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의 승리 앞에 닥친 더 큰 난관…'유사 파시스트'의 준동

[장석준 칼럼] 브라질에서 다시 희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30일에 실시된 브라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노동자당(PT)의 루이즈 이냐시우 '룰라' 다 시우바 후보가 극우파인 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누르고 마침내 당선됐다. 2002~2010년에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한 룰라가 이로써 12년만에 3기 룰라 정부를 출범시키게 됐고, 노동자당으로 따지면 2016년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이후 6년만에 다시 여당이 됐다.

브라질인들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이 선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미의 도널드 트럼프와 쌍벽을 이루며 남미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기둥 노릇을 해온 보우소나루가 21세기 민주주의에 끼치는 해악이 크기도 했거니와 그의 재임 기간에 엄청난 속도로 자행된 아마존 열대 우림 파괴가 가뜩이나 심각해지는 기후 재앙을 더욱 파국에 가깝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31일 새벽, 브라질에서 들려온 소식에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위기다.

그러나 당선자가 보우소나루가 아니라는 점은 다행스럽더라도, 전반적으로는 썩 반가운 결과가 아니었다. 보우소나루는 49.1%를 득표해 룰라(50.9%)를 불과 1.8% 포인트 차이로 바짝 뒤쫓았다. 부유층과 중산층이 밀집한 남부 주들에서는 보우소나루가 예외 없이 룰라를 눌렀다. 게다가 보우소나루가 속한 극우 자유당(PL)은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실시된 하원의원 총선거에서 의석을 66석이나 늘렸다. 보우소나루를 힘겹게 물리친 룰라 당선자는 사실상 보우소나루 세력이 지배하는 상·하원과 대결하며 앞으로 4년간 국정을 끌고 가야 할 처지다.

환호하거나 낙관할 때가 아닌 것이다. 전 세계 좌파 정치가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정치 9단'으로 인정받는 룰라조차 준파시스트 세력과 1 대 1로 맞서 겨우 승리를 따내는 나라가 지금 브라질이다. 이 상황을 뿌리부터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3기 룰라 정부의 앞날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보우소나루주의를 낳은 주류 우파와 지배 세력의 패착

보우소나루주의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우리와 비슷하게 1980년대까지 지속된 군부독재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보우소나루 자신이 군부독재 시절에 정치 장교로 악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1991년에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될 때에 그가 속한 정당은 기독교민주당이었는데, 벌써 이때부터 브라질에서는 개신교 신흥 종파들을 대중적 기반으로 삼은 극우 정치가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런 흐름은 어디까지나 '주변'적 세력이었다. 브라질 정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보우소나루주의라 불릴 수 있을 극우파 바람은 불과 몇 년 전인 2010년대 초에 들어서야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계기를 연 것은 작은 극우 정당들이 아니라 주류 우파 정당들이었다.

2000년대에 1기, 2기 룰라 정부는 계급 타협 입장을 철저히 견지했다. 경제 정책으로 따지면, 1기에는 신자유주의 기조에 순종하다가 2기에 들어 국가 개입을 조금씩 늘리기는 했다. 또한 빈곤 가정에 일종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보우사 파밀리아' 정책을 통해 절대 빈곤을 크게 줄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을 추진하면서도 자본 세력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세금도 더 걷지 않았고, 천정부지이던 이자율에조차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다.

정당정치 측면에서는 이 기조가 주류 우파와의 대타협으로 나타났다. 룰라는 집권 1기에 뇌물 제공이라는 다분히 부정한 수단을 통해 여러 원내 소수 정당들의 정부 법안 찬성 표결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원내 최대 정당인 '브라질 민주운동'당(MDB, 이하 민주운동당)을 국정 운영 동반자로 끌어들였다. 민주운동당은 군부독재 시절에 민주화 진영의 대표 역할을 하다 이제는 부패하고 노회한 정치인들의 본산처럼 여겨지는 정당이다. 우리의 경우에 대입해보면, 상도동계나 동교동계 인사들이 여전히 국회 다수 의석을 점한 격이라고나 할까.

