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대가들은 호흡이 길고 주제도 큰 저서를 집필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대중과 직접 공유하고 세상을 바꾸려 했다. 반면, 오늘날에는 대중을 상대로 책을 써서 세상과 소통하는 행위는 학자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경제학이야말로 논문으로 승부한다는 정신이 특히 충만한 분야이다. 엄격한 방법론에 근거해 밀도 높은 논문을 생산하고 동료 학자들의 인용과 평가를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게 오늘날 경제학자가 살아가는 법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권력, 번영, 빈곤의 기원>(최완규 옮김, 시공사 펴냄)의 제 1저자인 대런 아제모글루(출판사는 영어식 발음인 '애쓰모글루'를 따랐지만 이 글에서는 서평자가 사용한 터키식 발음에 의거하여 '아제모글루'로 통일했다)는 전 세계에서 논문 인용이 가장 많은 '최상급' 경제학자 중 하나다. 그는 고등학교까지는 터키에서 나왔고 경제학 공부는 영국에서 했으며 강의와 연구는 미국에서 하는 40대 중반의 MIT 교수로, 경제학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지닌 사람이다.
수리 모형, 실증 분석, 역사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자유롭게 구사해 경제 성장, 소득 분배, 기술 발전, 임금 격차, 경제 제도 등의 분야에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이 과정에서 연구 성과가 가장 뛰어난 신진 학자에게 수여되는 '존 베이츠 클라크 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전 세계 경제학자들을 통틀어 논문 인용 빈도 6위에 오르는 영광도 누렸다. (☞바로 가기)
이런 아제모글루가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제임스 로빈슨과 함께 대중을 상대로 한 대작을 낸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스미스나 마르크스와 같은 예전 시대의 거인들을 의식한 책이다. <국부론>의 주제를 뒤집은 것처럼 읽혀지는 제목에서는 '작고 확실한' 이야기들만이 신뢰받는 이 시대에 거대 담론을 새롭게 모색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권력, 번영, 빈곤의 기원"이라는 부제에서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이나 배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의 그림자도 희미하게 엿보인다.
내가 아제모글루와 본격적으로 조우한 것은 미국 발 금융 위기와 불평등의 관계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였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자산 유동화 증권 등 지나치게 복잡한 금융 상품, 금융 기관이 무리하게 리스크(위험)를 감당하도록 했던 왜곡된 보상 구조, 금융 당국의 규제 실패,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저금리 기조, 글로벌 불균형 등의 문제에 주목했다.
이 와중에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기업연구소(AEI)를 중심으로 금융 위기의 원인은 과도한 정부 규제에 있다는 뜬금없는 주장이 유포되기도 했다. 지역재투자법(CRA)과 같은 규제가 은행들에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값싼 주택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고, 이것이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거품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티파티'와 같은 보수주의 운동의 자양분이 되는 등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여기에는 세계적인 경제학자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자 라구람 라잔의 역할이 컸다.
라잔은 국내에도 소개된 <폴트라인>(김민주·송희령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에서 이들의 논의를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금융 위기를 초래한 진짜 주범은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을 미봉책으로 막으려 한 정치권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선의'보다는 '과정과 결과'에 더 신경 쓰는 책임 있는 정책이 중요하고 그래서 정책 담당자들은 무엇보다도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입맛에는 맞았다. 하지만 비판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중 눈에 띄던 경제학자가 바로 아제모글루였다.
아제모글루에 따르면, 2000년대를 전후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기는 했지만 라잔이 거론하는 아래로부터의 재분배 요구는 없었으며, 미국의 정치권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래로부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신 돈 많은 사람들의 배를 더 부풀리는 쪽으로만 움직였다. 요컨대, 정치가 문제인 것은 옳지만 문제는 저소득층의 표를 구걸하려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아니라 금융의 이익만을 과잉 대표하는 왜곡된 정치 과정에 있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이때부터 내게 아제모글루는 조지프 스티글리츠나 폴 크루그먼에 못지않은 '진보적' 주류 경제학자인 양 각인되었다.
