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과학자, 소설로서 '통섭'을 완성하다!

[프레시안 books] 에드워드 윌슨의 <개미언덕>

작가라면 대개는 알지만 작가가 아닌 사람은 쉽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소설을 머리로 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당신의 대뇌피질 주름이 몽실몽실하고 활력 넘치며 하다못해 인류 최고 수준의 지식을 가득 담고 있다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설은 가슴이 쓰는 것이다.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과학소설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과학소설을 처음 쓰는 분들도 간혹 착각하는 것이 있다. 과학소설의 경이감이 지식에서 온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분들은 관객이 SF영화에 열광하는 것이 CG나 특수효과 때문이라고 믿는 영화감독들과 유사한 실수를 한다. 소설은 지식을 전하지 않는다. 소설이 전하는 것은 감정뿐이다.

작가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써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소설은 그것이 아무리 평범한 것이라 해도, 그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한 지점에서 승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지식을 갖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개미언덕>(에드워드 윌슨 지음, 임지원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통섭>(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과 <인간 본성에 대하여>(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저자,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스타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고 대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역설적으로 그 저서는 소설이 될 방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목적이 감정이 아닌 지식의 전달에 있는 이상 그 저서는 인문서가 되지 소설이 되지 않는다. 사실 저자는 본래 시적이고 소설적인 과학서를 쓰는 사람이었고, 이 책 <개미언덕>(에드워드 윌슨 지음, 임지원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은 저자가 지금까지 써온 글쓰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은 과학서가 아니라 소설을 표방한다는 점이고, 평가의 기준점이 크게 이동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언덕>은 참 독특한 책이다. 가슴이 아닌 머리에 방점을 두었으면서도 독자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저자의 '지식'이 사람의 경이감을 일으킬만한 수준에 있으며, 그에 대한 통찰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지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는 넋이 나가는 경이감을 주고, 어느 부분에서는 통찰과 감탄을 준다. 극점에서는 닿지 않는 것이 없다 하던가.

에드워드 윌슨은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생태계 전체가 이어져 있으며,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런 생태계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 또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에드워드 윌슨이 바라는 지식의 통섭,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에 대한 스스로의 실천이며 실험인 셈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던 도중 소설로서 읽기를 그만두고 인문서로서 읽었다. 그러지 않으면 책의 본질적인 면을 놓칠 것만 같았다. 지금도 이 책을 인문서로 평가할지 소설로서 평가할지는 다소 고민이 되지만, 결국 소설로 바라보기로 한다. 그것이 통섭이라는 가치를 꿈꾸며 다른 영역에 도전한 한 작가에 대한 예의일 것이니.

남부의 숲 근처에 사는 한 소년이 있다. 그는 숲을 사랑하며 숲에 사는 작은 동물들, 식물군락과 그 생태계 전체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숲은 지금 부동산 업자에 의해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고, 생물학자를 꿈꾸던 소년은 숲을 보호하기 위해 법조인이 되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는 아무도 모르게 대제국의 흥망성쇠가 이어지고 있다. 맛과 냄새로 사고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초유기체 집단, 개미의 세계다. 오솔길 개미 나라는 어머니이며 생산자이며 모든 것이었던 여왕의 죽음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는다. 몰락을 막으려는 전 국민의 희생적인 노력도 소용없이 나라는 서서히 사멸해 간다. 이 비극을 딛고 등장하는 것은 여러 국가를 흡수하며 성장한 제국이다. 찬란한 융성과 번영을 누리던 대제국은 차츰 주변 환경을 잠식하기 시작하고,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서자 마찬가지로 몰락하고 만다.

저자는 생태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닌 흐름 전체를 관망한다. 한 세계의 쇠퇴는 다른 세계에 활력을 주고, 번영은 거꾸로 멸망을 초래하며, 다시 그 멸망은 다른 생태계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역설적인 점은 이 위대한 세계의 역사가 그 주변에 어슬렁거리며 사는 약간 덩치가 큰 생물 ― 인간 종의 무심한 결정에 따라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제국 흥망사를 압도하는 개미제국의 역사에 비해 인간 주인공의 일생은 무난하고 순탄하기 이를 데 없다. 소년이 뭘 했는지 모르겠는데 덜컥 하버드 법대에 입학하고 별 노력 없이 승승장구하더니, 부동산 회사에 입사하여 무슨 설득을 했는지 한 순간에 부동산 회사를 환경보호주의자로 바꿔 놓는다. 이 노 과학자께서는 개미의 비극과 투쟁과 인생살이는 그렇게 맛깔나게 쓰셨으면서, 사람의 인생에도 실수나 실패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은 모르시나 싶다. 사실 이 인간 주인공의 일대기는 우리가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에서 간간히 엿보았던, 남부의 숲을 뛰어다니며 생태계의 경이에 들떴던 저자 자신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니 이 부분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저자의 회고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미언덕>을 개미제국 흥망사가 포함된 저자의 회고록이라는 시선으로 보다 보면, 일생 생태학에 헌신한 81세의 노 과학자가 말년에 이르러 떠올리는 가벼운 회한과 후학에 바치는 충고를 엿볼 수 있어 미소를 짓게 한다. 어느 면으로 보나 저자의 분신인 주인공의 인생이 결정적인 지점에서 예고도 없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샛길로 빠질 때가 있는데, 그 지점이 저자가 엿보는 '가지 않은 길'이며, 저자가 다시 생을 산다면 시도했을 평행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 다닐 때 생물학이 아니라 법학을 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원래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내가 직접 부동산 회사에 들어가서 사장을 앞에 앉혀 놓고 설득했어야 했는데." 물론 이 책 전체가 또한 저자의 '가지 않은 길'이다. "그러니까 내가 과학서 말고 진작 소설을 썼어야 한 사람이라도 더 내 말을 들어 줬을 텐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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