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노자를 만났을 때, 사랑의 철학이 완성된다!

[프레시안 books] 김흥호의 <노자ㆍ노자익 강해>

사랑과 생명의 철학, <노자>

김흥호 선생님의 <노자·노자익 강해>(사색 펴냄)를 펼치면 그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마주하게 된다.

노자는 사랑의 철학이다. 모든 만물을 살리면서 자기는 없어져버리는 사랑의 철학이다. 노자 81장 모두 사랑의 표현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대표적이다. 노자의 도는 사랑이란 말이다. 사랑은 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주고주고 자기는 숨어버리는 에르아이그니스의 세계다.(7쪽)

노자는 기독교에 가장 가까운 철학이다. 사랑은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데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다. 없이 계신 하나님, 그것이 사랑이다.(8쪽)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사랑이기에 나도 사랑이다. 노자가 찾은 것은 하나님뿐이요 사랑뿐이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도다.(9쪽)

길은 한없이 긴 영원한 생명이다. 끊어지면 길이 아니다. 다리라도 놓아 이어져야 길이다. 길은 영원한 생명의 표현이다. 노자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이다. 물이 만물을 살리듯이 계속 살릴 뿐 물은 끊어지는 법이 없다. 사랑이기 때문이다.(9쪽)

아마도 <노자>를 전공한 학자라면, 혹은 <노자>의 철학에 관해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저자의 말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노자는 기독교에 가장 가까운 철학"이라는 저자의 단언적인 표현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익숙하게 들리는 표현일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상식'이나 '객관적 이해'라는 말은 사라진다.

지금 이 책의 서평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함석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노자가 사랑의 철학이라거나 기독교와 가까운 철학이라는 표현을 보면, 난색을 짓고 매우 황당해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노자>를 기독교와 유사한 철학이라고 하거나 사랑과 생명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노자>의 원문(原文)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20세기의 복잡하고도 난해한 한국인의 심성의 삶을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역사' 속의 <노자>, '현실' 속의 <노자>

▲ <노자·노자익 강해>(김흥호 지음, 사색 펴냄). ⓒ사색
우리가 흔히 쓰는 '역사'라는 말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들의 총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의미로 쓰이는 '역사' 라는 말이 '현실'과 꼭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대학의 교양이나 전공 강의를 통해 <노자>를 처음 접한 사람이나, 고등학교 교과서적인 상식에 입각해 있는 사람이 알고 있는 '노자'와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노자' 사이의 격차는 그런 '역사'와 '현실'의 괴리를 반영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역사'란 객관적 사실들의 세계이고, 이러한 사실과 사건들은 인과론의 사슬로 엮어져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를 철학사의 상식으로 보면 이런 식의 서술이 가능하다. 사회가 붕괴되면서 사람이 서로를 죽이는 난세(亂世)가 되자, 인간성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예의와 도덕을 되살릴 것을 강조하는 유가(儒家) 사상이 발흥하게 되고, 다시 이러한 예의와 도덕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누르고 억압하게 되자 인간에 대한 억압과 강요를 하는 문명을 벗어나자는 도가(道家)의 자연주의 사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식의 서술 말이다.

그래서 고대의 현인 노자에게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공자는 도덕적 삶(仁)을 강조하는 사상을 제시했고, 유가 사상은 이를 이어받은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계승 발전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이 갖는 억압성과 인위성을 비판하면서 장자(莊子)와 같은 도가 사상이 등장하여 개체의 생명과 삶을 옹호하면서, 제도와 도덕의 비인간성과 자연스런 삶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아주 나이브하게 묘사하면 통속적인 철학사가 보여주는 내러티브는 이런 식이다. 어쩌면 이것이 철학사가 말하는 '역사'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서술은 모두 20세기에 지어진 철학사의 픽션(fiction)이지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자도 맹자도 순자도 노자도 장자도, 모두 자신들이 마주했던 현실, 그 텍스트가 이루어지던 '현실'에 대한 응답이었지, 공자로부터 맹자와 순자로, 노자로부터 장자에서 열자(列子)까지 어떤 이론적인 발전을 위해 이루어진 노력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오히려 종종 현실에 위배된다.

