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이지훈 유고집 1부 <내가 쓴 것 : 잘 생긴 천재의 삐딱하게 영화 보기>의 표제로 쓰인 영화 <내가 쓴 것>에 관한 리뷰를 펼치면 느닷없이 이런 문장이 우리 앞에 다가선다.
"다양한 수용자들의 해석에 의해 하나의 작품이 다양한 가치와 중첩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작품에 가해지는 단 하나의 해석, 또는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석들이 정당화되는 수용자 중심의 텍스트에선 작자의 의도는 그가 자라온 환경, 그를 둘러싼 각종 사회적 담론, 그의 작품 자체,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상과 해석 등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갖가지 원인들 속에 묻힌 단지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그 작품의 주체가 누구인가, 도대체 그 작품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별 가치가 없어진다."
| ▲ <내가 쓴 것>(이지훈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2011년 6월 30일, 영화 잡지의 편집장, 영화평론가, 작가로 필명을 떨쳤던 이지훈이 세상을 떠났다. 2007년 1월 발발한 뇌종양으로 투병한 지 4년 만이다. 이 유고집의 저자이기도 한 이지훈과 나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지금은 폐간된 영화 잡지 <필름 2.0> 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그는 나의 직장 상사였다. <스크린>,
해서는 안 될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지훈의 유고집을 그가 세상을 등지기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2011년 6월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몸을 거의 잠식하여 망연히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나는 그가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면 꼭 유고집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불경한 다짐은 <필름 2.0>을 함께 만들었던 동료들과 그의 소생을 기원하며 매달렸던 일들의 매듭이 꼭 유고집을 내는 것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2011년 6월 그러저러한 상념들로 머리가 복잡하던 와중에 이지훈은 삶의 끈을 높았고, 나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이지훈의 소생을 바랐던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영화 저널리즘에 투신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필름 2.0>의 선후배, 동료들에게는 퍽 중요했던 한 시절을 관류하는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지훈은 10년 가까이 몸담았던 <필름 2.0>의 최장기 편집장이었고, 그 잡지의 방향과 색깔을 만들었던 대표 에디터였다. <필름 2.0> 이전에 거쳤던
지난 일들을 들춰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단지 들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쌓인 글들을 모아 시시때때로 책을 내는 여느 글쟁이들과 달리 왕성한 생산력을 가졌던 이지훈은 단 한권의 책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래야할 이유는 더욱 확실했다. 이지훈과 나, 그리고 동료들이 <필름 2.0>에서 보낸 시간은 모질고 팍팍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던 날, 나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겐 고생은 고생으로 그칠 뿐이며, 실패는 성공의 씨앗이기는커녕 담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리라는 것을 그곳에서 보낸 8년이 알려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지훈이 2007년 성공적인 종양 제거 수술 이후 2010년 종양이 재발하여 투병을 시작했을 때에도 그저 고생은 고생으로, 실패는 실패로 귀결되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유고집은 비관조로 치달았던 우리들의 쓰라린 역사를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하나의 전기(轉機)가 아닐까 하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지훈은 좀 별스런 글쟁이였다. 그는 새 것에 민감했고, 때로는 변덕스럽기까지 한 대중을 상대하면서 신선함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쓴 강인한 사람이었다. 자기 글을 쓰기보다 남의 글을 읽고 고치는데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편집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많은 글을 남겼을 테고, 필명도 더 떨쳤을 것이다. 그 생산량이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1차 수술 후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듯 보였던 2008년부터 필자로 복귀하여 왕성하게 글을 썼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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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피-엔드>(이지훈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유고집을 기획, 편집하면서 느낀 것은 귀감이 될 만한 좋은 글을 많이 썼지만 저널리스트 또는 글쟁이로서 이지훈의 존재는 단편적인 몇 개의 글만으로 요약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고집의 출간을 마친 지금도 나는 인간 이지훈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이 유고집에 실린 그의 글도 한 마디로 정리되지 않는다. 우주와 인간의 섭리를 야심적으로 파고든 형이상학적 글쓰기부터 자잘한 일상의 조각들로부터 출발한 객담,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독야청청 유별난 시각을 극단으로 붙인 글들까지 그 색깔이 총천연이다.
사실 이지훈은 정통적인 시각을 지닌 평론가는 아니었고, 남긴 글들의 상당수도 정론적 성격의 비평과 거리가 있었다. 프리랜서 필자로 기고하기 시작했던 <스크린> 시절의, 다소 경직된 글들을 제외하면 항상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에 기초한 정형화되지 않는 글을 썼다. 따라서 이지훈에게 익숙하고 그의 글쟁이로서 자질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세계는, 만인의 공감을 자아낼 객관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법한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오독(誤讀)'에 가까운 영화읽기에서 확인된다. 이 서평의 서두에 인용한 '수용자 중심의 텍스트 해석'은 적극적 오독의 사례들이 될 것이다. 그 자신이 창조적 오독으로 부르기도 한 이와 같은 별종적 발상들은 유고집에 수록된 다채로운 글들에 융해되어 있다.
이처럼 이지훈은 상상력을 영화 안에서 일구는 창의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인문학적 사고에 바탕 한 꼿꼿한 비평과 소소한 생활사의 한 자락을 글감으로 한 자유로운 발상의 영화 에세이, 대척점에 있는 것 같은 감성의 줄타기가 내가 이지훈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또한 이 유고집에 수록할 글들을 선별하는데 적극 준용한 기준이기도 하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저마다 다르게 진술하는 이야기를 엮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그의 글들은 쉽게 요약이 불가능한 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요약이 불가능한 글, 요약이 불가능한 세계, 요약이 불가능한 인간. 이 유고집의 유익이라면 촌철살인의 통찰과 한 현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했던 사고의 결들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이를 나누는 것은 또한 그의 넋을 달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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