문제는 제도야, 이 바보야!
|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대런 아제모글루·제임스 로빈슨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시공사 펴냄). ⓒ시공사 |
지리적 위치 가설은 토양이나 기후의 탓으로 토지의 생산성이 낮은 지역은 경제 성장을 일으키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본다. 문화적 요인 가설에서는 나라마다 문화에 차이가 있어 사회 규범, 가치관, 노동 윤리와 관련해 청교도 정신이나 유교와 같이 성장 친화적인 문화를 지니는 곳은 경제가 발전하고, 이슬람과 같이 기업가 정신을 억압하는 곳은 경제가 쇠퇴한다고 이해한다. 아제모글루와 로빈슨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국과 멕시코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남북한 역시 한쪽은 번영을 구가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쇠퇴를 거듭하고 있으므로 이들 두 가설이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기존 논의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무지 가설이다. 국가의 실패는 국민이나 통치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으로, 지배층과 정책 입안자를 계몽하고 교육하면 기계나 건물을 짓듯이 번영도 '엔지니어링'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이는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을 지원하는 국제기구나 경제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책적 영향력을 실제로 발휘하고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는 아프리카 나라들을 대상으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음에도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낳지는 못하고 있는데, 저자들은 그 이유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잃을까봐 이들 정책을 진정으로 선택하려 하지 않는 데 있다고 본다. 즉, 실패한 국가에서는 지도자들이 경제 전체의 성장에 어떤 정책이 도움이 될지 알게 되더라도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이를 외면하거나 변질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정책이 선택되고 집행되는 보다 근본적인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번영은 결코 '엔지니어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과 멕시코가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 전혀 다른 경제적 위상을 지니게 된 원인은 지리적 제약도, 문화적 차이도 아니며, 정치인의 무지 때문도 아니다. 이들 나라의 상반된 운명은 기본적으로 지도자와 엘리트층들이 서로 다른 제도적 제약에 직면했고 다수의 시민들이 상이한 경제 제도 속에서 경제 활동을 펼쳤던 결과물이다.
미국이 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경제 제도를 가졌던 덕분이고, 북한이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경제 제도가 나쁘기 때문이다. 이때 제도란 각 집단들 사이의, 때로는 일치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한 사회의 자원을 배분하는 규칙이다. 제도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부의 정책과 구별될 필요가 있다.
여러 제도들 중 경제 발전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게 '경제 제도'인데, 이는 사람들의 경제적 인센티브에 영향을 주는 일련의 규칙들을 의미한다. 나쁜 경제 제도에서는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빼앗아 지배 집단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식으로 규칙이 세워진다. 저자들은 이를 '착취적(extractive)' 경제 제도라 부른다. 좋은 경제 제도에서는 사유 재산을 확고히 보장하고 법률을 공평무사하게 집행하며 누구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공정 경쟁의 환경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규칙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포용적(inclusive)' 경제 제도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에서는 사람들이 생산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연줄을 동원해 지대를 뜯어먹는 데 자신의 재능을 쏟는 반면, 포용적 제도에서 사람들은 기술을 개발하고 자본을 투자하며 기술 혁신을 추구해 성공의 꿈을 이루어내면서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부를 창출한다.
이처럼 한 나라의 경제적 운명이 경제 제도에 좌우된다면 나라마다 서로 다른 제도를 가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그 원인을 정치에서 찾는다. 국민이 어떤 경제 제도 안에서 살게 될지는 정치 과정을 통해 결정되며, 그 과정의 규칙과 방식은 정치 제도가 결정한다. 시민이 정치인을 통제하고 그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이 정치 제도에 달려있다.
세계 최고의 갑부 카를로스 슬림이 있음에도 멕시코가 가난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치권력을 독점한 소수 엘리트층이 대다수 시민을 희생시키며 사리사욕을 채우도록 사회를 조직하는데 그 권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부유해진 것은 다수의 시민들이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찾았고 모두에게 기회가 보장되는 경제 제도를 만드는 데 그 권력을 썼기 때문이다.
아제모글루와 로빈슨에 따르면, 포용적 경제 제도는 포용적 정치 제도의 토양에서만 지속 가능하다. 이는 사회 전반에 고루 권력을 배분하고 자의적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구조이며, 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강력한 정부가 그 핵심이다. 이때 다원주의적 정치 제도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 대신 광범위한 연합 세력에 힘입어서, 다수로부터 자원을 약탈하는 경제 제도를 해체하고 진입 장벽을 제거하며 시장이 소수의 이익에만 봉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이처럼 포용적 정치 제도의 도움을 받아 형성된 포용적 경제 제도는 다시 자원의 보다 평등한 분배로 사회 통합을 이루어내고 체제의 지지 세력들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포용적 정치 제도의 기반을 강화하는 선순환의 고리로 작동한다.
