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린 건 국민들의 자각이었다"

[김상수 칼럼]<27>어둠과 빛의 도시 베를린에 다시 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아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 4월 초, 서울로 돌아왔지만 보이고 들리는 건 죄다 막막한 것들이었다. 지난 대선 이전과 직후, 그리고 이명박 집단의 등장에서부터, 서울은 급전직하 겨울의 동면(冬眠)으로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봄이 왔지만 이제 봄은 봄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이명박의 궤변을 멍한 표정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이명박의 말 같지 않은 말을 매일 듣는 건 고역이었다. 운하를 판다, 만다, 싼 미국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역겨운 착란의 소리를 그저 텔레비전 개그처럼 듣고 말기에는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4월이 지나고 5월이 됐다. 광화문 한 구석에서부터 어린 중고생 소녀들이 하나 둘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소녀들이 치켜들기 시작한 '촛불'은 절망하고 있던 시민들의 가슴에 서서히 불을 댕겼고 내 심중에도 이내 옮겨 붙었다. 나는 광화문으로 곧장 걸어 나갔다. 저만큼 거리 먼발치에서 아는 한 후배가 시민을 상대로 확성기로 소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후배는 연설 며칠 후 사복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 무렵, 올해 초 뉴질랜드에서 알게 된 지질학 박사인 독일인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킴! 한국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 너는 괜찮니?"

"나는 괜찮다. '촛불'에 도움도 못주고 있고 별로 하는 일이 없다. 무기력하게 시국칼럼이 나 쓰고 있다."

"이쪽으로 다시 건너와라!"

나는 망설였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부터 소설 두 편을 쓰고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전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가을을 다 보내고, 올해에는 서울에선 수입도 없었다. 사진 두 장만 팔았을 뿐이었다. 화랑 반 떼어주고 1000만 원. 올해 내 수입의 전부다. 작년에 어느 경제신문 기사에서 내가 한국에서 사진이 팔리는 작가 스무 명에 들어간다는데, 줄곧 나라 밖에 나가 있어 화랑 접촉이 없어서 그런가. 주변머리가 없으니 못 팔고 안 팔렸다. 그럼, 그간 빌어먹었는가? 그렇진 않다. 밥도 먹었고 술도 마셨다.

빈궁한 처지엔 겨울나기가 너무 춥다. 생각 끝에 겨우 비행기 표를 구했다. 뉴질랜드 남 섬 크리이스트처치로 다시 날아갔다. 거긴 여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9개월 만에 다시 간 것이다. 독일인 친구 집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부터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고 혼자 나무를 찍으러 나다녔다. 독일인 친구 Jochen Bind가 말을 걸어왔다.

"킴, 너는 예술가다. 독일로 가라!"

"......"

"독일은 예술가를 존경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넌 세계적인 예술가다. 독일로 가라니깐!"

JO는 붕붕 비행기를 태웠다. 마침 난 내년 4월부터 3개월간 프랑스 파리 Cite D'arts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 참가를 예약하고 있었다.

"독일은 네 사진을 전시할 장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네 연극을 독일말로도 공연할 수도 있을 테고…."

Jochen Bind는 내 사진과 내 연극을, 내 예술을 좋아한다. 뉴질랜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나에게 자꾸 독일 행을 권했다. 그래 그럼, 내년 파리에 가기 이전에 먼저 독일부터 가볼까? 그런데 가진 돈이 없었다.

어쨌든 나는, JO가 써준 희미한 안내장을 들고 서울을 거쳐 독일 베를린으로 13년 만에 다시 날아들었다. 딱 일주일 전이다. 또 겨울이다. 13년 만에 다시 온 베를린은 여전히 한 겨울이고 춥다.

