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우간다와 경쟁 중

[삶은경제] 모피아 체제에서 금융 개혁 어림없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책에서 화폐가 '물질적 실체가 아닌 심리적 구조물'이라고 했다. 특히, 신뢰라는 심리는 우리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온갖 유형의 돈을 주조하는데 사용해 온 가장 중요한 원자재이며, 신뢰를 바탕으로 탄생한 화폐 금융 시스템은 인간이 고안한 시스템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 신뢰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기원전 3천년, 지금의 이라크 지역 수메르인들이 보리화폐(정해진 양의 보리를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재고 교환하는 척도로 사용했다고 한다)를 인류 최초의 돈으로 사용한 이래 오늘까지 화폐와 그 확장판인 금융(화폐의 기능을 시간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약속이라고 정의하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뢰’라는 공공재로 우리에게 공급되고 있다.

우간다와 경쟁하는 금융사고의 왕국

당연히 한 사회 금융 시스템 수준은 구성원이 부여하는 신뢰에 비례한다. 10년 전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을 도화선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가 터지자 곧바로 비트코인과 그 운용체계인 블록체인 시스템이 등장하는데, 비트코인은 양적완화(화폐가치하락)로 신뢰를 배신한 달러를, 블록체인은 금융 산업을 정조준하며 신뢰가 사라진 영토들을 흡수하고 있다.

이렇게 화폐와 금융이라는 제도가 신뢰라는 본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상식에 입각해 대한민국 금융 산업을 돌아보면, 말 그대로 절망적이다.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은 금융사고의 왕국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들이 이어져 수백만 명의 시민이 고통을 겪었다. 2007년 삼성 비자금 사태와 2008년 KIKO 사태를 시작으로 2010년 신한은행 내부비리, 2011년 저축은행 사태, 2013년 동양증권 CP 불완전 판매 사태, 2014년 카드정보 유출 대란, 2015년 엘시티 특혜 의혹, 2016년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과 한진해운 등 해운업 구조조정 관련 사고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연일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MB와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얽힌 20억 원 뇌물 의혹, 최순실의 금융조력자로 지목된 하나금융지주 김정태 회장 의혹 등은 여전히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이며, 아직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 금융계의 부패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또 다른 사건이 지난 1월 말 금감원 조사로 알려진 국내 주요은행들의 신입사원 채용비리다. 자식 면접에 버젓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한 은행임원이 있었나 하면, 대담하게 면접 점수를 조작한 사례가 넘쳤다. 국내 주요은행들의 기막힌 채용실태는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이런 충격적 실태를 조사하고 발표한 금융감독원 역시 정확히 1년 전, 자유한국당 정무위(금감원이 피감기관) 소속 국회의원 아들을 채용하기 위해 채용기준과 서류면접 점수를 조작한 채용비리의 당사자였다. 공공부터 민간까지 금융처럼 썩어도 골고루 썩은 곳이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 '모피아'의 핵심으로 꼽혔던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요직을 맡았다. ⓒ금융위원회

최종구 금융위원장 "시장이 알아서 할 일"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한민국 금융은 산업의 성숙도 지표에서 국제적으로 아프리카의 우간다나 가나, 아시아의 네팔, 라오스 같은 나라와 치열하게 순위 경쟁 중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경쟁력 보고서가 그 출처인데, 2016년까지 80위권을 유지하며 우간다, 가나에 뒤졌던 우리 금융 산업이 지난해는 드디어 70위권으로 순위가 올라 우간다를 앞질렀다는 결과가 나와 실소를 자아냈다.

결국 초점은 하나로 모아진다. 불과 20년 전 외환위기, IMF사태라는 금융의 대실패를 겪고도 여전히 그때만큼이나 구제불능인 대한민국 금융의 해법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해법은 대략 두 갈래로 나뉜다.

한 쪽을 대표하는 목소리는 이렇다. '금융 산업 종사자들이 전부 억대 연봉을 받고 남들보다 일찍 퇴근하지만 강성노조 때문에 개혁이 안 되니 이 나라 금융 산업이 우간다보다 후지다'는 주장이다. 지금은 영어의 몸이 된 최경환 전 부총리가 현직에서 실제로 한 말이고, 정권이 바뀐 지금도 매일같이 보수 경제지들이 독자에게 전하는 일관된 메시지다.

반면, 반대쪽에선 이렇게 얘기한다. '금융회사 지배구조개선이 핵심이다.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견제와 감시를 강화해서 금융 산업 전체의 공공성을 높이자'는 주장. 이 주장은 금융이 의료나 방송처럼 공공재임에도 금융자본과 금융당국의 타락과 전횡을 제어할 사람이 없음에 주목한다. 회장님의 거수기로 전락한 금융기관 사외이사(외환위기 이후 금융회사들의 사외이사 비율은 이사 총수의 과반을 넘도록 법률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하다)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이 당장 시급한 살길이라고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금융회사의 이사, 감사 등 임원을 추천하는 법적기구인 임원추천위원회에 금융회사의 노동자, 나아가서 금융소비자인 일반 국민이 참여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길을 정부가 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내용은 지난 19대 국회에서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제출하며 구체화됐지만, 개혁의 핵심인 금융 노동자의 임원추천위원회 참여가 제거된 채 시행됐다.

문재인 정부에게 금융개혁은 무엇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개혁적 기대를 받은 문재인 정부 첫 금융수장으로 발탁된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 1월 이 문제를 두고 "금융회사가 알아서 할 문제"라며 발을 뺐다. 지난해 모피아 출신인 최 금융위원장의 기용이 유력해지자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문 대통령에게 금융개혁 의지를 보이라며 쏟아낸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얼핏 최 위원장의 이 발언은 노동이사제 도입이 비록 새 정부 국정과제일지언정 민간 금융회사에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는 그럴듯한 현실론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상은 정부에 금융개혁 의지가 없음을 내비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나라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임원의 자격요건, 이사회의 구성·운영 등 금융기업의 지배구조 전반에 걸쳐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의 대주주가 되려고 해도 정부의 엄격한 적격성 심사를 거쳐야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것처럼 금융이 구성원의 신뢰로 만들어진 구조물, 즉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융회사 임원에 노동자 추천 임원이나 금융소비자 추천 임원을 포함토록 할 것이냐는 선택 역시 오롯이 민간에 맡겨진 것이 아니며, 우선 정부와 국회의 몫이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다시 해가 바뀌었지만, 현장 금융노동자 입에서는 '춘래불사춘'이란 말만 맴돌고 있다. 금융적폐청산, 금융개혁의 본질적인 의제는 정부 출범 초기부터 실종됐고, 철지난 유행가처럼 권력의 낙하산 논란만 현장을 들쑤시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사무금융노조는 시민의 삶, 그 자체가 경제라는 철학으로 팟캐스트 형식의 오디오 경제 콘텐츠를 제작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본 칼럼에서 다루는 내용은 사무금융노조의 팟캐스트 '삶은경제'에서 더 풍부한 내용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삶은경제는 네이버 오디오클립과 팟빵에서 모두 검색 가능합니다.

(☞팟캐스트 삶은경제 바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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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현

풀뿌리신문 기자로 출발했지만 정의당에서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PD라는 명함을 얻었다. 짧은 국회보좌관 활동을 거친 뒤, 지금은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에서 일한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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