나는 적당한 서평자인가?

자, 그렇다면 우리가 공동으로 함께 하고 있는 현실을 다시 재구성해 보자. <노자·노자익 강해>는, 제목으로 보면 <노자>라는 책의 내용을 강의한 것을 내용으로 하는 책이다. 당연히 <노자>하면 대학에서 <노자>로 학위를 한 전문적인 학자가 검토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비판적 시각에서 평가를 요청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일 것이다.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라는 책의 서평이 내게 온 것은 아마도 이런 상식의 작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의 적절한 서평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아직은 부족하다. 다만 왜 부족한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있겠다. (아마도 담당 기자가 여기까지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에 대한 적절한 서평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저자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1919. 2. 26-2012. 12.5)는 1948년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양명학을 접하게 되고 같은 해에 유영모 선생을 만나 근원적인 문제에 몰두하여 주역, 노자 등 동양철학에 매진했다. 1954년 3월 17일 깨달음을 얻고, 스승 유영모로부터 현재鉉齋라는 호를 받았다. 현재는 계시라는 뜻이다. 이 깨달음 후에 그는 더욱 정진하여 일식一食·일좌一座·일인一仁·일언一言의 실천생활을 시작했다.
동시에 유교 3년, 불교 3년, 노장사상 3년, 기독교 3년이라는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독파해 나갔다. 불교를 공부할 때는 참선을 같이 했다. 그는 1954년 9월부터 평생 일식을 하면서 진리의 체득과 실천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이러한 행의 하나로 고전 강독을 45년간 해온 것이다. 이 책은 그 강독 중의 하나다.(20쪽)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저자 김흥호 선생님은 씨알 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다석 유영모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이다. 이는 한국의 대학에서 이루어져 온 <노자>와 <장자>에 대한 철학사적, 철학적 이해의 길과는 다른 한국의 20세기라는 독특한 현실 속에서 그의 학문과 사색이 이루어져 온 것임을 보여준다. 다만 함석헌 선생님이 재야(在野)에서 활동하였다면 그는 대학에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서평자인 나는 이러한 <노자> 이해의 길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학의 강단과 기존 학계와는 다른, 20세기 한국인의 삶에서 하나의 거대한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노자·노자익 강해>에 대해 적절한 서평을 쓸 만한 준비가 된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노자>와 기독교의 만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의 서평을 맡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석 유영모의 <노자> 풀이를 엮어 낸 박영호 선생님의 서문을 여기에 옮겨 본다.

류영모는 일생동안 <노자>를 가까이 두고 읽었다. 류영모는 서울 YMCA 강좌에서도 <노자>를 강의하였다. 정통 신앙인들만 모인 김교신(金敎臣)의 성서집회에 초청되어 가서는 성경 얘기는 두고 <노자>를 말하여 듣는 이들이 당황하였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 없고 세계적으로도 류영모만큼 <노자>를 깊이 새기고 널리 알린 이는 드물 것이다. 류영모의 <노자> 얘기를 들은 이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함석헌, 김흥호에 이르기까지 몇 만 명이 넘을 것이다. <노자>가 이 나라에 처음 들어 온 고구려 이래 <노자> 사상을 중흥시키는 데 으뜸가는 이가 류영모일 것이다.(<노자, 빛으로 쓴 얼의 노래>(박영호 역저, 두레 펴냄) '머리말' 중에서)

이 글에 따르면 유영모는 김흥호와 함석헌을 비롯 수많은 한국의 20세기 사상가들에게 <노자>를 알린 중요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글에서 거명된 이름들의 무게만 고려한다 해도, 이 흐름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유영모는 <노자>를 강조한 것일까? 다석은 그의 어록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유교, 불교, 기독교를 서로 비추어 보아야 서로서로가 뭔가 좀 알 수 있게 된다."