노동자당 정부와 민주운동당의 협력 관계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됐다. 민주운동당에서 떨어져 나와 한때는 좌파 쪽에서 노동자당과 경쟁하다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로 돌아선 브라질 사회민주주의당(PSDB, 이하 사회민주당)이 노동자당과 대립하는 제1야당 역할을 한 데 반해 민주운동당은 대표 정객 미셰우 테메르가 두 차례나 호세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을 역임하기까지 하며 노동자당과 충실히 합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브라질의 자본 세력도, 그 정치적 대변자들도 노동자당 정부의 타협 정책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교리를 철저히 추종하는데다 실제로 자국민보다는 월스트리트와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공유하는 브라질 자본가계급은 2기 룰라 정부에서 국가 주도 발전 정책이 늘어나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다 호세프 정부에서 이 기조가 더욱 강화되자 노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배은망덕한 집단은 룰라 집권기에 바이오에너지 생산을 통해 급성장한 농업 자본이었다. 이들은 아마존 보호 정책에 반기를 들며 반노동자당의 선봉에 섰다.

호세프 정부의 공공요금 인상 조치에 반발해 일어난 2013년의 시위운동은 자본 진영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사실 이 운동 자체는 2019년에 대중교통요금 인상에 반대하며 폭발한 칠레의 가두시위와 아주 유사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칠레의 시위는 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으로 발전한 반면에 그보다 6년 먼저 벌어진 브라질의 시위는 반노동자당 우파가 결집하고 대중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급진좌파 대학생들이 주도하던 시위는 어느새 노란색 브라질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거리에 나선 극우 정파, 개신교 복음주의 세력, 대도시 중산층 일색이 되어갔다. 바로 이 대열이 보우소나루주의를 탄생시킨 온상이었다.

처음에는 노동자당의 오랜 숙적 사회민주당이 노란색 유니폼 시위대의 대변자 노릇을 했다. 또한 자본 진영에 속한 주류 언론들이 갑자기 가두 저항의 옹호자로 돌변했다. 그러나 아직은 민주운동당과 동맹을 맺은 노동자당 정부를 고꾸라뜨리기에 역부족이었다. 다시 한 번 테메르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 호세프 대통령 후보는 2014년 대선 결선에서 이번에 룰라가 받은 것보다 더 높은 득표율(51.64%)을 기록하며 사회민주당 후보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 패배가 자본 세력에게 다음 단계 전략으로 넘어가라는 신호탄이 되었다. 집권 2기를 시작한 호세프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더욱 강력한 개입 정책을 펼치려 한데다, 더 결정적으로는 룰라 이후의 무거운 짐, 즉 부패 정치의 사슬을 스스로 끊으려 하자 드디어 '의회 쿠데타' 시나리오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2016년에 결국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켜 노동자당 14년 집권을 강제로 중단시키게 될 부패수사-대통령 탄핵 정국이 열린 것이다.

사실 부패수사에 착수하기로 결단한 장본인은 호세프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이 결단에 화들짝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민주운동당이었다. 가장 많은 정치인들이 일상적으로 비리에 연루된 정당이 민주운동당이었기 때문이다. 부패수사가 진행되면서 언론이 가장 떠들썩하게 보도한 것은 룰라 전 대통령과 호세프 현 대통령이 과연 뇌물 수수와 직접 연루됐는지 여부였지만, 실제로 이 수사로 목이 조이는 공포를 느낀 이들은 테메르를 비롯한 민주운동당 수뇌부였다.

결국 이들의 모진 결심과 함께 자본 세력 총연합의 테두리가 완성됐다. 부통령 소속당이자 원내 제2당이 현직 대통령 탄핵 입장으로 돌아서자 탄핵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막상 탄핵안의 중심 내용은 애초 탄핵 이유였던 부패 혐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예산안 관련 법률 위반이었지만, 이미 이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본 세력에게 실질적인 위협이라고는 하나도 가하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만으로 눈엣가시인 노동자당 정부의 장기 집권을 끝내는 일만이 중요했을 따름이다.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킨 뒤에 만사는 자본 진영과 주류 우파의 뜻대로 굴러가는 듯 보였다. 테메르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었고, 시장지상주의와 전통 수호(달리 말하면, 여성, 성소수자, 아마존 선주민 등의 권리 확대 결사 반대)로 똘똘 뭉친 중년 남성들로만 이뤄진 내각이 출범했다. 이제는 다음 대선에서 민주운동당, 사회민주당이 하나가 된 주류 우파 블록이 노동자당을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더는 좌파 집권 가능성을 우려할 필요가 없는 정치 질서가 뿌리를 내릴 터였다.

