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DJ 문건'은 왜 총선 직후 공개됐나?

[전진한의 알권리] 부실한 행정체계가 만들어낸 우발사건

지난 4월 17일 외교부는 생산된 지 30년이 지난 1985년도 비밀 문서 1602권, 25만여 쪽 등을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그런데 이날 공개된 문서 가운데 반기문 유엔 총장 관련 문건은 큰 파문을 낳았다. 이 문서의 주요 내용은 '하버드 대학에 연수 중인 반기문 참사관이 1월 7일 동 대학교수로부터 입수, 당관에 통보하여 온 바에 따르면 약 130명의 미국 학계, 법조계 인사가 연서한 대통령 각하 앞 김대중 안전 귀국 요청 서한을 1월 10일경 발송 예정이라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가 공개되자 정치권에서 각종 음모론으로 확대 해석되어 정치권을 현재까지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예를 들어,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측에서 반기문 유엔총장의 대권 행보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설부터, 친박의 자작극이라는 추측까지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많은 사건이 그렇듯, 이 사건도 입법 미비와 부실한 행정 체계가 만들어낸 우발사건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믿기 어렵지만 우리나라는 외교 비밀 관련 문서 등을 지정하고 해제하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고작 근거로 존재하는 것은 1964년 제정된 보안 업무 규정이라고 하는 대통령령뿐이다. 이 시행령도 조항 하나하나가 모호하고, 허술해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반기문 총장 관련 비밀 기록 해제도 '외교 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 근거해 공개한 것이다. 이렇듯 근거 법령이 대통령령 및 규칙이다 보니, 국회의 통제를 벗어나 있고 비밀 해제는 국가정보원 및 외교부 중심으로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 비밀해제 작업이 충실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가령 지난 2008년, 나는 비밀 기록 실태를 분석하기 위해 2006-2007년 비밀기록(1급·2급·3급·대외비) 중 일반 문서로 재분류한 기록물 목록 및 건수를 정보 공개 청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공개된 답변을 보고 경악했다. 비밀 해제된 목록에 대부분 검은 싸인 펜으로 가린 채 공개했기 때문이다.

▲ 당시 내가 받은 정보 공개 답변서. ⓒ전진한

당시 정보 공개 담당자는 '비밀 유지 기간이 만료되어 비밀은 해제되지만, 인력 등의 부족으로 내용을 체계적으로 검토하지 않아 목록도 공개하기가 어렵다'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쉽게 말해 자신들이 비밀 해제한 기록에 대해 내용 검토를 부실하게 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 문서도 그 양이 25만 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양인데, 이 문서들을 외교문서공개심의회에서 체계적으로 검토했는지 의문이다.

더욱 문제는 실제 공개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출판 등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외교 및 통일 관련 비밀 문서 등을 공개해 큰 파장을 낳았다. 이들이 책을 통해 비밀 정보를 공개한 것도, 이 정보들을 통제 및 관리할 체계적인 법 체계가 없어서 발생한 일이다. 이런 입법 미비로 인해 고위 공무원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국가 비밀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노무현 정부는 '비밀 보호와 해제에 관한 법률(비밀보호법)'을 제정해 체계적인 법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공익 제보를 막는 비밀 탐지 및 수집에 관한 강력한 처벌 및 국정원 권한 강화 등이 논란이 되었고 그 결과 입법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악성 조항을 제외하고는 20대 국회에서는 비밀 체계를 구축하는 법 제정이 절실해 보인다.

우선 이 법안에는 각종 민간인이 참가하여 비밀을 해제하는 기구 신설을 검토해야 한다. 현재 비밀 해제 여부를 총괄하는 외교문서공개심의회는 위원장이 외교부 제1차관, 위원은 외교부의 차관보·의전장·다자외교조정관·기획조정실장·경제외교조정관 등이 맡고 있고 외부위원은 1명밖에 없다. 이는 비밀 해제 작업에 대한 신뢰성 자체를 저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외부 전문가들이 대거 참가해 비밀 해제 작업에 관한 거버넌스 행정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법안에는 공직자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비밀을 남용 지정하는 경우, 징계 및 처벌하는 조항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지난 비밀 보호법에는 일반인들이 비밀을 수집 및 탐지하는 것만으로도 7년 이하 징역을 처할 수 있었는데, 비밀을 과도하게 지정하는 경우에는 별다른 처벌 조항이 없었다. 이 부분에 관한 보완이 이루어질 때, 이 법안은 형평성을 유지한 채 법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밀 관리 및 해제 작업에 관한 모든 과정에서 국정원이 아닌, 일반 행정 기관에서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현재도 사실상 비밀 관리에 관한 실질적 권한은 국정원에 있다. 따라서 비밀 관리하고 해제하는 기관을 이원화해 국정원의 정보 독점과 폐해를 방지해야 한다.

세계 각국은 비밀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비밀 기록에는 각국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밀 정보를 허술하게 해제하고 있다. 이는 보안 업무 규정이라는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제도가 구성되어 있고 그에 관한 체계적인 지원도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하루속히 국회의 통제를 받는 법 제정이 절실하며, 이에 관한 법 제정 논의가 20대 국회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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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한

2002년부터 알권리운동을 해왔습니다. 주로 정보공개법 및 기록물관리법을 제도화 하고 확산하는데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나 단체들은 정보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햇볕을 비추고 싶은 것이 작은 소망입니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어려운 컨텐츠를 쉽고 재밌게 바꾸는 일을 하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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