▲ <노자, 빛으로 쓴 얼의 노래>(박영호 역저, 두레 펴냄). ⓒ두레
김교신을 비롯 함석헌은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신앙을 함께 하는 한국 기독교의 한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훙호 역시 미국에 유학하여 종교사를 공부했고 감리교회 목사 안수까지 받은 기독교인이다. 그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목을 역임하고 퇴임 후 다시 감리교신학대에서 오랫동안 종교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나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독교와 <노자>의 만남, 예수와 노자의 만남을 본다. 유교가 지난 1000년이 넘도록 이단(異端)으로 낙인찍어 온 사상이, 유교보다도 더 강력하게 정통과 이단을 구분 짓는 성격을 지닌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만남'이 가능했던 것일까? 나는 이 책이 갖는 커다란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를 연구하는 모임에서 유영모가 <노자>를 강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함석헌과 김흥호는 모두 <노자>를 강의하였다. 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조선 유학과 <노자>

우리가 이런 기이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노자익 강해>의 독특한 내용상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노자·노자익 강해>라는 제목은 매우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다. 먼저 책은 <노자·노자익 강해>라는 제목을 걸고 있는데, 그 밑에는 "교재 노자권재구의"라는 말이 달려 있다. 이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책의 일러두기(15쪽)에 보면, 이런 지침이 실려 있다.

"이 책의 구성은 교재 <노자권재구의>에 대한 저자의 해석, 그리고 저자가 발췌한 <노자익>(초횡)에 나오는 주해들 및 기타 자료들에 대한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이 책이 가진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는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위(魏)의 왕필(王弼)이 주석한 <노자>가 아니라 남송(南宋) 시대 도학파(道學派)의 유명한 주석자인 임희일(任希逸)의 <노자권재구의>(老子鬳齋口義)를 풀이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뼈대이다.

하지만 판본 자체가, 즉 교재가 <노자권재구의>였던 것은 아니다. 김흥호를 비롯, 함석헌은 물론 유영모까지 이들이 모두 함께 공유했던 주된 판본은 명(明)의 초횡(焦竑)이 지은 <노자익>(老子翼)이다. 함석헌은 <씨알의 옛글풀이>(한길사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자에 대해서 고래로 주석이 많아요. 옛날 사람은 요새와는 또 달라서는 <노자익>(老子翼)이라는 걸 제일 편리하다 하지요. 왜 그런고 하니 각 사람의 주(註)를 다 보려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그렇겠지만, 그럴 새가 있어요? 그런데 초횡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재주도 있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인데, 모든 걸 골라서, 자기 말도 이따금 나오긴 나오지만, 자기만이 아니고 남들의 좋은 주를 모아서 냈어요.
이 책의 특색은 본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을 한 사람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개중에 그래도 누가 누가 했던 주로 좋은 걸로 몇 개 골라서 그 요점 되는 거를 같이 실었어요. 이 사람 저 사람의 해석을 볼 수가 있어 편리한 거야. 이름도 <노자익>이라 하는데 왜 익(翼)이라 그랬는고 하니, 새에게 나래가 있으면 잘 날 수 있는 모양으로 이런 주가 있으면 좋다는 거지요. '덕(德)을 우익한다' '호랑이에 나래 붙은 사람'이라 그러잖아요? 노자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좋은 주를 붙였다 그런 의미로 <노자익>이라 그래요.(<씨알의 옛글풀이>, 56쪽)

▲ <씨알의 옛글풀이>(함석헌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조선 시대에 <노자>는 이단의 책으로 금서(禁書)였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묘하게도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우고 금속활자를 통해 서적의 발행이 흥성하던 시절인 세종(世宗) 2년 즉 1420년의 금속활자본 <노자>가 현존하여 2010년 보물 제1655호로 지정되어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판본이 바로 임희일의 <노자권재구의>이다. 이 책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가장 널리 읽던 <노자>이다.

