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생존학생 오열 "우리가 무얼 잘못했나요?"

[현장] '박근혜 내려오고 세월호 올라오라' 11차 범국민행동...60만 촛불 타올라

"먼저 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우리는 너희를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할게, 우리가 너희를 만나는 날이 올 때, 우리를 잊지 말고, 열여섯 살, 그 시절 모습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세월호 참사 사건 당시 생존한 학생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눈시울을 붉힌 채 자기 발등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학생들을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이 힘껏 껴안았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희생 학생들의 부모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둔 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60만 개의 촛불이 켜졌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박근혜 내려오고 세월호 올라오라, 11차 범국민행동’이 열렸다.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 생존자 학생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나요?"

이날 집회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4.16연대 관계자, 세월호 농성장 봉사자 등이 무대에 올라 발언을 이어나갔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세월호 참사 때 살아 돌아온 일명 '생존 학생들'이었다. 그간 집회 등에서 발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들이다. 이날 무대에는 9명의 생존 학생들이 참석했다.

이들을 대표해서 참사 당시 단원고 2학년 1반이었던 장애진 양이 마이크를 잡았다. 장애진 양은 참사 당일, 친구들과 함께 갑판 위로 올라간 뒤 바다로 뛰어들어 생존했다. 바다에 표류하던 장애진 양을 근처 고기잡이 어선이 구조했다.

"이곳에 서서 시민분들에게 온전히 우리 입장을 말하기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그간 용기를 주고 챙겨준 많은 이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년이 흘렀기에, 또 나라에서 (진실을) 감추기에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참사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못 찾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 덕분에 다시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두 해경 등에게 구조된 게 아닙니다. 스스로 탈출했습니다.

공포에 떨었습니다. 친구가 있다고 직접 119에 구조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무시했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구해준다고 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친구들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아마 잘못한 게 있다면 세월호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겠지요. 우리의 삶이 유가족에게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울음)

(참사 이후) 유가족분들로부터 어떤 원망도 다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들은 어떠한 원망도 안 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걱정해주셨습니다. '니들이 뭘 잘못했느냐'고... 하지만 지금도 죄송합니다. 안부도 묻고 싶고 찾아뵙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를 보면 친구가 생각나지 않을까요? 우리도 이렇게 친구가 보고 싶은데, 부모님은 오죽 할까요."

▲ 세월호 생존학생들. ⓒ프레시안(최형락)

"친구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애진 양은 발언하는 도중 몇 차례나 오열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시민들도 얼굴을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애진 양은 눈물을 꾹 참으며 발언을 이어나갔다.

"3년... 그나마 무뎌지지 않을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친구 페북에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답장이 오지 않는 카톡을 보내고, 괜히 전화도 해봅니다. 어느 날은 너무 보고 싶어 친구의 사진과 동영상 보고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꿈에 나와 달라고 간절히 빌면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울음) 때로는 꿈에 나와 주지도 않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친구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다가도 그 물속에서 나만 살아온 돌아왔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 친구와 지금 함께 못해준다는 게 미안하고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을 두고 대통령 사생활까지 다 알아야 하느냐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생활을 알고 싶은 게 아닙니다. 대통령이 나타나지 않은 그 시간에 대통령이 제대로 지시만 해주었다면,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제대로 지시하지 못했기에, 그럼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조사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지금 국가는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국민은 이제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사자이지만, 지난 시간에는 비난받을까 걱정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려 합니다. 나중에 친구들을 볼 때 부끄럽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죗값을 치르고 왔다고 친구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경근 "쳐다보기조차 힘든 마음도 사실"

이날 정리집회에서 유경근 세월호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집회에 참여해준 9명의 세월호 생존자 학생들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유 위원장은 "오늘 9명의 그 아이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내 아이는 왜 저 가운데 없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쳐다보기조차 힘든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운을 뗐다.

유 위원장은 "하지만 그 아이들이 바로 그 세월호에서 우리 부모들 대신 아이들의 마지막을 지켰던, 마지막을 함께했던 아이들이고 그 마지막 순간을 평생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 가야할 아이들"이라며 "그렇기에 그 아이들이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함께 선다고 했을 때 두려웠지만 기뻤고, 슬펐지만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유 위원장은 "다시 한 번 어려운 결정을 하고 나와 주었던 그 아이들에게, 예은이(유 위원장 딸)와 수많은 아이들의 체온을 함께 지니고 있는 그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는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청와대 행진, 맨 앞에는 세월호 유가족

이날 촛불집회를 마친 뒤, 시민들은 청와대와 정부청사, 헌법재판소로 행진을 진행했다 행진 구간은 총 8갈래로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청와대 방면 4갈래 △총리관저 방면 1갈래 △내자동 로터리 방면 3갈래로 나뉘는 코스다. 애초 종로·명동 방면 행진도 신고했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청와대 방향 행진에서는 세월호 유족들이 분향소 사진과 현수막, 2014년 단원고 1학년 학생들 단체사진을 들고 맨 앞에 행진을 이끌었다.

행진 과정에서 시민들은 황교안 국무총리 집무실이 있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황교안은 퇴진하라'는 구호가 적힌 노란 종이비행기 300개 날리기를,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탄핵소추안 인용’ 판결문 낭독 퍼포먼스를 각각 진행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광화문광장 일대와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린 서울 강남구 삼성역·강남역 일대에 총 184개 중대 1만4720명을 배치했다. 이날 집회 및 행진에서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행진을 마친 참가자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해 집회를 마쳤다.

▲ 장예진 양. ⓒ프레시안(최형락)

▲ 세월호 생존학생들과 포옹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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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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