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다 한 신자유주의, 호흡기 누가 줬어?

[프레시안 books] 콜린 크라우치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순리에 맞지 않는 신자유주의

세상엔 언뜻 보기에 순리에 맞지 않는 일들이 꽤나 많다. 사랑한다고 평생을 함께 하겠다며 결혼한 남녀가 툭하면 부부 싸움을 벌이는 일도 그렇고, 가창력도 외모도 그저 그래 보이는 가수가 월드 스타로 각광 받는 일도 그렇고, 현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어느 때보다 높은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패배한 일도 그렇다. 그리고 영국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에겐 경제 위기 후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있는 신자유주의가 그런 경우이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와 잇따른 유럽 재정 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의 총아인 규제받지 않는 금융 시장이 한 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걸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위기를 야기한 금융 기업과 관련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런 활동을 뒷받침한 경제 이론에 수정을 가하는 게 순리에 맞는 일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적지 않은 거대 금융 회사들은 시장 원리에 따른 파산이 아닌 정부 구제 금융으로 살아남았고, 그들 회사의 직원들은 위기 이전 수준에 버금가는 수익을 챙기며,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이해하고 운용하는 지배적 관념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콜린 크라우치의 책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유강은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은 바로 이 문제, '신자유주의의 이상한 죽지 않음'을 다룬다.

신자유주의 해부 1 : 시장 실패

▲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콜린 크라우치 지음, 유강은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책읽는수요일
신자유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정부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의 가치를 강조한다. 개인f들이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유 시장은 인간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최선의 수단이며, 그런 시장은 좋게 봐줘야 비효율적일 뿐이고 최악의 경우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와 정치보다 더 선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척이나 단순하고 쉬운 개념이지만, 이러한 경제 원칙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왜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크라우치는 이 과제를 두텁지 않은 분량의 책에서 효과적으로 그것도 독자가 쉽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책의 1장 '자유주의를 배반한 신자유주의'는 먼저 신자유주의가 어떤 기원에서 출발해 어떻게 발전했는지 조명한다. 여기에선 누구나 한번쯤 궁금했을 법한 질문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다른지,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의 지배적 경제 원칙이었던 케인스주의가 어떤 까닭으로 신자유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와 있다.

2장 '순수 시장이라는 불가능한 꿈'은 신자유주의가 신성시하는 자유 시장의 특징과 한계를 설명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흔히 국가 공공서비스는 무능하고 교만한 데 반해, 자유 시장은 소비자 선호에 민감하고 경제적 자원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고 말한다. 크라우치가 보기에도 그런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이 그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시장 실패'의 경우 정부의 시장 관여는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정당한 일이 된다. 아래 표는 크라우치가 지적한 순수 시장을 위한 요건과 관련된 시장 실패를 요약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해부 2 : 국가·시장·거대 기업의 안락한 동거

이렇듯 시장 실패 영역이 광범하고 정부 관여가 불가피하다면,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는 진즉에 힘을 잃고 다른 대안이 모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일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3장 '시장을 집어삼킨 거대 기업'과 4장 '공기업 민영화의 불편한 진실'은 그 답이 '거대 기업'에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이념이든 그것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그로부터 혜택을 받는 주요 사회 집단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지난 세기 중반의 케인스주의가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지지를 바탕에 둔 경제 이념이었다면, 신자유주의의 핵심 지지 집단이자 수혜자는 거대 기업이다.

경제 문제에 관한 논쟁은 흔히 국가와 시장 간의 대립적 관점에서 전개되곤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시장과 국가 뒤에는 거대 기업이 숨어 있고, 그들은 자신의 시장 지배적 지위와 국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유 경쟁 시장의 규칙을 깨뜨리거나 진입 장벽과 같은 시장 실패의 사례를 활용한다. 공공부문에 시장 경쟁의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민영화·시장화 사업도 실상은 거대 기업에 안전한 수익을 보장해주는 수단 이상이 아니었다.

크라우치의 신자유주의 해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5장 '사유화된 케인스주의'에 있다. 거대 기업이 중소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고 하청업체의 이윤 마진을 줄이고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며 전체 사회의 부를 독점해가는 것은 분명 그들에게 엄청난 이익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심화되면 그들 거대 기업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들에게 집중된 부로 인해 자신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사회적 수요가 크게 줄어드는 것이 바론 그런 문제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과거 케인스주의에서 수요 부족 문제는 정부 재정으로 해결하곤 했다. 그러나 정부 관여를 경계하는 신자유주의에서 부동산 담보나 신용 카드를 통해 크게 불어난 소비자 채무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대안의 사려 깊음