또한 조선 시대 유학자 가운데에는 율곡 이이의 <순언>을 비롯하여 박세당의 <신주도덕경>, 서명응의 <도덕지귀>, 홍석주의 <정노>, 초원의 <담노> 등 다섯 가지 주석서가 있다. 이들 주석서들은 또한 초횡의 <노자익>과 같은 주석 모음집을 바탕으로 여러 학자들의 주석을 고찰하여 나름의 주석을 가한 문헌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유학자들의 <노자> 읽기는 오늘날 유행하는 왕필의 것보다는, 임희일이나 초횡의 <노자> 읽기에서 고찰되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아는 노자와 조선 시대의 노자가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수가 노자를 만났을 때

김흥호 선생님의 <노자·노자익 강해>가 <노자권재구의>를 바탕으로 하면서 <노자익>을 저본으로 하는 전통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조선의 사상사적 흐름과 하나의 연속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권재 임희일은 <노자>의 해석사에서 획을 긋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북송의 정이(程頤)에서 남송의 주희(朱熹)로 이어지는 도학파(道學派)의 인물이지만, <노자><장자>와 <열자>는 물론 불경에까지 조예가 깊은 학자였고, 이들을 화해적인 시각에서 읽고자 했던 사람이다.

조선 유학자들의 주석의 전통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율곡 이이는 <순언>을 통해 노자의 사상이 통속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유가의 사상과 모순되지 않으며, 박세상이나 홍석주는 세상이 노자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노자 사상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 사상과 통하는 핵심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가능했던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자>와 달리 수많은 유학자들이 <노자>를 유학(儒學)과 화해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송대(宋代) 이후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모는 그의 <노자, 빛으로 쓴 얼의 노래>에서 <노자>의 제1장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노자(老子)의 도(道)는 예수의 얼(프뉴마, πνεηα ), 석가의 법(法, Dharma), 중용(中庸)의 성(性)과 같은 참나(眞我)를 뜻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를 잘 몰라 Tao라 음역하기도 하고 way로 의역하기도 한다.(22쪽)

유영모는 물론이고 함석헌의 글, 그리고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에서 이런 식의 표현은 자주 눈에 띄는 이야기들이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유교나 노장사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석가나 공자, 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해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데 모두 일조할 수 있는 중요한 깨달음이나 가르침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문명,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라는 종교와 마주하여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전통을 부정하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이를 포용하고 화해하고자 했던 중요한 흐름을 보게 된다.

일부 기독교 세력이 조선에서의 선교를 위해 술과 담배를 금기시하고, 전통 종교와 가치관을 미신에 근거한 것이거나 사이비 혹은 이단이라 부르면서 갈등과 긴장을 만들어 냈다면, 유영모, 함석헌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노자·노자익 강해>와 같은 고전 읽기라는 사상적, 종교적, 역사적 실천을 통해 한국인의 삶이 전통과 현대가 모순되지 않고, 기독교와 전통이 갈등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갈 수 있는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와 노자의 만남은 이미 오랜 전통을 지닌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우리는 어떤 노자를 만날 수 있을까?

<노자·노자익 강해>는 세 가지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책으로 보인다. 우선 임희일의 <노자권재구의>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노자익>과 같은 문헌은 이미 이현주 목사와 같은 분들에 의해 번역되었지만, <노자권재구의>는 처음으로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단 소개의 차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 책이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가장 널리 읽혔던 판본이라는 점에서 나름 학술적인 의미를 갖는다. 다만 아쉬운 것은 번역 자체를 추구한 책이 아니라 강의를 출판한 것이기에, 깔끔한 번역서라기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해설서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또한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는 임희일은 물론 여러 학자들이 쓴 서문(序文)을 함께 번역 해설하고 있고, 권재 이외의 여러 학자들의 주석을 함께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다만 독자들은 이 책에서 철학사적인 의미에서 학술적 반성을 거친 객관적 연구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서세동점, 식민지, 전쟁 등의 모진 풍파 속에서 실존적으로 기독교의 신앙을 자신의 전통과 주변의 무수한 한국인들의 삶과 마주하고 화해하고자 했던 한 구도자(求道者)의 고뇌로 읽는 것이 더욱 어울릴 듯하다.

