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공익은 무엇인가? 각 개인이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공익을 어디서 기대할 수 있는가? 이 주제는 얼핏 보기보다는 대단히 복잡한 논제들을 내포하는 문제로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제3부 합리주의와 제4부 선험주의를 다루는 대목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간략한 요지만을 제시한다.
우선 공익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사항인지를 몇 가지 예를 통해 엿보기로 하자. 현재 시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는 공익적인 정책의 예로는 세종의 한글 창제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당대에는 지독한 논쟁을 뚫고 세종의 의지로 강행되어야만 했고, 훈민정음은 반포된 후에도 400여년 동안 공익성을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19세기말 이후 사회가 평등해지고 민중의 이익이 중요하게 고려되면서 한글의 가치가 부각되고 세종의 정책으로써 실현된 공익이 밝은 빛을 받게 되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 560년 세월을 평면화해서 바라보면, 세종의 선견지명에 누구나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역으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책논쟁 어떤 것에 대해서 세종이라면 어떻게 결정했을지를 한번 대입해서 자문해보자. 예컨대 대운하라든지, 출자총액제 제한 철폐, 또는 대학입시 고교등급제와 같은 쟁점에서 장차 400년 동안 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그 후부터 공익으로 판정받을 길을 찾아서 현재 우리에게 공익으로 여기며 추구해야 하는가?
대운하, 출총제, 대학입시, 등등, 어떤 공공정책에 관해서든지 가장 첨예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가장 큰 목소리로 요구사항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는 모르긴 몰라도 장차 10년이나 20년 사이에 자기에게 직결되는 이익을 고려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혹시 50년이나 100년 앞까지 생각할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400년 앞을 내다본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비현실적이다.
이처럼 과거에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우리는 때때로 상당히 명확하게 공익을 판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도 대부분은 공익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란이 지금도 이어진다. 당장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해서도 여론조사를 하면 크게 엇갈리는 결과가 나올 것이고,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라든지, 이승만의 치적 등을 묻더라도 논란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때때로 상당히 공익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경우에도, 시간의 차이를 주요 변수로 포함시켜서 고려하면, 훈민정음의 예처럼 현재 우리가 그처럼 긴 미래를 투명하게 내다보면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과연 하나라도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내가 이런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곧 내가 미래에 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10년후, 20년후, 100년후, 또는 심지어 400년후의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바로 그처럼 확신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수렴하지 않고 발산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나처럼 불가지론을 취하는 사람을 빼고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 따로 떼서 물었을 때, 경부대운하가 국운상승의 절대 계기라고 확신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나라를 망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적어도 비슷한 숫자가 있다는 뜻이다.
두 갈래 상반되는 확신이 부딪칠 때 어느 편이 선견지명일까? 이와 같은 문제를 선견지명에 입각해서 풀고자 한다는 것은 곧 무력으로 결정한다는 말과 같아져 버린다. 두 갈래의 선견지명이 부딪칠 때, 그 둘을 지양하는 제3의 선견지명이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책을 무력에 따라서 선택하게 되면 그 정책이 공익을 달성할지 여부는 철저하게 결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결정된 정책과 기대되는 공익적 결과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이 "될대로 되라"(Que sera sera)에 의존하는 셈이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욱 자세하게 탐구하기로 하고, 일단 이와 같은 딜레마가 있다는 데까지는 논증이 된 것으로 치자.
이와 같은 딜레마는 공익을 자체로 사익과 동일한 평면에 두면서 종류만 다른 것으로 바라볼 때에 맞이하게 되는 문제다. 반면에 공익이라는 것이 사익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이익은 아니고, 단지 차원만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런 딜레마는 상당히 많이 해소된다. 이 방향의 관점에서 시나리오를 하나 써보자.
