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은 '크게 옳은' 말들을 하고 있다"

<기고> "이제 1987년이 아니라 1948년으로 돌아가라"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아무리 지역구도의 타파가 중요하기로서니, 선거제도의 개혁을 간절히 열망하기로서니 대통령직을 거기다 걸어버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평소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역시 말을 가볍게 하는 대통령이고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대통령이고 대통령 자격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고 야단이다.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을 아끼는 사람들까지 걱정이 되어서 말리는 분위기다.

***지역구도 타파는 대통령직 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우선 노무현 대통령의 이 지긋지긋한 '지역구도'에 대한 인식에서 다소의 착오가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지역구도는 한국정치의 낙후함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다. 과연 보수정당들끼리 본질적인 의미에서 큰 차이가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편을 갈라 정권을 다툴 것인가? 하다못해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만큼이라도 이념적, 정책적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라는 대차 없는 정치철학이라도 제대로 분별 정립되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지역구도로, 그리고 인물 위주로 정치가 이뤄져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역구도로 인해 한국정치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 정치가 낙후하기 때문에 지역구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구도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것을 타파해내지 못하더라도 한국의 보수 정치가 미국식의 보수 양당 체제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서서히 극복되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동조하지 않는 보수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전망인 것이다. 맹형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제안한 '반노우국(反盧憂國)의 정치연합'은 한나라당 중심의 보수 대연합이니 그러한 구상이 실현된다면 우리나라 정치는 미국식 정치구도로 한발 다가가게 될 것이다.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지역구도에 더욱 큰, 격렬한 고통을 느끼고 있지만 한국 정치를 현대화하면서 결국에는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실현하고자 분투노력하고 있는 유럽식의 정치구도가 실현된다면 지역구도는 보다 빨리, 보다 근본적으로 극복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의 성장, 그 자체야말로 지역구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고 가장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대연정은 '크게 훌륭한' 제안이다**

미국식 자유주의/보수주의의 대립구도든지 유럽식 사회주의/자유주의(보수주의)의 대립구도든지 무언가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하면 지역구도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과 정책이 비슷한 정당끼리 정치연합이나 연정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맹형규 의원의 제안도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제안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더 크고 훌륭한 것이다. 바로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바라는 유럽식 사회주의/자유주의(보수주의)의 대립구도를 앞당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하는 말 중에는 '크게 옳은' 말들이 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차이는 개혁의 속도 차이, 상대적 차이이지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다." 역시 노무현이다. 그의 순수한 영혼만이 벌거벗은 임금님의 알몸뚱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 미래 한국의 모습, 통일 한국의 모습은 동일하다. 그 두 정당은 아름다운 미국을 모델로 하고 깔끔한 일본을 현실적인 목표로 해서 정상적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리고 민주당, 자민련, 중부권 신당이 모두 완전히 동일하다. 대한민국의 그 모든 정당들은 모두 함께 한 목소리로 '개혁'을 외친다.

때때로 몸싸움을 벌이고 막말을 주고 받아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큰 차이가 없다. 국민들이 보수정당들의 싸움질을 매우 싫어하는 이유는 그 싸움이 국민의 생활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국민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면 싸움질 그 자체를 싫어하겠는가? 결단코 아니다.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유럽을 모델로 하여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한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어떻게 쓰여 있든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그렇게 알려지고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의석 10석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때때로 거대 여당에 근접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통일한국이 지향해야 할 나라로서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들고 있는 국민의 45%와 민주노동당 지지율 15% 간의 격차는 좀 크지만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소선거구제는 정치개혁의 큰 걸림돌**

