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영화 <황산벌> 트집

"한국사의 가장 감동적 장면을 파괴한 非국민적, 反역사적 행태"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가 자신의 홈페이지인 ‘기자 조갑제의 세상’에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코미디영화 <황산벌>을 비판하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조 대표는 29일 사이트에 올린 <영화 황산벌의 반역사적 형태>라는 글에서 이 영화가 "한국사의 가장 비장하고 감동적인 장면을 파괴하고 이를 우스개로 만든 비(非)국민적, 반(反)역사적 행태"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사진1- 조갑제>

조 대표는 이 글에서 “우리 소년들은 관창을 통해서 애국과 희생을 배웠다. 1950년대의 우리 소년들은 비록 배가 고팠지만 관창과 계백의 기백과 용기와 희생정신에 가슴이 뛰었다. 그런 가슴이 1960년대에 지도자를 잘 만나 근대화의 선봉에 나섰던 것이다. 황산벌은 우리 민족이 곱게 가꾸어가야 하는 신화이고 전설이다. 그리스 신화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자기 역사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짓밟고 이로써 돈을 벌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견제하지 못하고 나무라지 못하는 나라는 자멸하기 쉽다”고 주장하며 영화 <황산벌>이 만들어지도록 내버려 둔 우리사회의 무너진 역사관(?)을 비판했다.

하지만 문제는 조 대표가 주장하듯 <황산벌>에 대한 영화계 및 대중들의 평가가 단순한 말장난만 난무하는 코미디가 아니라, 후반부로 갈수록 장기판의 ‘말’로 비유된 병졸들의 죽음을 통한 반전 메시지와 외세인 당 나라가 개입하여 이룩한 불완전한 통일을 비판하는 내용도 담고 있는 오락영화로서는 나름대로 주제의식도 지닌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조 대표는 또 이 글에서 “미국 영화가 워싱턴 대통령을, 링컨 대통령을 우스개 소재로 만든 것을 보았는가”라며 “역사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 어린 학생들의 머리를 혼란시킨 이 영화제작자들은 민족사적 범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 대표의 주장과는 달리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영화 <록키>에서 흑인권투 선수가 독립기념일에 장난삼아 분장한 모습으로까지 나온다. 링컨 또한 존 포드 감독의 <젊은 날의 링컨>에서는 의뢰인과 농담을 즐기는 급한 성격의 시골마을 변호사로 나오고, 팀 버튼 감독의 SF영화 <혹성탈출>에서는 ‘원숭이’로 까지 패러디 됐으며 그런 표현의 자유가 있었기에 미국 영화의 세계재패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사진2-황산벌>

이 글에서 조 대표는 황산벌 전투를 “일본 전국(戰國)시대 무사(武士) 이야기와 비슷한 분위기”라며 “한국 군사문화의 절정(絶頂)을 보여 준다. 그 이후의 한국사에서 실종된 무사도와 남성미의 현장감”이라고 표현해, 군사문화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 현업 시나리오 작가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지도 않고 상영저지한 전력이 있는 매체의 사장답게 영화 텍스트의 '오독'에도 탁월한 분"이라고 꼬집었다.

인터넷 신문 <대자보>는 조 대표 주장과 관련, “이는 관창과 화랑도가 통일의 주역이고, 그 정신은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와 연결되며, 그런 통일의 원동력인 충효사상과 애국심을 고취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런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갑제씨의 얼굴 너머로 그의 페르소나인 '박정희'와 월간조선의 사실상 모태인 조선일보의 이승만 '국부론'과 '신라정통론'이 겹쳐지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다음은 조갑제 사장의 글 ‘영화 황산벌의 反역사적 행태’ 전문

***영화 황산벌의 反역사적 행태**

'황산벌'이란 영화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흥분하는 이유가 있다. 저질 사투리, 욕설보다도 한국사의 가장 비장하고 감동적인 장면을 파괴하고 이를 우스개로 만든 이 영화의 非국민적, 反역사적 행태이다.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 우리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배웠다. 우리 소년들은 관창을 통해서 애국과 희생을 배웠다. 1950년대의 우리 소년들은 비록 배가 고팠지만 관창과 계백의 기백과 용기와 희생정신에 가슴이 뛰었다.

그런 가슴이 1960년대에 지도자를 잘 만나 근대화의 선봉에 나섰던 것이다. 황산벌은 우리 민족이 곱게 가꾸어가야 하는 신화이고 전설이다. 그리스 신화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자기 역사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짓밟고 이로써 돈을 벌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견제하지 못하고 나무라지 못하는 나라는 자멸하기 쉽다. 미국 영화가 워싱턴 대통령을, 링컨 대통령을 우스개 소재로 만든 것을 보았는가.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더 뜨거운 애국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 나라이다. 애국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을 업으로 삼아 이름을 내고 돈을 벌겠다는 사람보다 더 나쁜 이들인 이들에 영합하고 부추기는 세력이다. 正史에 따라 황산벌을 논한다.

<서기 660년 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은 황산벌에 도착하여 백제 장군 階伯(계백)의 5000 결사대와 대치했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三國史記에 실감 나게 적혀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많이 소개되어 있는 장면들이다. 6·25 전쟁 후의 195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우리 세대는 階伯, 官昌(관창)의 장렬한 죽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맛보았다. 아이들끼리 병정놀이를 할 때 『너는 階伯 장군, 나는 金庾信』式으로 별명을 붙여 일종의 연극을 하기도 했다.