인센티브 만능주의, 정말로 진실인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저자들의 명성과 그 주제에 걸맞게 출간과 더불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긍정적인 평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용의 타당성이나 적실성에 의문을 던지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제도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옳지만 이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다른 요인들의 중요성을 폄하하거나 왜곡했다는 반응들이었다.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비판을 받았던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의 재레드 다이아몬드나 저명한 개발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의 서평이 대표적이다.
한편, 보수주의 진영에서 명성이 높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경제 성장과 관련해 정치 제도가 중요하지만 이때의 핵심은 법적 안정성이나 강력한 중앙 정부이지 다원주의나 민주주의는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경제 발전이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는 이 책의 핵심 주장에 불편한 심경을 내비친다. 후쿠야마가 이 책의 저자들과 달리 착취적 정치 제도 위에 놓인 중국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도 대중의 지배, 곧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는 다른 약점도 있다. 이 책은 제도와 정치가 중요하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역사적 사실들과 대조하여 입증하는 논증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논증은 사후적 설명으로는 훌륭하지만 개념과 개념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특정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완벽한 해석을 내놓는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가설을 제시하고 모형을 세운 후, 현실의 자료들을 설명 변수와 피설명 변수로 재구성해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확인하고 나아가 정책 효과까지도 예측하는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아제모글루 자신이 이러한 방법론을 가장 잘 구사하는 학자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서술적 접근법을 선택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각 사회의 경제적 운명을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의 일관된 틀로 설명해 줄 거대 담론(grand theory)에 대한 학문적 욕심 때문 아닐까.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논증의 정밀성이나 완성도가 약해졌다.
(기존의 여러 연구 성과들을 경제학자의 정체성으로 한데 꿰어 자신의 대담한 가설을 멋지게 입증하는 솜씨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폴 크루그먼의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예상한·한상완·유병규 옮김, 엘도라도 펴냄)를 권해 드린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가장 크게 아쉬운 부분은 제도와 인센티브의 문제이다. 아제모글루와 로빈슨의 제도는 '너무 큰' 제도이다.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는 미국과 멕시코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지만, 한국과 일본이나 미국과 스웨덴의 차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우리 사회가 '작은 미국'이나 '큰 스웨덴'에 가까운 방향으로 진화하기를 원하고, 그 이행 경로를 모색하려 한다면 제도에 대한 정교한 개념화와 더 미시적이고 세분화된 유형화가 필요할 것이다.
경제 발전의 궁극적인 원동력을 사유 재산권과 인센티브에만 맞춘 것도 불만이다. 이 책에는 사유 재산권(90번)이나 인센티브(125번)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에 비해 신뢰(10번)나 협동(3번), 조정(5번) 등에 대한 언급은 아주 적다. 그러나 나라의 부가 커지려면 사람들의 이기적 동기 뿐 아니라 신뢰, 평판, 조정 등도 대단히 중요하며, 경제적 이해관계와 자원 배분의 조정은 시장에서의 가격 기구 이외에도 계약, 협상, 법률 등 다양한 양상을 띠며 이루어진다. 또 조정의 구체적 방법론에 따라 그 성과에는 큰 차이가 일어날 수도 있다. 최근 경제학계에서 제도 경제학이나 행동 경제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실의 복잡성을 담아낼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아쉽게도 이러한 연구 성과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의 미래를 위한 선택은?
그럼에도,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미덕은 대단히 크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갈등과 투쟁은 경제에 해로우며 모든 문제의 해법은 시장에 있다는 믿음이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힘을 얻고 있다. 속류화된 주류 경제학이 경제학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저명한 '진짜' 주류 경제학자로부터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일은 대단히 값지다.
