은 여성 창작자의 개인 SNS를 찾아내 그가 페미니즘 관련 단체를 팔로우하거나 페미니즘 관련 글을 올렸는지 등을 확인했고, 그에 상응할 시 사이버불링을 가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의 2020년 발표에 따르면 2016년 '김자연 사태' 이후 최소 14명의 여성 노동자가 페미니즘 사상검증에 휘말려 회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이 같은 사상검증 피해가 이어지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20년 "사상 및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한 여성 작가 배제 관행은 여성혐오이자 차별"이라는 취지의 결정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노동·여성계는 '게임업계에서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이유로 한 부당해고가 반복되고 있다'며 반발했다.

전국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는 28일 성명을 내고 "인권위 결정이 내려진 후에도 게임업계는 자정할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페미니즘 사상검증으로 인해 여성 창작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일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라며 "이제는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조차 법적으로 정해진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늦은 밤 전화 한통으로 해고당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인권위 발표 당시의 경우,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 형태의 계약직 노동자였다. 그러나 25일 프로젝트문에서 해고통보를 받은 직원 A 씨는 언론 등을 통해 자신이 "수습기간 3개월을 거친 정규직"임에도 별도의 과정 없이 밤 11시께 전화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일부 이용자들의 반발만으론 근로기준법상의 해고 요건인 "정당한 이유"(제23조 1항)를 충족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여성노조는 "(인권위의) 한 줌 수확이 무색하게도 이번 사태에서 회사는 한발 더 퇴보하여, '근로자'를 보호하도록 정해진 법조항마저 무시하고 피해 여성 창작자를 배제하였다"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민우회 또한 27일 "사업장은 부당한 외압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책무가 있음에도 프로젝트문은 일부 유저의 부당한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라며 "업계 내 여성혐오를 부추기며 차별을 용인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경기청년유니온은 지난 25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한 사상 검증과 이를 뒤따르는 밥줄 끊기 협박은 명백한 불법"이라며 "노동자의 징계와 처벌, 해고 등은 사칙이 고용노동청에 신고한 취업규칙에 따라야 하며, 취업규칙은 헌법과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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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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