기자는 당시 별명이 「階伯」이었다. 그런 별명을 갖고 나니 金庾信이 미워지고 백제軍을 동정하게 되어 주로 그런 성향의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金庾信을 「삼국통일로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평가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의 彼我감정이 퍽 오래 갔던 기억이 있다.

황산벌에서 일어난 장면들은 三國史記의 기록 덕분에 영화처럼 생생하게 想像(상상)할 수 있다. 소년기에 읽었던 플루타크 영웅전이나 三國志, 또는 일본 戰國시대 武士 이야기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황산벌 전투는 한국 군사문화의 絶頂(절정)을 보여 준다. 그 이후의 한국사에서 실종된 武士道와 男性美의 현장감이다.

階伯은 출정하기 전에 패배를 예감한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三國史記 列傳).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과 新羅의 大兵을 당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다. 내 妻子(처자)가 노비가 될까 두렵다』

그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출정했다. 황산벌에서 階伯의 결사대는 10배나 많은 신라軍을 네 차례 격퇴했다. 金庾信은 여기서 신라軍도 決死특공의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전 진덕여왕 시절 金庾信은 백제軍과 싸울 때 苦戰(고전)하자 충직한 부하 丕寧子(비령자)를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면서 부탁했다. 비령자는 『저를 알아 주시고 또 이런 일을 맡겨 주시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비령자는 아들 擧眞(거진)을 데리고 출전했는데 걱정이 되어 종 合節(합절)을 불러 부탁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반드시 따라 죽으려 할 것인데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거두어 돌아가 어머니를 위로해 다오』

비령자가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보고 아들도 뛰어들려고 했다. 종 합절이 말리니 거진은 칼로 합절의 팔을 친 다음 달려가 전사했다. 합절도 『상전이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무엇하랴』면서 뛰어들어 죽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본 신라軍이 분기탱천하여 일제히 돌격, 백제軍을 무찌르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階伯과 대결할 때 신라군 사령관 金庾信은 부사령관 둘을 데리고 있었다. 부사령관 金欽純은 金庾信의 동생이었다. 그는 아들 盤屈(반굴)을 불렀다.

『신하는 충성이 제일이고 자식은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忠孝를 다 완성하는 것이다』

반굴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다른 부사령관 品日(품일)은 아들 官昌을 데리고 출전했다. 品日도 아들을 백제軍으로 돌격시켰다. 階伯은 사로잡힌 관창의 갑옷을 벗겼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것을 보고는 살려보냈다. 관창은 신라軍으로 돌아와선 우물물을 들이켜 마시고는 다시 돌격을 감행하였다. 階伯은 생포한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아버지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붙들고 옷소매로 피를 씻으면서 말했다.

『내 아들의 面目(면목)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임금님의 일로 죽었으니 후회가 없을 것이다』

신라軍은 이 두 소년 장군의 죽음을 보고는 흥분하여 북을 두들기면서 진격하여 백제軍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金庾信의 조카가 되는 盤屈의 아들이 있었다. 金令胤이라고 했다. 문무왕 다음이 神文王인데 이때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명령을 받은 장군 金令胤은 출전할 때 아버지 盤屈의 명성을 의식했음직한 발언을 한다.

『나는 이번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악평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반란군과 대치할 때 金令胤의 동료 장수들은 『잠시 병력을 물렸다가 적이 피곤해진 뒤 공격하자』고 건의한다. 金令胤은 그 건의를 거부하고 즉시 돌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從者(종자)가 말렸다.

『장군들이 저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예봉을 거두고 틈을 보자는 것인데 장군님만 홀로 나아가려고 하니 안 될 일입니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列傳).

『싸움에 임하여서는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있어선 안 된다. 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衆意(중의)를 왜 따라야 하는가』

金令胤은 적진으로 쳐들어가 격투하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神文王은 비통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아비가 없었으면 그 아들도 없었을 것이다』

金令胤은 신라 사람들의 귀감이 된 아버지를 너무 의식하여 좀 무모한, 일종의 자살 공격을 했다는 것을 왕이 알았다는 느낌이 드는 말이다.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된 신라의 武士들은 忠孝를 일치시킨 도덕률을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고서 생활했다. 화랑도는 東아시아에서 나타난 최초의 장교양성 교육기관이다. 이들의 행동윤리는 臨戰無退(임전무퇴)로만 단순화되지는 않았다. 圓光 법사가 만든 화랑 5계에 의해 殺生有擇(살생유택)이란 인도적 배려가 따랐다. 반드시 이겨야 하되 쓸데없는 살육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가 3위1체로 통합된 것이 新羅武士 집단의 행동윤리이자 도덕률이었다. 화랑도의 대표인 風月主 출신이자 신라 무사도의 化身인 金庾信에게도 後日譚(후일담)이 있다.

그의 둘째 아들 元述(원술)은 唐軍과 싸우다가 패했다. 다른 장군들은 전사했고 그도 죽으려 했으나 보좌관이 말리는 바람에 살아서 돌아왔다. 金庾信은 자신이 죽인 수많은 신라의 젊은이들을 생각하였음인지 문무왕에게 원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왕은 그러나 『원술한테만 중죄를 물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원술은 시골로 도망해 있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나타나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면담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에게는 三從(삼종)의 義(의)가 있다.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원술 같은 자는 이미 남편의 자식 노릇을 못 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

원술은 그 뒤 對唐결전의 최대 승부처였던 매소천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이 정도의 非壯美와 감동이 있는 역사는 세계사를 들추어도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역사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 어린 학생들의 머리를 혼란시킨 이 영화제작자들은 민족사적 범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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