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가을,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

정치적 열정이 철학적 사유와 만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폭발적으로 분출한 대중의 정치적 열정은 누구에게나 놀라운 것이었다. 절차적 민주화가 정착된 후 정치적 무관심이 심화된 국면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 열정이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을 낳았다. 이렇게 탄생한 정권은 '참여'를 내세웠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지금도 온라인 공간은 항상 뜨겁다. 북한 핵실험, 정지영 아나운서의 대리번역 사건 등 사안에 상관없이 다양한 의견이 넘쳐난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 기사에 달린 수천 개의 댓글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것들은 무엇을 남겼나.
  
  의견은 쏟아지고 참여는 넘쳐나지만, 그 속에서 사회 공동체의 진로는 오히려 계속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방향으로 폭주하는 여론 속에서 용기 있고 진지한 목소리는 오히려 설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때 여론을 쫒아가는 이들, 그것을 주도하는 이들은 결코 악하지 않다. 오히려 선한 열정에 추동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속에서 진실은 종종 외면당한다. 지난해 말 우리 사회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황우석 사태'가 대표적인 경우다.
  
  최근의 북핵 국면도 마찬가지다. 사태를 너무나 손쉽게 규정한 뒤 한 방향으로만 몰아붙이는 여론이 서로 충돌하면서 합리적인 해법의 모색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사태를 놓고 어떤 이들은 과거와 달리 모든 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한마디씩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을 탓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언로가 닫힌 사회, 소수가 발언권을 독점한 사회의 폐해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이런 고민에 대해 힌트를 던져주는 철학자가 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그는 대중적 열정을 등에 업은 파시즘의 폭력에 계속 시달렸다. 유태인 여성이었던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국외자, 소수자이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록을 남겼다. '악의 화신' 아이히만이 실은 매우 평범한 소시민이더라는 것. 이런 주장으로 그는 유태인 사회에서 쫒겨났다. "유태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거스르는 목소리가 더욱 아쉬워진 지금, 그의 이런 면모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연인으로도 유명한 그의 이름은 한나 아렌트. 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시도한 바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적인 참여 정치를 꿈꿨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선한 동기를 가진' 시민들이 거침없이 쏟아내는 열정의 위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정치와 철학이 만나야 할 필요성에 대해 지적했다. "사적인 삶의 관심에서 해방되어 공적인 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 행위"인 정치 행위는 철학적 사유와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서만 입장이 다른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의 토대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이런 사상은 넘쳐나는 '참여'의 열정 속에서 우리 사회가 겪었던 혼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이런 이유로 서유경 경희사이버대 교수에게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것이 현 시점에 갖는 의미에 관한 글을 청했다. 아렌트의 정치 사상을 전공한 서 교수는 지난 14일 열린 한나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한 바 있다. 다음은 서 교수의 기고문이다. <편집자>
  
  시민단체의 제도권 진출을 보며, 아렌트를 만나다
  
  1996년 가을이었다. 당시 박사과정에 있던 나는 '현대정치철학'이라는 강의을 듣고 있었다. 푸코, 하버마스, 가다머, 롤즈, 료타르, 데리다, 아렌트의 저서들을 두루 읽게 된 것도 그때였다. 맨 처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란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직감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다수성(plurality)', 즉 '세계 속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조건'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굴레)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벼운 마음으로 <인간의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한 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바다 한 가운데 턱 버티고 있는 홉스의 웅장한 리바이어던의 흉상, 바로 그것이 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헤겔, 맑스, 후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구 철학 2500년 역사의 광활한 대지 위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내게 놀라움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지적 충격 속에서 나는 아렌트 사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후, 민선 2기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접어들었다. 문민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리 시민단체 인사들을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상에 부응하기 위해 정치학자들은 그때까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시민'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주목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아렌트는 소수의 대표자가 국정을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고대 폴리스에서 행해졌던 방식의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치를 복원하자고 제안하는 정치이론가였다. 아렌트가 주창하는 시민 주도의 참여민주주의 패러다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10년 뒤, 아렌트를 향해 고조된 관심…이유는?
  
