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에서 정신약탈자로, '숭고한' 아메리카!

[프레시안 books] 장세진의 <상상된 아메리카>

1. 역사철학에서 '역사'로

역사의 절정에서 역사철학이 탄생한다면, 역사 그 자체는 어쩌면 하나의 역사가 조락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쓰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주 월남망국사>(양계초 엮음, 안명철·송엽휘 옮김, 태학사 펴냄)나 <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지음, 윤수인·김희용 외 옮김, 민음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대한 한국에서의 사유가 바로 그렇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는 헤겔의 말은 역사 연구의 어떤 한계나 징후들을 알려주는 비유로서도 훌륭하다. 오늘날 '미국'은 여전히 한국인의 삶을 틀지우는 앙시앙 레짐의 긴 흔적인 한편 일종의 고고학적 대상이 되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미국이 갖는 정치문화적 규정력이 그만큼 약화 내지는 상대화되어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드디어 <상상된 아메리카>(장세진 지음, 푸른역사 펴냄)와 같은 '심드렁한' 미국(을 경유한 한국)비판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북한이나 이란이 미사일을 쏘면 대한민국과 일본을 비롯한 어떤 '세계'는 미국의 입을 쳐다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미국은 '제국'이다. 그러나 이 제국은 역사철학의 대상으로서의 제국이 아니라 흥망성쇠의 대상으로서의 제국이며, 담론적 결정력을 상실한 '주권적 힘'으로서의 미국일 뿐이다. '아메리카니즘'이란 한국 사회에서 이미 일종의 '사어' 혹은 이미 새롭지 않은 그 옛날의 '모던 신어'에 속하는 게 아닐까.

장세진의 <상상된 아메리카>(부제는 '1945년 8월 이후 한국의 네이션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다)는 해방군 혹은 혁명군이자 가능성의 중심이었던 미국과 미국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냉전 반공국가의 정치문화 그 자체를 형성하는 가장 근원적 힘이자 제한으로 작용했는지를, 해방공간에서 1960년대까지의 미디어 및 지성사 전체를 통괄하며 재구성해 보인 책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메리카 표상/개념'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집적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미국 그 자체에 대한 책이 아니라, 내재하는 미국 혹은 미국 표상과 그것으로부터 파생한 개념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사회를 직조했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보고서이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아메리카란 대한민국에 있어 "제도 창설자(institutional builder)"였던 것이다.

통상 내재하는 미국의 문제는 염상섭의 <효풍>이나 조해일의 '아메리카', 남정현의 '분지'의 사례와 같이, 물질적 실체로서의 미국인/기지촌의 문제를 통해 표상되어 왔다. 하지만 <상상된 아메리카>는 한국 사회 내에서 형성된 미국이라는 담론적 구축물이 세계 냉전 체제와 반공 블록 속에서 대한민국 사회의 논쟁적 구도와 이데올로기, 국가 형성 그 자체에 어떻게 결정적인 개입들을 해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논쟁의 장을 열어 보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기지가 도시 밖으로 추방되는 일과 내재하던 미국의 힘이 실제적·담론적으로 변곡점의 윗꼭지점을 치고 내려오는 일은 실은 같은 사건일 것이다.

2. 현해탄에서 태평양까지, 극동에서 극서로, 동서 담론의 지정학—왜 미국이 아니라 아메리카인가.

저자가 표상 연구와 개념사 연구라는 방법을 내장한 담론 연구라는 분석틀을 견지한 것은 매우 신중하고도 효과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가 대상으로 삼는 것은 미국 그 자체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대한민국 사회의 의제와 지향과 정치사회적 변화 그 자체를 추동했는가에 대한 내재적 분석이기 때문이다.

▲ <상상된 아메리카>(장세진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해방기와 전후를 움직인 최대 잡지인 <신천지>와 <사상계>를 비롯해 <백민>, <민성>, <현대문학>, <문예> 등의 문학종합지, <아메리카>와 <민주공론> 등의 미국 주도/관련 잡지, 일간지 및 사상지들을 파상적으로 인용하며 펼쳐지는 서술들은, 그럼에도 '담론연구'라는 제한들을 크게 넘지 않는 범위에서 조직되고 있기에 일목요연한 한편 금욕적이다.

특히 저자 스스로 "역사적 내력을 가진 표상과 관념들의 행로를 관찰하고, 이들 표상들의 심부를 침투하고 있는 식민적 의식의 유산이 '해방' 이후에 지속되고 변화되는 방식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결국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42쪽)이라고 밝히고 있는 바, 이 책은 식민지 유산과 후기 식민사회의 어떤 반복, 식민주의라는 문제틀의 장기 지속을 증명해보임으로써(이를테면 총독부 관리에서 미군 중위로 변화된 문화장의 에이전시!), 최근 20년간 전개된 탈식민주의적 식민지 연구의 유산을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시도하고 있다.

'미국(美國)'이 아니라 '상상된 아메리카'라고 한 연유 역시 식민지기-해방-동아시아 지정학이라는 변화 과정에 저류하는 담론의 장기지속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저자는 식민주의의 변형 혹은 지속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양에서 동아시아로의 이동, 즉 유럽 중심 극동에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 중심 극서(極西)로의 담론 지형의 변화를 간파해낸다.