첫째, 이 책은 시장의 활력과 합리성을 강조하지만 시장이 서 있는 사회적 기반의 중요성에도 주목한다. 저자들은 강도 귀족과 독과점이 지배하던 19세기 말 미국의 경험을 예로 들어 자유로운 시장에 대해 적절한 사회적 개입이 없을 경우 시장이 소수 기업에 지배당하고 포용적 색채를 잃을 위험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시장이 민주주의에 의해 관리되고 조정되어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둘째, 이 책은 모든 종류의 갈등과 투쟁을 한데 묶어 성장을 방해한다며 비난하는 안이한 인식을 뛰어넘어 경제 성장과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투쟁과 그렇지 않은 투쟁으로 구분한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에서의 투쟁이 권력을 쟁취해 나머지 다수를 희생시키더라도 소수의 배만 불리려는 이전투구였다면, 과거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광범위한 연합 세력의 영향력을 관철시켜 권력에 대한 견제 수단을 도입하고 포용적 정치제도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바람직한 투쟁이라고 본다.
셋째, 저자들은 흔히 '대중 영합주의'로 폄하되는 포퓰리즘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아르헨티나 등의 사례를 들어 포퓰리즘이 시장의 활력을 해치고 성장의 동력을 갉아먹는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들은 포퓰리즘보다는 정경 유착이나 금권 정치가 더 큰 문제라고 본다. 또 제3세계 포퓰리즘이 실패한 원인은 대중의 이익을 구현할 다원주의 정치 체제가 수립되지 못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권력이 독점된 상황에서의 포퓰리즘은 이미 생산된 부를 갉아먹는 해악이지만, 권력이 광범위하게 분산된 다원주의 체제에서의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구현인 셈이다. 이들이 다양한 사회 운동 진영과 노동조합의 결집을 통해 광범위한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포용적 제도를 성공적으로 수립한 브라질 룰라 정권의 경험을 높게 평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포용적 경제 제도를 통해 가난에서 번영을 일군 대표적인 나라의 하나로 한국을 거론하며 적지 않은 지면을 쓰고 있다. 이들의 논의 중에는 경제 성장의 원인이나 독재 정권의 공과를 놓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논쟁에 일정한 시사점을 주는 부분도 적지 않다.
아제모글루와 로빈슨은 특히, 국가의 성공을 지도자의 개인적 특징에서 찾는 시각을 경계한다. 이들은 지도자의 지식, 개인적 성품, 철학으로부터 특정한 경제 정책이나 정책 노선의 선택을 이끌어내는 입장에 맞서 지도자의 지지 기반과 제휴 세력 그리고 그가 직면하는 정치적 제약 조건 그리고 해당 국가의 역사적, 제도적 조건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가 착취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과거 독재 정권 시절의 한국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기억해 둘 만하다. 이 당시 한국의 경제 발전은, 쿠데타 이전부터 존재하던 포용적 경제 제도, 착취적 경제 제도의 기반인 지주 계층의 몰락, 포용적 경제 제도에 호의적이던 산업 자본의 성장, 북한과의 체제 경쟁 및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지속적인 압력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렸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가 현재 시점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저자들에 따르면, 역사란 가변적인 것이어서 포용적 경제 제도도 오랜 기간 착취적 정치 제도 속에 놓이면 다시 착취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마침내는 성장이 멈출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포용적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를 가장 꽃피웠다던 미국조차 지난 수십 년간 정치에 대한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탄탄해 보였던 정치 제도의 포용적 성격이 약화되고 결국 성장 잠재력마저 우려되는 상황에 놓였다. 아제모글루와 로빈슨도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출간을 계기로 운영 중인 블로그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가기)
그런데 우리는 미국보다도 포용적 정치 제도의 뿌리가 훨씬 취약하다. 한편에서는 권력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행사를 막을 확고한 제도적 기초를 마련해 어렵게 쟁취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더 이상 변질되고 퇴행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다수 집단과 연합 세력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는 정치 과정과 정치 제도를 세움으로써 사회 경제적 약자의 권리를 돌볼 실질적 민주주의를 본격화해야 할 시점이다.
이 점에서 오는 12월의 대선은 각자가 지지하는 특정인의 당선 여부도 중요하겠지만 다수 집단의 이익을 제대로 반영할 정치 제도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시민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경제적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해 줄 정치 세력에 표를 주고, 정치 세력은 지지 계층의 목소리와 이익을 제대로 반영할 정치 제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청사진을 보여줘야 한다. 최근 대선과 관련해 나오는 이러저러한 목소리 중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 대표제의 도입에 유독 눈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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