  90년대 중반, 당시까지만 해도 하버마스는 잘 알아도 아렌트는 모른다는 것이 학계와 일반의 반응이었다. 물론 하버마스가 이미 70년대 중반에 자신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원출처가 아렌트의 정치행위 모델이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 때 나는 아렌트를 통해 우리 사회 내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지형의 이론적 타당성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었고, 3년 뒤 그것을 아렌트의 정치적 실존주의 맥락에서 '정치행위와 인간실존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거치며 우리 학계에 나처럼 전문적으로 아렌트를 연구하는 '아렌티안(Arendtian)'들의 수가 제법 늘어났다. 그 덕분에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 대부분이 번역 출간되었고 관련 논문들도 꾸준히 발표돼 왔다. 이런 연구 성과의 축적에 힘입어서인지, 요즘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근래 크고 작은 신문과 잡지의 칼럼이나 기사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경우가 부쩍 잦아진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예로 지난 14일 경희대에서 "한나 아렌트와 Amor Mundi(세계사랑)"라는 제하에 열린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도 예상 밖으로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던 '인문학의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 왜 우리 한국인들이 아렌트 사상에 그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연인, 그리고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간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본명은 Johannah Arendt로 1906년 10월 14일 프러시아 영토인 하노버의 유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장했는데 그곳은 칸트가 태어나서 평생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렌트는 16세에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정도로 철학적 소양이 뛰어난 매우 명석하고 지적인 소녀였다.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 마르부르크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 것은 당시 철학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하이데거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곳에서 아렌트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듬해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동의 하에 프라이부르크로 떠난다. 그곳에서 후설에게 반년에 걸쳐 현상학을 배운 다음, 다시 하이데거의 친구인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그의 지도 하에 1929년 <사랑 개념과 성 어거스틴>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동급생이자 유태인 저널리스트인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여 베를린의 한 신문사에서 서평 담당기자로 일한다.
  
  그러던 중 1933년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유태인 핍박이 시작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한 유태계 기관에서 일하는 한편, 발터 벤야민, 레이몽 아롱 등과 친교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던 슈테른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역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독일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한다. 그들은 1970년 블뤼허가 사망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서로에게 지적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이어 비시정부가 더 이상 자국 내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자 미국행을 결심한다. 1941년 미국에 도착한 아렌트는 뉴욕에 정착한 뒤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시민으로 살았다. 그는 유태계 잡지사 편집장을 거쳐, 시카고, 버클리, 프린스턴, 뉴스쿨 등의 대학의 정치학과와 철학과에서 강의했다. 생전에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고, 특히 기성의 틀을 깨는 급진적인 주장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아렌트는 인류에 대한 지적 공헌을 인정받아 1959년 레싱상, 1967년 프로이트상, 1975년 소니그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2년에서 197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앙리 베르그송, 가브리엘 마르셀, 레이몽 아롱과 같은 세기의 지성들이 초빙되었던 철학계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아버딘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연의 최초의 여성 연사로, 그것도 두 번 연속해서 초빙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탈근대 사회 이론의 한계가 '아렌트 르네상스'를 불렀다
  
  이처럼 확고한 사회적 지위와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렌트는 늘 '국외자'였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학계에 불어 닥친 아렌트 재해석 열풍과 더불어 화려한 부활을 하기까지는 그랬다.
  
  이른바 '아렌트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이런 아렌트 사상의 부활 현상에 기폭제가 된 것은 동유럽 시민사회의 태동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 구소련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한 후 각기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공동체 운영 실험에 돌입했다. 오랜 기간 유지했던 사회주의 국가통제 체제가 하루아침에 시민들이 세운 민선체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됐고, 그런 그들에게 정치이론가로서 한나 아렌트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아렌트 사상이 부활하게 된 이유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유행한 탈근대적 사회이론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 때문이었다.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한계 말이다.
  
  예컨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해체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해체가 기존 체제의 비판을 넘어서는 게 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무정란(無精卵)에 불과한 이론이 될 것이다.
  
  반면 아렌트의 정치행위 이론과 판단행위 이론은 시민들 각자의 행위와 정치적 결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게 보이는 탈근대 사회이론과 차별화되었다. 이 점이 바로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1972년 한 학회에서 "당신의 정체가 뭐요?"라고 현실주의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아렌트는 "좌익은 나를 보수주의자라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때때로 나를 좌익이라고 하거나 이단자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그것 말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아렌트를 '반정초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서구 철학전통 속에 나타난 어느 학파로도 분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아렌트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명해야 한다면 그는 첫 번째 '아렌트주의자'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시민이 정치에서 소외된 사회는 언제든 전체주의화된다
  
  아렌트 사상의 대가 다나 빌라는 "아렌트의 사유 방주(方舟)는 정치악의 문제를 규명하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로 시작하여 우리가 이런 현상들을 다룰 때 의존하는 정신기능들의 탐색으로 끝나고 있다"고 논평한다. 사실 철학도였던 아렌트는 1930년대 유럽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현실정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정치이론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 복원과 공적 행복을 주창하였고, 70년 중반 사유(思惟)의 정치적 의미를 밝힌 정치철학자로서 삶을 마치게 된다.
  