6장과 7장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넘어 대안의 문제를 다룬 장들이다. 6장 '기업의 정치세력화와 새로운 가능성'은 거대 기업이 그들의 막강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으로 인해 사회적 관심과 비판의 초점이 되는 역설적 상황을 상정한다. 그것이 수반한 결과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익히 들어온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이다. 크라우치도 인정하듯 거대 기업은 이 개념을 활용해 자신의 비위(非違)를 호도하거나 일종의 기업 홍보 전략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거대 기업에 대해 한 나라 정부가 규제를 가하기는 어렵고 때때로 그런 기업조차도 소비자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개념은 비록 드물고 제한적이라도 시민 사회 운동이 거대 기업의 비민주적 행태를 견제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7장 '시민 사회에서 찾는 돌파구'는 제목이 시사하듯 저자의 대안이 다른 어떤 영역보다 시민 사회에 있음을 보여준다. 크라우치는 거대 기업의 전횡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시장에도 긍정적 역할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 그는 여태껏 거대 기업과 공모해왔던 국가 관료와 대표가 어느 순간 일변해 시장에 대한 민주적 규제를 가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와 거대 기업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유지될지 모른다는 우울한 전망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런 경제 체제가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인식이 발전한다면, 시민 사회는 거대 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견제하는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라우치에게 시민 사회는 다양성과 차이·긴장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비폭력적으로 행동하며 공적 갈등과 담론, 이해와 타협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시장·국가·기업에 대한 가치 지향적 비판이 수행될 수 있다. 국가와 기업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민 사회를 통한 활발한 논쟁의 장은 여전히 열려 있다. 공동의 가치에 대한 정당한 해석을 독점하려는 국가의 주장에 맞서, 사회의 여러 가치를 주주 이익 극대화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삶이라는 기업의 주장에 맞서, 시민 사회는 그들의 지배에 도전하고 공적 목표를 탐구하며 그와 관련된 기획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크라우치는 이런 역할을 기대해 볼만한 시민 사회 행위자로 특히 다섯 개 집단에 주목한다. 첫 번째는 주변적 지위에 있는 정당이다. 정당은 국가를 더 넓은 사회와 연결해주며 갖가지 대의와 쟁점이 정부로 진입토록 하는 통로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시민 사회에서도 정당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며, 기업 권력에 대항하려는 어떤 시도든 정당을 주요한 조직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두 번째는 국가와 경제로부터 자율적인 종교 집단이다. 종교 단체는 가치의 장에서 예전의 권위를 많이 상실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동기와 결부된 정치와 경제의 우선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권위를 갖고 윤리적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집단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집단은 운동 단체와 자선 단체이다. 이들 두 단체는 종종 겹쳐지기도 하지만 전자는 흔히 논쟁과 갈등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정부와 기업에 문제의 시정을 촉구하는데 반해 후자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나 기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자원을 직접 제공한다는 차이를 갖는다. 마지막 집단은 전문직 단체이다. 여기서 전문직은 직업 활동의 방법에 대해 자율적으로 획득한 일단의 가치를 발전시킨 직업 집단을 의미한다. 물론 전문직의 노동은 직무를 위한 것이고, 그 종사자는 그런 일을 통해 수입을 얻는다. 그러나 전문직 노동은 사회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때로는 국가와 기업의 지배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를 위한 함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에 담긴 분석과 대안은 한국 사회에도 많은 함의를 던져준다. 무엇보다 반가운 일은 이 책이 그간 한국의 중요한 정치경제 현상들에 대해 가졌던 의문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재벌 대기업은 어떻게 과거보다 더 큰 시장 지배력을 갖게 되었는지, 김대중 정부와 현대 그룹, 노무현 정부와 삼성 그룹 간의 긴밀한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명박 정부 하에서 강력하게 추진된 고환율 정책이 누구에게 가장 큰 이득을 주었는지, 지난 정부들이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공기업 민영화 사업, 외자·민자 유치 사업의 실질적 수혜자는 누구인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이후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신용카드 위기와 부동산 가격 폭등, 그리고 오늘날 1000조에 달하는 가계 부채의 근원(根源)은 어디에 있는지. 이 책은 이런 많은 중요한 문제들을 보편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물론 일부 독자에겐 신자유주의과 거대 기업 간의 관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 비해 시민 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크라우치의 대안이 미적지근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대안 부분에서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으며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거대 기업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는 노동자나 중소기업 집단의 정치적 잠재력을 경시하고,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정당 간 경쟁이 중심을 이루는 선거를 통한 사회적 힘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그럼으로써 거대 기업의 불합리하고 부당한 경제 행태를 규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못내 아쉽다.

그러나 크라우치가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시민 사회의 마지막 집단으로 전문직과 그들의 '직업 윤리'를 강조한 대목에서 그 전문직에 대학 교수로 대표되는 지식인·전문가 집단을 포함시켜본다면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는 쉬운 일로 생각된다.

사실 이 책의 주장은 매우 반갑기도 했지만, 그런 만큼 우리 학문 공동체의 역량 부족에 대한 부끄러움도 컸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급진적이고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단행해왔고 그 속에서 재벌 대기업의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커졌으며 점점 더 많은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 영세 상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을 목도해왔음에도, 우리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체계적이고 심도 깊게 다루지 못했다.

