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드라마틱한 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꽃은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극적이며 지혜로운 해법이다. 예를 들어 카트리나 재난을 미리 암시한 '투머로우'라는 영화에서 경찰 및 다수 시민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아버지만을 믿고 고립된 도서관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쿠바 미사일 위기 스토리에서도 후대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케네디 형제의 탁월한 해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트롤로프의 수'라는 지혜다. 이는 앤서니 트롤로프라는 영국의 소설가 이름을 딴 이 개념으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모순된 응답 중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대답만 수용하곤 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이 개념은 국제외교에서 상대방의 모호하고 때로는 모순된 응답 가운데 자기에게 편리한 내용만 수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널리 사용되게 된다.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클라이맥스에서 케네디가 후르시초프로부터 배달된 두 가지 다른 제안의 편지 중에서 2차 편지를 무시하고 1차 편지에 응답하기로 결정한 것을 가리키는 데에 이 개념이 사용되곤 한다. 위기 해결 이후 이후 이 해법은 미사일 위기를 결정적으로 해소한 탁월한 지혜의 결정판으로 알려지며 그야말로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 뒤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위기에서의 지혜로운 해법의 대명사처럼 이 에피소드를 인용하곤 한다. 한국에서도 이 해법은 매우 잘못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2005년 9월 14일 경향신문의 한 컬럼은 트롤로프의 수를 극찬하면서 6자회담의 교훈을 도출하고 있다. 하지만 후에 밝혀진 미국과 소련의 비밀 문서에 따르면 이 트롤로프의 수는 허구적으로 존재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이 트롤로프의 수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간은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한복판인 62년 10월 26일 금요일 아침 소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바에 미사일을 반입한 후 미국의 양보를 애타게 기다리던 후르시초프는 이날 아침 더 이상 시간이 자기편이 아님을 깨닫는다. 전날 그의 미국 내 스파이는 워싱턴 내 바에서의 미국 기자들의 침공 임박에 대한 대화를 엿듣고 이를 급히 소련 당국에 타전한 바 있다. 비록 기자들의 이야기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었지만 이 소식을 접한 소련 당국의 위기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더구나 미 국방부는 이미 데프콘2를 발령했고 심지어 병원들에 사상자 운송에 대비하라는 지침까지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따라서 후르시초프는 단지 미국의 불가침 선언만을 조건으로 요구하며 완전한 굴복을 선언하는 장문의 편지를 급히 작성하기 시작했다.
후르시초프는 이 편지에서 종래 그가 비엔나 정상회의에서부터 거칠게 반복하던 핵공갈의 뉘앙스 대신 매우 신중한 레토릭을 구사한다. 심지어 그는 편지 모두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패배를 자인하고 있다 (May and Zelikow 1997, 490)
"우리의 쿠바에서의 어떠한 방법들이건 간에 이를 공격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는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 문제로) 언쟁하지는 맙시다. 이 점에서 내가 당신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니까 말이요…."
전쟁의 화약 냄새를 맡은 후르시초프의 강한 위기의식은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문구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ibid., 490).
"우리나 당신네들은 전쟁의 매듭을 묶은 로프의 끝자락을 잡아당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둘 다 더 잡아당길 경우 매듭은 더 조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인 27일 토요일 후르시초프의 심경에 약간의 변화가 온다. 미국의 임박한 침공 가능성에 놀라, 추가 양보 가능성을 챙길 틈도 없이 급하게 편지를 케네디에게 보냈던 후르시초프는 이 날 '전쟁의 로프'가 느슨해졌다는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임박한 침공 경보는 과거 수차례 그랬듯이 양치기 소년의 외침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간의 심리적 여유가 생긴 후르시초프가 추가적인 떡고물을 다시 '찾아보려고' 시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한 후르시초프는 이전에 1차 편지에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와 미국의 터키 미사일 철수 맞거래를 포함시킬 것을 측근인 그로미코가 제안했을 때 자신이 단호하게 거부한 내용에 새롭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터키 거래 아이디어를 첨가한 2차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위기의 마지막 국면에서 내용의 초점이 다른 두 편지를 놓고 케네디 행정부를 퍼즐에 빠지게 했던 그 유명한 에피소드의 막이 서서히 오르는 순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날 아침 10시에 백악관은 후르시초프가 지난 밤에 보낸 1차 편지를 놓고 중요한 전략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당일 오후 2차례에 걸친 공중 정찰을 제안하던 중에 케네디는 방금 건네받은 자료를 소리 내어 읽으며 모두를 경악하게 한다. 그 자료는 바로 터키 맞거래를 제안한 후르시초프가 쓴 2차 편지가 모스크바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것을 기록한 것이었다.
