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타이어 앞, 아버지의 눈물

[현장] 사측, 유가족 대책위 면담 거부

13일 오전 11시 서울 역삼동 한국타이어 본사 빌딩 앞. 시민사회단체들과 노조 조합원들, '한국타이어 노동자사망 유가족대책위' 회원들 50여 명이 모여 한국타이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 무리의 한 가운데에는 유가족대책위원장 조호영(58) 씨도 끼어 있었다.

초로의 조 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기자회견문을 읽어내려갔고, 11시 40분께 기자회견문 낭독이 끝난 뒤에는 기자회견문과 '한국타이어 노동자 집단 발병 역학조사에 대한 노동자 사망 유가족대책위 자문의사단 의견서'를 한국타이어 사장에게 직접 전달하기 위해 빌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가운데 검정색 점퍼차림의 남성이 유가족대책위원장인 조호영 씨. ⓒ프레시안

그러나 이미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래서 조 씨를 비롯한 대표단 3명은 건물을 돌아 주차장 쪽 후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후문 마당 입구에는 한국타이어 직원 30여 명이 이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조 씨는 "사장 만나러 왔다"며 직원들의 벽을 뚫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때 '막혔다'는 소식을 들은 젋은 조합원들이 몰려와 한국타이어 본사 건물 뒷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 ⓒ프레시안

한국타이어 직원들의 저지선은 무너졌고, 노조원들이 마당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한국타이어는 후문을 굳게 걸어잠근 채 노조원들은 물론 대표단도 건물 안으로 한발짝도 못 들여놓게 했다. 이들은 "대표단 3명만 들어가서 기자회견문과 의견서만 전달하겠다는데 이것까지 막냐"며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정문과 후문을 모두 막아버리는 바람에 건물 안의 은행을 찾아 온 일반인들도 발걸음을 돌려야 했고, 업무차 건물을 찾은 사람들도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 했다.
▲ ⓒ프레시안

이 때 차분함을 유지하던 조 씨의 격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조 씨의 아들 동권 씨는 대전에 위치한 한국타이어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2006년 12월 28일 사망했다. 사인은 심근경색인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 있으면 스물 아홉의 건장한 청년이었을 조 씨 아들의 첫 번째 기일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조 씨는 한국타이어 직원은 보이는 대로 아무나 붙들고 절규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죽어야 만나주겠다는 것이냐!", "이 악랄한 놈들아. 얼마나 큰 천벌을 받으려고 내 아들 죽여놓고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로 왔다. 그래도 죽기 전에 사장 한 번 만나고 죽어야겠다."라고 악을 썼다.

그를 막아선 한국타이어 직원에게는 "너희들이 그렇게 충성을 바쳐봐야 죽으면 뭐하느냐. 이런 부도덕한 기업에 충성을 바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꾸짖었다.

그러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 못한 듯 조 씨는 찬 바닥에 쓰러져 오열을 토했다.
▲ ⓒ프레시안

조 씨는 아들에 대해 "한 번도 속 썩여 본 적이 없는 모범생 아들이었다"고 말했다. 충북대 공대를 나와 졸업하던 해인 2006년 1월에 "한국타이어에 취직했다"며 좋아하던 아들이었고, 부모님도 아들을 대견해 했다. 특히 청년실업이 심각한 시절에 졸업과 동시에 취직해 대견했고, 청주가 집이라 가까운 곳에 취직해서 '집에서 다닐 수도 있겠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은 출퇴근 거리에 살면서도 한국타이어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아들에게서 듣는 소리는 매번 '바쁘다'는 얘기였다. 한 번은 집에 와서 도배를 도와달라고 하니 "바빠서 시간을 못 내니 돈을 부쳐드릴테니까 사람을 고용해서 하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던 아들이 한국타이어에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왔다. 아들의 죽음에 아내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언젠가 아들이 "피곤하고 힘들다"며 "딴 데로 직장을 옮길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아내가 "딴 데 가봐야 더 나은 보장이 있냐. 한국타이어에 그냥 다녀라"라고 말했고, 아들은 "엄마. 그게 낫겠다"며 묵묵히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 대화 한 마디가 아내의 가슴에 대못이 돼 박혀버렸다.

오열하던 조 씨를 주변 사람들이 추스리는 사이, 건물 안에서 한국타이어 임원 한 명이 나와 기자회견문과 의견서를 받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건물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조 씨는 성에 차지 않았다. "상무 말고 사장 보자는데…." 정신을 추스린 조 씨는 주변의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을 보냈다. "바쁘실텐데 그만 가보세요. 저는 여기서 사장 만날 때까지 한발짝도 안 움직일겁니다."
▲ ⓒ프레시안

조합원들이 정문 노숙농성장으로 자리를 다 옮긴 뒤에도 후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닫힌 문 사이로 한국타이어 직원들에게 욕도 하고 타일러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정오를 넘겼다.

조 씨는 문 앞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서는 수첩과 명함첩을 꺼내 쉴새없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기자 양반. 나 지금 서울 올라와서 역삼동에 한국타이어 본사에 와 있어. 내가 사장 만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거야. 어? 바쁘다고? 그래 다른 기자라도 꼭 보내줘.", "OOO 의원님 안 계십니까? 나 조호영이라는 사람인데, 서울에 올라왔다고 꼭 한 번 뵙고 싶다고 전해주십쇼.", "난데, 내가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정신을 잃었었는데, 이제 좀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의 명함첩에는 국회의원들과 국회의원 보좌관, 기자들의 명함이 가득했다. 그가 지난 6월부터 아들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만방으로 찾아다니며 수집한 명함들이었다.

조 씨는 "아들이 처음 죽었을 때는 충격이 크고 아내가 우울증에 걸리는 등 경황이 없어 아들의 죽음을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조 씨는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해 되새겨 보니, 아들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조 씨는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갔는데, 회사는 유족의 확인과 동의도 없이 아들의 시신을 병원 영안실에 안치했고, 아들의 유품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 씨는 지난해 6월께부터 본격적으로 아들의 죽음을 알리려 뛰어다녔다. 그 와중에 아들처럼 죽은 사람이 여럿 있다는 점에 놀랐다고 한다. 조 씨는 "아들 사망 전후 6개월 동안 이와 유사한 사망 사건이 다섯 건이나 발생한 것은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며 국민고충처리위원회아 청와대 신문고, 노동부에 수차례 호소문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유족대책위원장까지 됐다.

기온이 떨어진 13일 낮. 건물 사이 골바람까지 매섭지만 조 씨는 굳게 잠긴 문을 바라보며 콘크리트 바닥을 뜨지 않았다. 그 사이 오후 1시가 넘어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동안에도 조 씨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 그대로였다.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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