▲브란덴부르크 문 ⓒ김상수

13년 전, 1995년 3월, 생애 처음으로 미술전시를 파리에서 끝내고, 당시 난 유럽 몇 나라를 유레일패스로 여행 중이었다. 서른일곱 살 때였다. 나는 그 때 베를린을 이틀간 다녀간 적이 있었다. 동독지역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Gate) 가까이 숙소를 정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그 문으로 나갔다. 혼자였다. 아침 일찍 이른 시간이고 날씨가 추워서인지, 문 앞엔 사람들이 없었다. 독일 분단과 통일을 상징한다는 그 문 앞으로 뻗은 긴 길을 따라 걸었다가 문 앞으로 되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환청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들렸었다. 두리번거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첼리스트 로스로포비치는 서베를린 쪽 장벽 아래 작은 걸상에 혼자 앉아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이 모습은 TV로 세계에 생중계 되었고 그 때의 정경은 이후 사진으로도 널리 퍼져 나도 볼 수 있었다.

1989년 1월 어느 날, 스무 명의 동독 시민들이 동베를린에 위치한 동독 대표사무소를 포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동서독 통일의 서막을 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989년 7월에는 삼십 여명의 동독시민들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동독 대사관을 점령했다. 직후 그 여름에는 사천 여명의 동독시민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국적을 얻었다. 1989년 11월 초에는 서독의 헬무트 콜 수상이 통일 독일을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1989년 11월 9일에 있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로 바로 이어졌다. 그 전날 밤 군중들은 평화적으로 장벽을 넘고 또 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브란덴부르크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6년이 지나 1995년 3월 초,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이른 아침에 나 혼자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때 브란덴부르크 문을 뒤로 조금 더 걸어 나갔던 기억이 난다. 목숨을 걸고 장벽탈출을 시도하다 동독의 경비군인들이 쏜 자동소총에 사살된 희생자들의 혼을 위로하기위해 세운 작은 나무 십자가가 열 지어 있었다. 시든 꽃들이 나무 십자가 앞에 놓여있었던 기억도 난다. 탈출 희생자들의 작은 사진 아래에는 희생자의 태어난 날짜와 희생된 날짜가 적혀있었다.

그날 오후엔 훔불트 대학엘 갔다. 1810년 빌헬름 홈볼트에 의해 건립된 대학이자 헤겔, 피히테, 아인슈타인, 하이네, 마르크스, 엥겔스 등이 다닌 대학이라 오늘까지 인류의 지성사에 펄펄 살아있는 귀신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대학이었다. 본관인지 별관인지 건물 중앙 홀 입구에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한국어과'라고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층으로 올라갔더니 바로 앞에 한국어과 사무실이 있었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젊은 독일인 여성이 독일어로 맞아주었다. 이어서 독일인 할머니가 나타나 능숙한 한국어로 "어떻게 오셨나요?"하고 고개를 내밀며 내게 물었다.

"그냥. 한국어과 간판을 따라 왔어요."

"그래요? 어디서 왔는데요?"

"서울서 왔는데요, 지금은 파리에서 왔지요."

우리말이 능숙한 독일인 할머니는 바로 한국어과 교수였다. 친절했다. 훔불트 대학이 동독지역에 있어서인지 할머니 말씨는 전형적인 북한말이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처음 만난 나를 데리고 어떤 다과회로 이끌었다. 한국인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당시 훔불트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던 송두율 교수도 그 때 만났다.

모임에서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오던 베를린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몹시 추웠던 기억이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당시 독일의 수도 본으로 떠났다. 본에서는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의 안내로 퀼른까지 갔고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의 미술을 봤다. 친구와 헤어지고 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행 기차에 올랐다. 이게 13년 전 1995년의 베를린 기억의 일부다.

▲ ⓒ김상수

2008년 12월 8일, 이번에는 기차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 내렸다.

