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

[화제의 책]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

"먼 훗날 나는 훨씬 더 중요한 연구 분야가 열리리라 본다. 심리학은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150년 전 다윈이 <종의 기원>의 말미에서 이렇게 예언했을 때, 그 얘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일군의 학자는 이런 다윈의 전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1980년대 중반 이들은 진화의 산물인 '인간 본성'을 규명하려는 자신의 연구에 이름을 붙였다. 바로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을 마음의 틀에 관심을 갖는다. 그 마음의 틀은 수백만 년 동안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린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전중환 경희대 교수는 최근 펴낸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이 마음의 틀을 '오래된 연장통'에 비유한다.

"인간의 마음은 톱이나 드릴, 망치, 니퍼 같은 공구들이 담긴 오래된 연장통이다. (…) 우리의 마음은 어떤 배우자를 고를 것인가, 비바람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포식동물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등 수백만 년 전 인류의 진화적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다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설계되었다."

진화심리학은 이 오래된 연장통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한국에서 맨 처음 진화심리학 박사 학위('가족 내의 갈등과 협동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연구')를 받은 전중환 교수는 <오래된 연장통>에서 그것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진화심리학의 유혹에 빠지다

▲ <오래된 연장통>(전중환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프레시안
지난 21일 마련된 전중환 교수와 책벌레들이 만난 자리('과학, 블로거를 만나다')에서도 진화심리학은 빛났다. 책벌레들을 대표해서 전 교수와 대담에 나선 이현우 박사도 진화심리학에 끌리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는 이 박사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서평가이다. 그의 얘기부터 들어보자.

"(진화심리학에 대한 인문학자의 딴죽 걸기를 기대했을) 주최 측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진화심리학에 대단히 우호적이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Moral Animal)>,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The evolution of Desire)>와 같은 책도 흥미롭게 읽었다. 진화심리학의 최신 연구 성과가 담긴 <오래된 연장통>도 열심히 읽었다.

이런 진화심리학의 연구 성과가 더 많이 소개되고, 여러 사람이 이것을 공유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은 흔히 인간에게 기대를 갖고 있기가 쉬운데, 진화심리학은 이런 거품을 빼는데 기여해 결과적으로 인문학의 진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진화심리학을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현우 박사의 이런 솔직한 고백은 진화심리학의 위상 변화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 그 전신인 사회생물학은 인문과학, 자연과학을 막론하고 대다수 지식인에게 극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사이비 과학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상당수가 있지만, 이 박사의 얘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간의 발정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환경이 변한 데는 그것이 지난 30년간 쌓은 놀라운 연구 성과 덕분이다. 전중환 교수는 <오래된 연장통>에서 이런 연구 성과를 가장 최신의 것까지 요령 있게 소개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믿음직한 진화심리학 길잡이의 출현이 반가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대다수 포유류 암컷은 배란 직전에 발정기에 도입하며, 이 기간 동안 여러 수컷과 성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이런 발정기가 없다.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신경을 쓰지 않는 한) 배란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의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인간의 발정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중환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 조상들이 진화한 원시 환경에서 모든 여성이 자식에게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전달해 주는 섹시한 남편들을 얻은 건 아니다. 이런 여성은 가임기에 섹시한 외간 남자와의 혼외정사를 추구하게끔 진화했을 것이다.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예측을 한다. 가임기의 여성은 좋은 유전자를 지닌 남성을 남편감이 아닌 성관계 상대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측은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 코와 턱이 발달한 남성적인 얼굴, 어깨가 넓고 근육이 탄탄한 남성적인 신체, 분위기 있는 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 남자답게 크고 훤칠한 키에 대한 여성들의 선호는 가임기가 되면서 뚜렷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 가임기 여성은 비가임기 여성보다 거칠고 남성적인 사내의 체취를 보통 사내의 체취보다 더 선호했다."


이처럼 진화심리학은 마음의 틀이 어떻게 빚어졌는지 설명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영향을 확대해 왔다. 전중환 교수는 <오래된 연장통>에서 진화심리학이 철학, 예술, 종교, 미학, 경제 등을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알려준다.

마음의 '오작동'에 주목하라!

▲ 전중환 경희대 교수. ⓒ프레시안(사진=최형락)
전중환 교수가 <오래된 연장통>에서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의 마음은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의 수렵·채집 생활에서 겪어야 했던 문제를 잘 풀게끔 진화했다. 불과 1만 년 정도밖에 안 되는 농경 생활이나, 길어야 200년 짧으면 수십 년에 불과한 도시 생활이 마음의 진화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적다.

"우리 안에는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

이러다 보니, 인간의 마음은 현대의 일상생활 속에서 갖가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보자. 먹을거리가 부족한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서 인류의 조상은 열량이 높은 음식을 달게 느끼게끔 마음이 진화해 더 많은 에너지원을 섭취했다. 그러나 이런 본성은 단 것이 지천에 있는 현대에서 각종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흉으로 작용한다.

포르노에 흥분하는 남성도 마찬가지 예다. 전중환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인류가 진화한 환경에서 포르노는 없었다. 남성이 포르노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감상할 때, 남성의 두뇌는 그 모습이 실제 여성이 아니라 점과 선이 조합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포르노 속 여성과 성관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남성의 두뇌는 포르노를 보면서 아무런 실익도 없이 심장 박동 수를 높이며 발기를 시킨다."

이현우 박사는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대중문화도 이런 진화심리학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TV 속의 선남선녀 연예인에게 열광을 한다 한들, 실제 현실에서 얻는 이익은 없다. 우리의 마음이 수백 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는 그런 선남선녀를 배우자로 선호하도록 빚어진 데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진화심리학을 접수하라!

▲ '로쟈' 이현우 박사. ⓒ프레시안(사진=최형락)
전중환 교수의 주장대로, 진화심리학이 오래된 연장통의 비밀을 하나씩 해명해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현우 박사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진화심리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전 교수의 답을 들어보자.

"많은 진화심리학자는 오래된 연장통의 비밀을 해명하는 데서 멈춘다. 그렇게 발견된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해석해 처방할지를 놓고는 대부분의 진화심리학자가 침묵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은 인류가 진화한 환경에서 빚어진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따르자,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자연주의 오류).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면 온갖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참고 사항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치적으로 우파든 좌파든 진화심리학을 통해서 얻은 인간에 대한 통찰은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을 더욱더 깊게 해줄 것이다.

나는 국문과, 영문과, 불문과 학생들에게 진화심리학 강의를 들으라고 권유한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지식 분과들은 진화심리학을 토대 삼아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화적 접근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며 무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지만, 다윈 혁명은 어쨌든 진행 중이다."


다윈 혁명은 진행 중이다!

이런 전중환 교수의 선언이 현실이 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진화심리학의 있는 그대로의 면모를 제대로 전달할 전문가를 한국 사회가 얻은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장담하건대,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지적 논쟁은 앞으로 전 교수의 존재로 더욱더 풍성해 질 것이다.

전중환 교수는 농담처럼 "대중을 위한 진화심리학 책은 <오래된 연장통>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진화심리학 연구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내겠다는 한국의 첫 진화심리학자의 야망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연구에만 몰두하겠다는 그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대중과 잘 소통할 수 있는 과학자가 드문 한국 현실에서, 대중이 이런 감각과 솜씨를 가진 전중환 교수를 그대로 둘 리가 없다. 또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그가 앞으로 오래된 연장통의 어떤 비밀을 파헤쳐 우리를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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