특히 아메리카를 담론적·정치적 제한으로만 보지 않고, 동서양의 이원적 대립을 통한 내셔널리즘의 재구축, 옥시덴탈리즘적 구도 하의 체재 개혁 논의의 상수로까지 평가함으로써, '아메리카'를 해방적 계기를 포함했던 구속, 해방의 계기를 말살했던 '이 세계의 한계'로 함께 설명해내고 있다. 아메리카란 대한민국 담론사의 '헤르메스'였던 것이다. 해방군에서 점령군으로, 거기서 다시 맹방(盟邦)이자 모범 혹은 오염원이자 정신약탈자로 그 모습을 바꿔간 아메리카라는 문제를, 저자는 실체적 관점이 아니라 대한민국사회 형성의 '내재적 동인'으로 묘사해 보이고 있다.

세계 냉전 체제의 동아시아적 구도라는 지정학적 배치가 어떻게 담론 지형 그 자체를 결정하거나 기성 담론 및 새로운 지적 운동을 재배치하는지를 보기 위해서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 나온 셈이다. 세계상을 '제한'하는 힘이자 체재 내파(內破) 운동의 친우이기도 했던 아메리카를 이만큼 호혜적으로 취급한 책도 별로 없는 까닭이다.(이는 저자가 지속한 신문잡지에 대한 근력 있는 독해의 산물, 즉 확보한 사실의 크기에 비례한 결과라 여겨진다.)

동서양의 지정학적 구도를 가치 대립의 공간으로 전화시키는 수많은 담론의 다발 속에서 왜 '미국'이 서양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늙은 유럽이 생략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를 묘사함으로써, 저자는 냉전하 반공국가 현대 한국의 정치적 구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심성과 가치 체계를 형성한 열망과 마음의 지도까지를 그려내 보인다.

저자의 이번 책이 가진 큰 성과 중 두 가지가 꼭 지적해 두고 싶다. 우선 구미(歐美/歐米)라는 옥시덴탈리즘의 축에서 세계 냉전 질서의 주관자로서의 아메리카라는 숭고한 대상이 분리되면서 발생한 새로운 담론지형(100면)이 뚜렷이 다가온다. 다시 말해, 동서 비교 문명론의 결정적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이념형 아메리카를 통해서, '정체된 아시아'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프로그램의 구동에 의해 결국 근대화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의 땅으로 재정위되어진 것이다.(제4장의 「윌슨주의적 아메리카와 근대화론」을 참조.) 또 한 가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민족 개념 그 자체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나는 대목에 대한 서술이다. 피를 나눈 형제라는 민족의 비유가, 혈맹(血盟) 아메리카라는 인종이 다른 '형제'론과 대면했을 때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 이 어려운 물음을 앞에 두고, 저자는 단군, 화랑 등의 원시적 고대의 동일성 상태로의 환원론들을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한다. 이를테면 핏줄의 동일성은 지금 현재가 아닌 환인이나 단군, 화랑 정신과 같은 절대적 시간을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안호상의 일민주의, 김범부의 풍류정신과 같은 완전히 내재적인 국수(國粹)의 사상들은 아메리카라는 혈맹의 반대편에서 쌍형상화된다.

유럽을 생략한 서양의 대표 표상 아메리카와 일본을 생략한 동양의 대표 표상 대한민국은 정확히 번역에 있어서의 쌍형상화의 도식이 작동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유럽은 늙었고, 중국은 공산화되어 탈동양화했으며, 일본은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비로소 대한민국은 반공 블록 내 동양의 새로운 중심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관제 민족주의와 재야 민족주의가 하나의 출발선에 서게 되는지에 대한 저자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3. 아메리카, 표상과 개념 사이—중간 개념의 난관

다만 저자의 전진은 다음과 같은 점으로 인해, 담론 연구라는 고유한 제한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친 것처럼도 보인다. 저자가 서론 및 이론적 구도에 대한 설명에서 제시한 방법은 사카이 나오키의 쌍형상화 도식과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였다. 번역 대상과 번역 결과가 서로를 확정해주는 상호 형상화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는, 대한민국사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일 뿐 아니라, 차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소위 자유아시아가 미국의 담론 지형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살피려는 연구들에서도 두루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이라 하겠다. (물론 이는 많은 부분 미국 동아시아학의 몫일 터이지만.)

또한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어가 아니라 '아메리카'라는 지리적·사건적 개념을 전면화시킨 저자의 선택은 코젤렉보다는 라이하르트의 '중간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담론과 이데올로기, 지정학적 구도와 일상의 차원을 망라하는 아메리카라는 '중간 개념'에 대한 천착이 그것이다.