  무명의 독일-유태계 망명 지식인 아렌트가 미국 학계에서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그의 첫 번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의 출간 이후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 군국주의라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때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책이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아렌트는 냉전의 반공 이데올로기 기류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전체주의 분석을 단순한 전체주의 체제 비판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아렌트는 나치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의 무고한 생명 대학살을 서구 역사 속에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반유태주의나 민족주의의 잔재로 간단히 치부할 수만은 없으며, 그러한 체제들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형태"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전체주의 체제는 체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하나의 집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시민 개개인의 개별성을 그 아래 복속시킨다. 그들은 개별 시민들 사이의 모든 대화 장치들을 분쇄함으로써 정권의 공식 대화채널만이 작동하도록 하며, 이에 저항하는 자들은 테러로 응징하는 이중의 통치방식으로 체제를 운영한다. 결국 시민들은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연장선 상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사회 역시 이런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우선 대중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 대다수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사적인 영역에서 상품의 소비와 향락산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또한 국가의 근대화된 행정체계는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규율하는, 미셸 푸코의 표현인 '파놉티콘'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국가의 시민은 전체주의 사회 내에서 못지않게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인 것이다.
  
  정치와 철학이 결합해야 할 이유를 찾는여정…<인간의 조건>에서 <정신의 삶>까지
  
  이런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행위론을 정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렌트는 여기서 인간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본래 '정치적 존재(zoon politikon)', 즉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찾아낸다. 폴리스에서 자유인, 즉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동료 시민들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대소사를 함께 심의하고 결정했다. 요컨대 그들은 이러한 '정치행위'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삶과 별개로 시민으로서의 공적인 행복을 향유했던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고대 폴리스라는 직접 민주주의의 정치무대를 배경에 깔고 자신의 독특한 정치행위 개념을 제시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정치행위는 유일하게 사물 또는 물질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다. 이 정의에서 방점은 '언어'와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에 주어져 있다. 바꿔 말해서 아렌트의 정치행위는 사적인 삶의 관심에서 해방되어 공적인 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 행위를 뜻한다. 나중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아렌트의 정치행위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상적 담론상황"과 의사소통적 행위론,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 이론을 구축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인간의 조건> 이후 정치이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아렌트에게 또 한 번의 학문적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는 1961년 <뉴요커>의 특파원 신분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되며, 1963년 자신이 재판정에서 본 것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자신이 만난 아이히만이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시 유태인 사회 내에서 하나의 필화사건으로 전화한다. 결국 아렌트는 유태인 사회로부터 "유태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로서 파문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히만의 경우를 통해 사유의 결여가 곧 악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얻게 된다.
  
  아렌트의 유작 <정신의 삶>은 바로 이 때 얻은 확신을 논증하는 정치철학적 저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의 사유행위와 정치행위의 연계성을 밝힐 목적에서 우리의 정신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현상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이 사유작용(thinking), 의지작용(willing), 판단작용(judging)의 세 가지 기능을 분리하여 수행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사유작용은 의지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사양을 제공해주고, 판단작용은 의지작용의 과정에서 선택된 것의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개별 행위자가 주관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렌트의 논점은 개인의 사유행위는 보편타당한 정치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그는 이런 설명 방식을 통해 '사유의 정치적 중요성'을 적시하는 한편, 서구 지성사에서 소크라테스 이래로 분리되었던 정치와 철학이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2006년 한국사회, 아렌트의 메시지…행동에 앞선 사유, 더불어 살기 위한 조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의 사상은 시기별로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이는 아렌트의 학문여정이 철학, 정치학, 정치철학으로 세 번의 전환을 하면서, 주장의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점에 기인한다.
  
  1996년 당시 내가 처음 아렌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정치학적 주장들에 주목했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그의 정치행위 개념에 담긴 시민정치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혁명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시민사회는 매우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했다. 우리 시민들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무력한 대중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시민 정치는 때로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번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 사이에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만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행태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이제 아렌트의 '정치학' 이론보다는 '정치철학'적 지혜에 주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무책임한 범죄행위는 그의 사유행위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평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늘 아렌트는 우리에게 행동하기에 앞서 사유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속에서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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