이 책은 <노자> 가운데 전체를 번역하고 강의한 것은 아니다. 전체 4권으로 이루어진 이 강의록은, 제1권에서 여러 저자의 서문과 책을 소개하면서 1장에서 3장까지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제2권에서는 4장에서 12장까지, 3권에서는 13장부터 24장까지, 그리고 4권에서는 25장에서 36장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내용을, 2004년 1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47회 강의한 내용을, 그 제자들이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풀어 출판된 책이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노자'들이 있다. 어떤 노자는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에 맞서서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하는 사상가라면, 어떤 노자는 남성적 권위주의와 달리 여성적 가치와 화해를 추구하는 철학자라면, 어떤 노자는 마음의 깨달음을 통해 삶의 고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적 삶을 추구하는 해탈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는 이렇게 말한다.

노자라는 책은 뭘 알자는 건가? '나'를 알자는 거다. 결국 내 소리다. 우리가 지금 남의 소리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이것이 내 소리다. 노자 그러면 노자가 무슨 다른 소리 하는 게 아니다. 이거 내 소리다.
말하는 법이 다 다른데 화엄경이라는 건 뭔가? 너 자신을 알라다. 기독교라는 게 뭔가? 너 자신을 알라다. 노자도 마찬가지야. 다 나 자신을 아는 거지. 그러니까 보긴 보는데, 뭘 보나? 내 사진을 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게 재미가 있는 거지.(132쪽)

하지만 그가 <노자>를 통해 찾아가는 '나'의 세계는 고립되거나 유아론적인 신비나 환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정한 현실을 바꾸는 데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시험, 경쟁, 당파싸움, 계속 경쟁사회에서 살고 있어요. 이게 뭔가 그러면, 이상세계의 반대, 지옥이라. 우린 지금 지옥에 살고 있다는 거죠. (…)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개성교육이라는 거지요. 모든 사람의 소질을 다 살려줘라. (…)
내가 한 가지 잘한다고 해서 그걸 잘 하면 기쁘고, 잘못하면 슬프고 이렇게 되면 한 된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 이걸 소위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하죠. 모든 백성들이 다 대우받고, 존경받고, 숭상받는, 우리가 인권의 존엄이라 하는데, 모든 백성들이 다 주인이다, 모든 백성들이 다 왕이다, 모든 백성들이 다 행복하다, 이것이 이상세계란 말이죠.(227~228쪽)


우리가 <노자·노자익 강해>를 통해 만나는 노자의 세계는 어떤 고원한 형이상학의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 현묘한 논리와 존재의 세계는, 결국 예수와 석가와 공자와 노자가 서로 화해하는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나'를 만나고 '나'를 찾게 된다. 그러한 나들이 서로 존중받고, 숭상받고,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 민주주의! 아마도 이런 노력들이 그간 20세기에 한국에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저변을 만들어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민주주의를 가꾸고 꽃 피우는, 새로운 노자를 기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노자·노자익 강해>는 함석헌의 <씨알의 옛글풀이>와 함께 더욱 더 곱씹고, 되새겨야 하는 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열린 기독교, 화해의 기독교가 되기 위해 이 책이 사랑과 생명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예수는 분명 사랑이다. 그 사랑은 그 어떤 삶도 포용할 수 있다면, 노자나 공자를 사랑의 철학으로 포용하고 끌어안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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