지역구도와 소선거구제의 관계는 어떠한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소선거구제는 지역구도와 깊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실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소선거구제의 타파 없이도 지역구도의 타파가 가능하다는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소선거구제가 지역구도 타파를 힘들게 하는 조건이지만 지역구도의 원인은 아닌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소선거구제를 가지고서도 현대적 정책정당 체제를 발달시켜 왔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말하자면, 우리나라 정치에는 지역구도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정치를 하는 보다 중요한 동기가 이상이나 사상의 실현이 아니라 개인적 출세욕이라는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개인 사업'이다. 그리고 소선거구제는 지역구도만이 아니라 더 뿌리 깊게는 정치가 '개인 사업'이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낙후한 전근대적 정치문화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란 '꿈'을 가진 정치지망생이 자신의 명예욕,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 벌이는 투기사업이다. 물론 그러한 전근대적 정치문화 역시 소선거구제 하에서라도 필연코 현대화되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희생과 시간을 요구하고, 한국 사회의 발전과는 시차가 너무 크게 날 것이다. 그래서 소선거구제 타파는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정치개혁을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이다.

소선거구제를 타파하면 우리나라 정치의 현대화가 훨씬 빨리 진행될 것이 틀림없다. 대선거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그 해법이다. 일찍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했던, 광역시도를 하나의 선거구로 하여 각 정당이 후보의 리스트(정당명부)를 제출하고 유권자는 정당을 대상으로 한 표를 던지는 방식으로 바꾼다면 한국의 정치문화는 뿌리에서부터 뒤집어질 것이다.

혹여 소선거구제에 미련과 기득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반대해 절충을 할 수밖에 없다면, 대선거구제를 기본으로 소선거구제적 요소를 혼합한 독일식의 선거제도라도 합의 채택하면 곧바로 엄청난 변화가 초래될 것이다. 그래서 소선거구제를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운동으로 전개돼야 한다. '소선거구제 반대 국민운동'이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1948년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라**

노무현 대통령은 1987년이라는 민주화가 시작된 시점에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다. 그리고 15년간의 민주화 과도기를 나름대로 열심히 이편저편에 가담해 진지하게 다투고 온몸으로 투쟁하면서 - 심지어 정치 입문 최초에는 백기완 편을 들어 '비판적 지지론자' 이해찬과 논쟁한 적도 있다 - 정치를 해 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대통령이라는 정점에서 한국정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보수정치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것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정직한 한 인간으로서 1987년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1948년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더 길게 크게 역사를 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비장한 수사는 고쳐져야 한다.

"노무현 시대가 새 시대의 출발이 아니고 구시대의 마감이 되어야 한다." 그의 말에는 대선 승리에 이은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가 바라던 새로운 정치를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깊게 묻어난다. 아직도 3김 정치, 3김 없는 3김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만큼 깊이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1987년 이후의 한국 정치를 3김 정치로, 지역구도로 파악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시대를 '민주화 과도기'로 파악한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화 과도기가 끝났다고 본다. 이제 우리나라는 '정상적 국민국가'의 문턱에 서 있다. 그래서 노무현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다. 아니 민주화 과도기를 벗어나서 통일된 정상적 국민국가 건설의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대권주자 김근태 장관이 참여하여 그야말로 '야심적으로' 복지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는 이 변화는 한국이 OECD 평균의 복지국가, 오늘날의 글로벌 스탠다드의 국민국가로 가고 있는 의미심장한 변화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경쟁자 정동영 장관 역시 통일로 가는 길에 무언가 가시적 성과를 남기고자 애쓰고 있지만, 역사의 큰 흐름 속에 통일된 정상적 국민국가 건설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나라는 소수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꿈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글로벌 스탠다드이기도 하다. 흡사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매우 진보적인 헌법, 당시의 어법으로 말하면 '진보적 민주주의' 헌법에 담긴 내용들이 1948년 그 시점의 글로벌 스탠다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민주노동당이 그리고 있는 '선진 복지국가'의 상은 통일한국을 건설하는 이 시점의 글로벌 스탠다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외의 압력은 큰 힘으로 작용하여 우리나라의 사회진보를 가속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 구도 타파와 선거구제 개편의 메시아적 소명 의식을 벗어던져도 국민들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 짐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지역구도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넘어서지 못할 장벽이 아니고, 노무현만이 몸을 던져 돌파할 수 있는 장애는 더더욱 아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