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 "행복한가? 당신은 '도둑' 아니면 '바보'요"

"'난장이'는 바로 비정규직…가슴에 희망의 철기둥 박자"

3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스스로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여러분과 얘기하고 있다"는 그의 70년 가까운 삶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 30년간 이 땅은 빠른 속도로 변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보여주는 개발과 독재, 성장의 그늘은 시간상으로는 어쨌든 '오래 전'의 얘기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선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리는 불행으로 동맹을 맺었다"고 말했다. 이 시대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3일 늦은 저녁 서울 노원구 서울북구고용지원센터 대강당에 모인 300여 명의 사람들은 그의 이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가 도둑이고 누가 바보인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선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리는 불행으로 동맹을 맺었다"고 했다. 이 시대의 대한민국사람이라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프레시안

지병으로 대외 활동을 자제해 오던 조세희 작가가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섰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마들연구소의 '명사 초청 특강'의 네 번째 강사로 나선 것.

그는 지난달 있었던 '난쏘공 30주년 기념 낭독회' 이후 며칠을 앓았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1시간여 진행된 강연에서 때로 뛰는 가슴을 잡으며 지난 역사와 오늘의 우리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불행으로 동맹을 맺었다"

▲ 조세희 작가는 "우리는 밀림에 있다"고 했다. ⓒ프레시안
군부 독재는 지나갔다. 거대한 포클레인을 앞세워 때려 부수고, 각목을 든 깡패들을 동원해 사람들을 밀어내는 시대는 적어도 "옛 일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독재에 맞서 많은 이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고, 우리네 부모님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도 조세희 작가는 "우리는 밀림에 있다"고 했다.

"앞선 세 세대가 그토록 열심히 일했지만 이 조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는 못 됐다. 어른들이 세계 최장시간 중노동을 하며 이 나라를 만들어 왔다. 그랬으면 우리는 지금쯤 낙원에 도착해 있어야 하는데 정작 아주 슬픈 시대에 왔다."

단지 최근의 경제 위기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조세희 작가는 손목시계를 사람들에게 보이며 "선진국이 이 앞쪽에 있고 우리는 중간에 있다. 우리가 과연 동시대인일까?" 물론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은 나라"라고 덧붙였다.

"우리 시대의 난장이 비정규직, 몸과 마음이 아파 못 쓰고 있다"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유는 많았다. <난쏘공> 이후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동안 그는 사진기를 들고 온갖 현장을 찾아다녔다. 그는 "어떤 때는 가슴이 철렁하고 어떤 때는 가슴이 막 메어지는" 순간들을 마주했다.

현장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난장이' 비정규직"을 만났다. "써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못 쓰는"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참 먹고 살기가 힘이 드는 '일하는 빈민'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받아야 하는 차별이 싫어, 항상 필요한 일자리니 고용 불안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를 어렵사리 입 밖에 꺼내도, 세상은 언제나 무심하다.

"한 번은 집회에 갔다가 자기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한 아버지를 만났다. 3년이나 투쟁했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는데 그이가 '투쟁하는 동안 부인과도 헤어지고 어느 날 집에 가니 아이 셋이 바싹 말라비틀어진 김치에 한 공기도 안 되는 밥을 나눠 먹고 있었다. 긴 투쟁 끝에 돈도 한 푼 없는데 그때 내가 어땠겠는가' 했다."

▲현장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난장이' 비정규직"을 만났다. "써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못 쓰는"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참 먹고 살기가 힘이 드는 '일하는 빈민'이다. ⓒ프레시안
"한국이 5%를 위한 국가가 되는 것 같아 힘이 더 든다"

중요한 시기에 가장 아픈 사람들을 두 팔 벌려 꼭 껴안지 못하고 다른 길 가는 운동도 문제지만, 그의 심장을 더 뛰게 하는 것은 "국민이 세금을 내 지어준 제일 비싼 건물에 빨간 카펫을 깔아 놓은 곳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볼 때다. 그 자신은 "늙으면 분노도 줄어든다"고 했지만,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뉴스 보지 말라 한다"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볼 때마다 얼마나 그의 가슴이 요동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공부도 많이 하고 가진 게 많은 부자들이 나라 일을 잘 볼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뽑아주면 그 부자들은 저희들 5%나 20%를 위한 정책을 편다. 나머지 80%나 95%가 죽어나가도 관심도 없다."

조세희 작가는 "지금 한국이 5%를 위한 정책을 쓰는 국가가 되는 것 같아 힘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것도 지지율 형편없이 낮은 정부가 하는 일이다. "길고 길었다는 피식민 시대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군부 독재가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가 '슬픈 시대'를 살고 있는 이유다.

"지금 정신 안 차리면 한참 더 길게 길게 끌려 다녀야 한다"

▲ 그는 절망과 체념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희망은 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그러나 그는 절망과 체념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희망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오랜 시간을 들여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았다. 절대로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그는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것은 저희들의 영달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국민'을 괴롭히는 '적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 시간부터 우리 가슴에 철 기둥 하나씩을 심어 넣자"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철 기둥을 박아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버텨내면서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참 더 길게 길게 끌려 다녀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역사에서 절대 생략은 없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절대 생략이 없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어느 날 하루아침에 훌쩍 뛰어 넘어 새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더디더라도, 누군가는 한 걸음씩 밀림을 헤쳐 나가야만 앞이 확 트인 개활지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다시 새겨졌다.

"이 징검다리를 생략하고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탐욕 정치가와 재벌, 부정 관료의 세상에서 갑자기 기가 막힌 낙원에 도착할 수는 없다. 거쳐야 할 길을 거쳐야 한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서 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주 많다."

"오늘의 우리는 조선시대 의병과 같다"

▲ 아직 세상에 내놓지 못한 자신의 작품 <하얀 저고리>에 대해 조세희 작가는 "<난쏘공>에 이어지는, 내가 후손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라고 소개했다. ⓒ프레시안
이어 아직 세상에 내놓지 못한 자신의 작품 <하얀 저고리>를 놓고 조세희 작가는 "<난쏘공>에 이어지는, 내가 후손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라고 소개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이 땅의 옛날 의병은 한 번 죽어서는 곧바로 저 세상으로 갈 수가 없었다. 몽고군에게 죽고, 관군에게도 죽고, 중국 군대에게 죽고, 일본군에게 죽고…. 한 의병이 열 번 죽고 몇 십 번부상을 당하고 구천을 떠돌다가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얀 저고리>에 나오는 얘기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 조선시대 의병과 크게 다를 것 없다"고 했다.

"우리 늙은이들은 조금 더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미래가 달려 있다."

비록 '한 번 죽는 것만으로는 저승으로 갈 수 없는' 의병의 운명을 두 어깨에 무겁게 지고 있지만, 그는 "젊은이들이 절대로 깜깜한 세상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강연을 끝낸 그는 아픈 몸이 집중을 못하게 해 정리가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빠뜨린 말이 많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빠뜨렸다는 것 안에 지난 20세기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기록한 남의 땅 한 운동가가 남긴 말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옮기면 이렇다.

"만약 당신이 이성과 힘을 모두 가질 수 없다면 항상 이성을 택하고 힘은 적에게 주어버려라. 힘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해주지만,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주는 것은 오로지 이성뿐이다. 지배자는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성을 얻어낼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부터 항상 힘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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