대운하로 자기가 이익을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운하를 공공 이익이라고 내세우고, 대운하로 자기가 이익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운하를 공공 손해라고 주장한다고 치자. 여기서 이익이란 반드시 개인적인 차원의 금전이나 편의 또는 지위나 위신 상의 이익만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된다거나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동경하는 형태의 사회질서가 이루어지는 이익까지 포함한다. 앞 제1절에서 밝혔듯이, 이미 이익에는 개인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공공 이익, 장기적 심층적 이익, 상호 이익 등이 포함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덕목들 역시 행위자 본인 또는 사회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익이기 때문에 덕목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이처럼 정치사회의 진로를 둘러싸고 두 갈래의 이익이 경합할 때에는 대치를 종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냥 내버려둬도 어떻게든 결정이 나기는 할 것이다. 우연히 한 쪽이 그냥 양보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서로 힘으로 싸워서 결판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방치는 문명사회가 할 일은 아니다. 문명사회라면 힘으로 싸울 일을 가능하면 힘으로 싸우지 않고 해결할 길을 찾아야 한다. 다수결이라는 절차는 대표적으로 그런 취지에 부합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는다. 그런데 인민이란 보통 수백만에서 수억에 이르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의 단일한 의사를 가진 주체일 수가 없다. 따라서 통상 인민의 의사라고 말할 때에는 인민 가운데 논의를 주도하는 다수 또는 주류의 의사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다수의 의사도 대단히 변덕스럽다. 노무현에 대한 높은 지지가 불과 3년여만에 바닥으로 가라앉아 철저한 노무현 지우기를 시도하는 이명박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것만 봐도 인민 다수라는 항목이 얼마나 가변적인지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제도나 정책의 안정을 위해서는 인민 주권이라는 항목을 상징적인 전제로 삼고, 그 아래 위임된 권력을 제도화하게 된다. 대통령, 의회, 사법부를 비롯해서 기타 모든 형태의 공공기관들은 인민주권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들이다. 위임받은 권력의 경우에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삼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다수결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국무위원들에게 지시나 명령을 내릴 수가 있다. 대통령이 장관을 임명할 때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했지만, 청문회의 결과에 따라 임용 여부가 좌우되지는 않는다. 주권적 인민이 헌법을 통해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할 때, 국무회의나 국회의 다수결을 필수요건으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공공정책이란 거의 모두 위임된 제도와 기관에 의해서 입안되고 결정된다. 그러나 배후에는 언제나 주권적 인민의 재가가 암시적인 형태로 깔려있다. 이미 결정된 어떤 정책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주권적 의사의 표현으로서 반대할 수 있고, 아직 채택되지 않은 어떤 정책이라도 입안하여 시행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시민 개인 또는 집단의 요구가 주권의 표현과 같은 것은 아니다. 몇 명의 개인 또는 일부 집단의 입장이 곧 인민의 의사가 되려면 충분한 다수의 동조라는 고비를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위임된 권력의 결정을 무효화하는 데에는 때로 80%이상의 다수도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둘러싼 2008년의 공방이 그와 같은 예이다. 한 때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비율이 80%를 넘기도 했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10% 아래로 떨어진 여론조사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정부가 그래도 소고기 수입개방을 철회하지 않았을 때, 정권을 퇴진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특정 쟁점에 관한 즉각적인 의견의 분포가 곧 정부기관에게서 "위임받은 권력"을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을 반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해 본다. 정치사회에서 표명되는 이익이란 일차적으로 각 개인들이 생각하는 이익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차원에서는 이익이 수렴하지 않고 다양한 진영이 주장하는 여러 갈래의 이익 사이에 경합이 발생한다. 경합은 주권적 인민의 다수결로 해소하는 것이 문명사회다운 방식인데, 인민의 다수가 대단히 변덕스럽기 때문에 정책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일정한 틀을 갖춘 제도에게 결정권을 위임할 필요가 있다. 위임된 제도가 채택한 정책을 때로 인민 과반수가 반대할 수도 있지만, 그 제도에게 위임했던 권력을 회수하기로 결단하는 인민이 다수가 되지 않는 한, 단지 인민 다수의 평면적 반대만으로 제도에 의한 결정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개인의사의 차원과 공공의사의 차원이 서로 다르다고 한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 각 개인은 이기적인 동기에서든지 아니면 보다 고상하고 장기적인 동기에서든지 나름대로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제안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공차원에서 채택되는 정책이란 결국 어떤 개인에 의해서 제안되거나 수정된 의견일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제안이 곧 공공정책으로 채택되어 시행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이유로 제기되는 다양한 의견들 사이의 경합에서 자신의 의견이 정상에 오르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의사가 마침내 공공정책으로 채택되기까지는 사회적 경합이라는 오리무중의 과정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나는 정책의 공공성이란 그 내용보다는 이 경합과정의 공정성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정책을 둘러싼 경합과정에서 공정성의 관건은 표현의 자유다. 일반 시민들을 향해 적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주장하고 알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최종적으로 어떤 정책이 채택되더라도 패자 쪽에서 불공정한 게임이었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절차의 공정성이 정책의 공공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까닭은 공정한 절차에 의한 경합이라면 누구에게나 결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바라보지 않고 상대의 입장 또는 제3자의 입장에서까지 상황을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촉진되기 때문이다.
▲ 민생민주경남회의가 18일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과 촛불 문화제를 불법 집회로 규정해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검찰 규탄' 기자 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
무엇이 더 나은 정책인지에 관해 행위자들이 통제력을 가지지 못하는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결과를 통제해볼 욕심을 버리고 정책을 실지로 좀더 낫게 만드는 데에 몰두하도록 유도하리라는 얘기다. 다름 아니라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라는 게임의 절차가 결과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을 지탱한 혼합정의 이념이고, 미국에서는 권력분립의 이론으로 발전한 이념이다. 여기서 균형이란 저울의 바늘이 가리키는 지점이 안정되어 무게를 읽어낼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즉, 불확실성의 단계를 지나 민의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설령 이와 같은 절차주의에 내포된 불확실성이 행위자들로 하여금 역지사지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결과의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특별히 절차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보장된 것은 없다는 일반적인 사실의 반영일 뿐이다. 만약 절차의 공정성이 시민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신뢰를 받고, 또 시민들의 안목이 자기가 바라는 결과에만 협소하게 고착되지 않을 정도로 개명되어 있는 사정이라면, 사회세력간의 균형점에서 발견된 정책은 시민들의 협조를 얻기가 쉬운 만큼 성공을 기약할 확률도 높아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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