귀를 의심케하는 새로운 내용에 너무나도 당황한 케네디 행정부는 간밤에 1차편지의 자구 하나하나를 꼼꼼히 검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혹시 편지 내용을 누락하여 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며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볼 정도였다. 어처구니 없어 하는 맥나마라는 "도대체 우리가 응답할 기회도 주기 전에 타협안 내용을 바꾸고, 또 우리가 수용하기도 전에 공개적으로 타협안을 발표하는 작자들과 어떻게 협상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하고 있다 (May and Zelikow 1997, 509). 번디 국가안보 보좌관은 한발 더 나아가 모스크바에서 군부 강경파들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더구나 케네디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후르시초프가 제안 내용을 라디오를 통해 공개적으로 발표해버렸다는 점이다. 미국의 동맹국인 터키에 배치한 미사일의 철수가 거래에 포함되면 이는 미국을 공개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비록 이는 노후한 미사일이고 미국은 이미 폴라리스 잠수함이란 보다 월등한 무기를 배치하기로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미국이 국익을 위해 터키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공개적 발표를 통해 미국의 도발적 행동을 억제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으로 하여금 타협안을 덥석 수용하기 어렵게 만든 셈이다.
케네디는 바로 이러한 역설 때문에 후르시초프의 행동을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소련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자 한 톰슨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그의 퍼즐을 묻고 있다 (ibid., 1997, 513).
"그들이 진심이라면 왜 사적인 채널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이토록 끝도 없이 계속되는 오인의 연쇄 반응 속에서 이날 오후 드디어 위험천만한 인화물질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 U-2 정찰기가 격추된 것이다. 누구도 이에 대한 보복 행위를 반대할 수 없는 강경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공교로운 것은 그 격추 시점이다. 바로 후르시초프의 2차 편지 내용이 소련 내 강경 쿠데타를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상황에서 이 격추는 불길한 징후였다. 이러한 급박한 정황 속에서 쿠바 섬 현지의 소련군 행동을 당국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잘 생각되지 않았다.
일단 케네디는 보복 여부를 다음날 아침 결정하기로 하고 강경한 분위기를 잠시 진정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안보회의의 많은 참석자들 모르게 추진하고 있는 마지막 카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특사로 한 마지막 극적 타협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날 오후 7시 15분 소련 대사관에 전화해 도브리닌 대사와 마지막 밀사회담을 제안했다. 도브리닌을 만난 로버트 케네디는 "만약 우리가 응사를 시작하면 멈추기 매우 어려운 연쇄반응이 시작될 것이다"고 심각하게 경고했다 (Fursenko and Naftali 1997, 282). 물론 도브리닌도 사태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버트 케네디가 약속하는 미국의 불가침 선언은 그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국이 후르시초프의 1차 편지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것이다.
이어 로버트 케네디는 2차 편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응답하기 시작했다. 단 2차 편지가 언급한 터키 맞거래 문제에서 미국 측의 최종 입장을 분명히 통보했다. 즉 거래는 할 수 있되 이는 반드시 위기 해소 후 몇 달 이내이며 비밀리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측으로서는 이 타결이 쿠바와 터키를 맞바꾸는 뉘앙스를 결코 띄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이는 겉으로는 상응하는 거래가 아니면서 실제로는 거래인 매우 미묘한 타결이 되어야 하는 셈이었다. 케네디는 회담을 종결하며 일요일까지 회답을 바란다고 못 박으며 이러한 미국 입장이 "요구 사항이지 (…) 최후통첩은 아닙니다"(a request … not an ultimatum)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ibid., 281). 아마 케네디는 미국이 마치 공습 직전 최후통첩을 내리는 것으로 소련이 오인하는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케네디는 2차 편지를 무시하고 1차 편지에 응답하기로 지혜롭게 결정했다는 트롤로프 신화와 달리 1차 편지에 응답하면서도 동시에 후르시초프의 2차 편지의 핵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셈이다. 왜냐하면 케네디는 1차 편지의 핵심인 불가침 선언 요구를 수용했으며 2차 편지의 핵심인 터키 맞교환을 수정하여 수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후르시초프의 1,2차를 종합한 제3의 창조적 해법을 제시한 셈이다.
이러한 케네디의 지혜와 '전쟁의 매듭을 묶은 로프'를 잡아당기지 않은 후르시초프의 신중함이 함께 만들어낸 외교의 성공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미사일 위기에서 배워야 할 것은 허구로만 존재하는 트롤로프의 수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창조적 해법과 신중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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