다만 담론 연구와 개념사 연구, 번역 연구를 접목시키려는 저자의 의욕이 모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 현재의 번역 연구에서 자명한 공리처럼 되어 있는 쌍형상화의 도식은 미국 사회의 자유아시아 담론과의 비교가 없다면 실상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상상된 아메리카>는 라이하르트 식의 중간 개념이 갖는 모든 문제점을 그대로 끌어 안고 있는 것 같다. 어디까지가 담론적 구축물로서의 아메리카 표상에 대한 연구이고, 또 어디까지가 중간 '개념'으로서의 아메리카인지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약간은 불분명해보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라는 표상을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문화적 기획 안으로 능동적으로 전유하는 토착 지식인들의 표상화 과정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매우 인상적인 한 마디를 구성한다. 그러나 중간 개념을 설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성사나 사상사적 구도를 넘어 일상적 실천까지를 개념사의 틀 안에 포획하기 위해서이다.

즉 아메리카의 민중적 전유, 허구 서사나 경험 공간 안의 아메리카의 존재 방식들이 설명되지 않으면 '아메리카'라는 단어는 '중간 개념', 나아가 '개념'조차 될 수 없다. 해방기 김기림이 신어('새 말')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면서 양키, 양공주, 양갈보, 양담배와 같은 일반 지성의 감각적 깨달음을 개념사적 대상의 핵심으로 설명한 것처럼, 아메리카나 바스티유, 양키와 같은 중간 개념들은 담론사와 일상사를 가로지르며 기대지평과 경험공간을 압착시키는 일종의 '요청'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중간 개념이라는 문제는, 일상의 장 혹은 문학 텍스트와 같은 경험 공간의 발화들 속에서 검증될 때 보다 본래적인 요청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아메리카 표상의 계보학에서 도입한 개념사 연구의 방법은 경험 공간을 그 한계 지점에서 훑는 '사적 서술'로 이어지기보다는, 역사적 과정의 모멘텀 그 자체를 보여주는 사상사적 발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비대칭적 대응개념으로서의 동양과 서양,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대치시키는 태도의 윤리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심지어 저자의 <상상된 아메리카>는 <슬픈 아시아: 한국 지식인들의 아시아 기행(1945~1966)>(푸른역사 펴냄)과 '쌍형상화'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세계라는 보편 개념, 즉 비대칭적 대응개념의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가 모두 후경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표상/재현 분석을 넘으려는 방법론적 시도는 재현물의 더미 속에서 예기치 않은 미로들에 봉착한다.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아메리카의 계보, 아메리카에 대한 기대지평과 경험공간의 접속은 '담론' 연구라는 문헌학적 입장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저자는 실상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코젤렉이 꿈이라는 허구 자료의 개념사적 지위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저자는 허구 서사-특히 소설을 통해 그러한 지점들을 밟아 갈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태준의 '먼지'에 나오는 한뫼 선생의 실명 모티브를 미국이라는 가능성의 파탄, 토착 남성 지식인의 거세공포 혹은 비판 공간의 소실로 파악한 대목과 같은 정치 무의식의 알레고리 분석이 그렇다. 이러한 분석들이 훨씬 더 전면화되었으면 어땠을까. 군데군데 빛나는 그녀의 탁월한 텍스트 분석이 예외적인 재능과 설명력을 표시하고 있음에도, 그 분석의 결과는 결국 아메리카 표상의 한 '예'라는 차원에 국한되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저자는 오른 손을 묶어 놓고 왼손으로만 권투를 하려는 오른손잡이 복서의 난관 안에 스스로를 놓아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개념사적 확실성 추구에 대한 의욕, 표상 연구에 있어서의 문학을 초과하는 담론적 틀을 장악하려는 의지에서 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일상사적 차원과 정치 무의식까지를 더듬어 나가는 문학 텍스트에 대한 밀착 혹은 그러한 연구를 기어 넘어가며 이뤄냈을 성과를 상상해 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금욕'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책을 읽으며 현재의 아메리카가 계속 오버랩되었다. 예컨대 시뮬라르크 전쟁을 통해 현지인에게는 비가시적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아메리카 상을 만난 일은 가장 인상적인 경험 중 하나였다. 이를테면 공중 폭격을 피하는 일이 전쟁 수행 혹은 전쟁에서 살아남는 일과 한가지였던 북한 주민, 혹은 남한의 일부 주민들의 삶이 그런 경우다. 공습의 경험을 통해 가시화된 증오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로서의 반미 민족주의의 근원을 추출해내는 저자의 분석은 지금 현재 아메리카가 세계의 주민들에 현현되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더구나 이러한 공습과 전후 심성 사이의 연결 고리는 풍부한 신문, 잡지, 문학 텍스트들을 통해 극히 꼼꼼하게 증명되고 있다. 질병 혹은 감염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 역시 인상적이다. 비전향 장기수들과 같은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이란 투옥 혹은 감금 상태가 아닌 격리 상태, 즉 격리 수용되어 치료를 통해 정상 상태로 되돌아 와야 할 존재로서 각인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양심수'로조차 등기될 수 없었다는 것.

이 책은 현대 한국의 형성을 논쟁 공간으로서의 아메리카, 개념사적 대상으로서의 아메리카를 통해 우회함으로써 토착담론과 지정학적 외부를 함께 시침질해내는 효과적인 전략을 보여준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실체로서의 대한민국의 지성사를 담론의 헤르메스인 아메리카상을 통해 계보학적으로 탐구하는 이 기나긴 여정에 다른 독자들을 초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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