물론 관련 연구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나 사회 복지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 연구는 각자의 연구 영역에서 나름의 가치 기준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구성하는 데만 급급할 뿐, 실제 사회의 여러 이익 갈등과 권력 관계의 동학이 어떻게 기대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과제를 감당할만한 역량을 갖춘 뛰어난 연구자들이 대거 대통령 후보 캠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미국 정치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연구하는 것'이 되었나?

미국 정치학회장을 지냈던 시어도어 로위는 그의 학회장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연구하는 것이 되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국가 권력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연구해야 할 정치학자들이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용이한 연구 주제, 연구 방법인 공공 여론, 공공 선택, 공공 정책에 점점 더 몰두해가고 있다는 비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난 대선에서 예전과 달리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건설이 주요 이슈로 다뤄진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은 그런 정책과 공약이 과연 새 정부에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하기도 한다. 이런 의심이 타당한 이유에는 사회경제 이슈를 압도했던 박정희 대 노무현 대립 구도나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정치 개혁 이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사회경제적 정책 대안을 구성하는 데 있어 지식인·전문가 집단의 책임 방기도 무시할 수 없다.

유권자 다수가 신뢰할 만한 공약과 정책이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저 말뿐인 가치 원칙이나 통계수치 상의 재정 여력을 넘어서는 문제의 현실에 대한 인과적 분석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 정답이 있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왜 어떻게 재벌 대기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지, 왜 노동자나 중소기업 집단은 그런 영향력을 상쇄할 만한 수의 힘을 조직하는 못했는지, 왜 이른바 '민주정부'들은 그렇게 쉽게 신자유주의 정책에 경도됐는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사실 정보와 인과 분석이 어느 정도는 이뤄져야 했다.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 일상에 바쁜 유권자 시민을 과거에 대한 향수나 비위 사건의 폭로가 아닌 설득력 있는 정책 대안으로 끌어들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런 역할을 담당했어야 할 많은 사람들은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데 머무르거나 기껏해야 일시적인 유권자 분위기와 지역, 세대, 성별 구분 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여론 조사를 분석하고 해석하고 또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만 열중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지난 대선은 얼마나 민주적이었나?

지식인·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직업윤리를 고수하며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충실히 하지 못한 문제는 선거 과정뿐 아니라 선거 결과를 평가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선이 끝난 지 두 달이 가까워옴에도 우리 주변에는 왜 야당 후보가 패배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 결과를 수용하기도 어려워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지식인·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해답을 제시하곤 한다. 진영 대립의 문제, 야당의 지나친 급진화, 친노 패권주의, 50대 보수화, 정당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수긍할 수 있는 주장도 있고 그렇지 못한 주장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 해석 모두가 하나같이 "왜 야당이 패배했는가"라는 질문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와 사회 복지 확대가 우리 사회의 과제라는 데 수긍하고 크라우치의 신자유주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난 대선은 과연 얼마나 민주적이었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선거인데 거기에 다시 민주주의의 기준을 갖다 대는 일이 생뚱맞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거라고 해서 다 같은 선거가 아니며, 민주주의에서 좋은 선거란 다른 무엇보다 사회의 다양한 이익과 요구가 광범위하게 표출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 기준에서 지난 대선은 얼마나 민주적이었나?

민주주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분하며, 이제 우리 사회는 후자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보다 더 민주적인 선거에서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집단 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 고용주와 노동자의 상충하는 이해관계, 대형마트와 영세상인 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충분히 표출되고 그들의 요구가 아래로부터 모아지며 그러한 조직적 활동의 힘이 한껏 드러나지 않는다면, 누가 당선되든 신뢰할 만한 정부 정책으로 경제 민주화나 사회 복지 확대를 이루기는 어렵다. 파당적 이해관계에 묶일 수밖에 없는 정치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지식인·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뤄주지 못한 것은 크게 안타까운 일이다.

책의 저자와 번역자가 인정하듯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는 독자가 가능한 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된 대중용 교양서이다. 그래서 우리 삶이 왜 점점 더 팍팍해져 가는지 답답한 사람들, 왜 지난 선거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도 실망스러웠는지 궁금한 사람들, 그리고 그 선거에서 참여하고 앞으로 참여할 지식인·전문가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책이 많이 팔린다면 재판에서는 더 많은 역자 해설주를 담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잡습니다.>
2월 15일부터 2월 22일까지 이 글의 마지막 단락에 포함된 "흔히 사용되는 '외부 효과'를 '외부성'으로 옮긴 어색한 번역이나 '2차 금융시장'을 '유통시장'이라 옮긴 오역도 바로 잡을 수 있고"는 서평자의 오독에 따른 잘못임을 밝힙니다. 서평자는 이에 대해 책의 번역자와 독자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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