그러나 승자는 전혀 다른 이들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사망을 피하려고 '의회 쿠데타'를 획책한데다 테메르 정부에서 무능과 독선만을 보여준 주류 우파, 즉 민주운동당과 사회민주당은 지지율이 땅에 떨어졌다. 대신 2013년 거리의 노란색 물결을 통해 그 불길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진 세력이 곧바로 빈자리를 채웠다. 그들이 바로 보우소나루가 이끄는 현 자유당이다.

이것이 보우소나루주의의 탄생 신화다. 지난 4년간 브라질 국민을 팬데믹의 최대 희생자로 만들고 아마존 밀림을 불지옥으로 만든 이 괴물은 다름 아니라 브라질 자본가계급과 주류 우파의 예기치 않은 자식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단치도 않은 계급 타협 제안조차 뿌리친 속 좁은 지배계급이 낳은 이 괴물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선거를 하루 앞둔 1일(현지시간) 상파울루 아우구스타 거리에서 지지자 환호에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부 문제'와 대결했던 그 경험으로 대혼란의 시대에 맞서길

룰라 당선자가 마주할 정치 지형은 2000년대의 집권 1기, 2기보다 훨씬 더 안 좋다. 단순히 의석수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주요 야당의 성격부터가 통상적인 우파가 아니라 유사 파시스트로 바뀌었다. 더구나 이번 대선 결과로 드러났듯이,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대도시 중산층은 여전히 노동자당과 좌파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3기 룰라 정부를 막기 위해 보우소나루에게 표를 던지길 꺼려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정치·사회 지형만 놓고 보면, 3기 룰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1기 룰라 정부 때부터 부패 추문을 일으키고 결국은 2010년대에 비극을 폭발시킨 뇌물 수수 정치를 반복할 게 아니라면, 출구는 하나뿐인 듯 보인다. 노동자당이 집권 이후에 너무도 집착해온 수세적 계급 타협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어차피 기득권 세력이 그런 수준의 타협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이 사달이 났으니 이제는 룰라와 노동자당 스스로 이 금기를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이번에 룰라의 당선을 진심으로 바란 좌파 성향 논평가들이 하나같이 이 점을 강조한다. 제도정치 안에서 막강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룰라를 지지하는 노동운동, 땅 없는 농민들의 운동,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 아마존 열대 우림을 지키려는 선주민운동과 환경운동 등이 있다. 그리고 룰라 정부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할 준비가 돼 있는 북부 빈농과 남부 대도시 빈곤층이 있다. 룰라 정부가 이러한 대중에게 직접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좌파가 견지해야 할 기본적 해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만은 않다. 2000년대에 룰라가 처음 집권했을 때에 이런 식으로 정치적 교착 상태를 풀려 했다면, 훨씬 더 잘 먹혔을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를 거치면서 이미 중산층이 우파 대중운동에 동원된 상태다. 이런 형국에서는, 대중(운동)의 참여를 통한 정치적 돌파가 자칫 거리에서 양 진영의 직접 대결을 유발함으로써 더 큰 혼란만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선명한 선택지의 제시만으로는 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변혁 세력의 오류가 쌓인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복잡하고 고뇌어린 선택이 필요하다.

다만, 3기 룰라 정부 혹은 5기 노동자당 정부에 대해 그래도 기대를 접지는 못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껏 지난 노동자당 정부의 한계와 오류를 끄집어내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이룬 한 가지 위업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1기 룰라 정부 시절에 불과 4년의 집권만으로 노동자당과 브라질 좌파 전체의 주요 지지 기반을 바꿔버린 일이다.

그때까지 남부의 조직 노동자와 중산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노동자당은 1기 룰라 정부를 거쳐 2006년 대선을 치르며 북부 빈농과 도시 빈곤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와 함께 기존 남부 지지층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이런 지지층 이탈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북부에서 새 지지층이 쇄도했다. 이들은 브라질 자본주의의 최대 희생자였지만, 그 동안은 남부 중산층-조직노동 중심 좌파정치에서 멀찍이 떨어져 군부독재나 우파정당을 지지하곤 했다(이른바 '북부 문제'). 룰라는 집권기에 이들을 브라질 좌파의 새 구심으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했다.

룰라 정부가 그 숱한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열대의 블레어 정부'나 지구 반대쪽의 '노무현-문재인 정부'로 불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또한 이 대혼란의 시기에 3기 룰라 정부에 대해 기대와 관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룰라-노동자당 정부가 북부 문제와 정면 대결했던 그 경험을 잊지 않고 새롭게 펼쳐낸다면,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브라질에서 들려올 이야기들에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저 희망의 냄새를 다시 맡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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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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