싼 호텔에 투숙한 셋째 날 호텔에서 사고가 생겼다. 인터넷을 하러 나왔던 사이에 호텔 룸에 두었던 지갑에서 500유로가 없어졌다. 지금 내겐 너무 큰돈이다. 한국 돈으로 100만원이다. 호텔매니저는 경찰 신고를 말했지만 복잡하단 생각이 들었다. 청소하는 사람들을 의심해야 하고, 단 한 사람, 지갑에서 돈을 빼어간 사람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의심받고 조사당하는 것은 옳지 못하단 생각이 들었다. 단념했다. 다행히 지갑 안에 나머지 돈과 카드는 가지고 가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환율이 어디까지 뛸지 몰라 현찰을 바꿔온 게 화근이었고 무엇보다 부주의한 내 탓이었다.

다음 날, 13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브란덴부르크 문 앞으로 다시 갔다. 1791년 프러시아가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이 문은 베를린 장벽과 함께 동서 냉전시대를 한 때 상징했다. 높이 4미터, 길이 47킬로미터인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브란덴부르크 문은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스산하고 황량한 동베를린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13년 전인 1995년 그 문 앞에서 바라본 동독 쪽 방향으로는 텅 빈 광장이나 거대한 공사장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이라는 큰 대로가 열려있고 양 옆으로는 건물들이 꽉 차 있었다. 베를린에서 가장 화려한 대로 가운데 하나가 됐고 통일 독일 수도 베를린의 중심축이 되어 있었다. 난 어디가 동독 지역이었고 어디가 서독 지역이었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오늘날 베를린거리에서 과거 베를린 장벽이 서 있던 자리가 어디쯤인지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40년 분단 기간 동안 버려진 듯 황폐하게 서 있던 브란데부르크 문 동쪽 지역은 불과 13년 만에 상전벽해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문득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생각났다. '빠르고 느리고 빠르고'의 3부 형식의 곡은 독일 분단에서 통일까지 역사의 흐름을 음악으로 변주하는 듯 했다.

독일인의 입장에서 볼 때 독일 통일은 자결권의 완성을 의미한다. 동독인들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서독은 정부수립 당시부터 전체 독일인들이 자신의 국가 방향과 진로를 자기들 스스로 결정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을 예상하고 헌법의 전문(前文)에 '독일은 하나다'라고 명시하고 분단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통일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을 독일 기본법 전문에 명시했고 통일의 방법으로는 동독의 연방가입에 의한 통일과 새로운 헌법에 의한 통일을 규정해 두고 있었다.

이후 서독은 정권이 바뀌어도 기본적인 통일정책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르바쵸프의 개혁 개방정책과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가 통독에 불씨가 됐다. 구소련은 전체 독일인들의 자결권 행사가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한다는 구실로 독일 통일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고르바쵸프의 생각은 달랐다. 유럽의 안정이 없다면 러시아의 개혁 개방도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무엇보다도 동독주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목숨을 건 서독으로의 탈출, 반정부 시위를 통해 동독정부를 줄기차게 압박한 동독 주민들의 자발적인 변혁의지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붕괴의 주요 동인이었다.

1989년 동독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개혁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이지 않았다면 결코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독 주민들의 자유를 향한 외침과 행동이 있었고 어둠을 깨치고 밝은 빛으로 나서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있었기에 동독 수뇌부는 쫓기듯이 통일 협상을 급하게 서둘렀다.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그 누구도 앞당겨 통일까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꾸준히 준비하고 또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한국은 이명박 집단의 정권이 들어서서 '비핵·개방·3000' 이런 표제를 내걸자마자 북한과의 대화는 꽉 막히고 말았다. 상대를 도외시한 대화란 애초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명박 집단에게 통일은 그저 관념이나 막연한 구호로만 여겨지는 것일까. 분단의 질곡으로 인한 수많은 고통은 그저 남의 일인가. 독일 통일이 유럽의 안정을 이끌었고 EU 연합의 단서가 됐다. 남북의 통일은 동북아시아 평화의 지평을 여는 기본 열쇠이고 그 시작이다. 동북아시아 평화의 주도권은 우리가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시각을 어떤 방식으로 이명박 정권에 일깨울 수 있겠는가. 참으로 요원한 일이다.

어둠과 빛의 도시, 여기 베를린에 나는 다시 왔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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