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송년호(71호)는 '2011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독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1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미국의 유수한 잡지가 올해의 인물로 스티브 잡스를 뽑지 않은 것은 적절해 보인다. 넓고 깊은 차원에서 세상을 바꿀 만한 일을 해낸 사람이 올해의 인물로 꼽히는 것이 마땅하니 말이다. 그런데 후보군에도 그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좀 생각해볼 만한 거리다. 그가 죽었을 때 보인 애도가 과장된 면이 있다는 점을 성찰하게 해서다.
개인적으로도 당혹스러웠다. 한 기업인의 죽음에 세계가 떠들썩하게 애도하는 것은 기이한 현상이다. 더욱이 그는 인류의 정신적 측면에 기여한 바가 없다. 더 편리한 세상을 만드는 데 나름대로 이바지한 인물일 뿐이다. 미국에서는 토머스 에디슨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평가가 있었다는 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문제적인 인물임은 분명하다. 화제를 몰고 다니고 논란을 일으키는데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 인물이 유명을 달리 했으니 주목받을 만한데, 그의 삶을 정리한 전기가 마침 그가 죽자 곧 나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적 인물에 대한 전기. 그 자체만으로도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한데, 중요한 것은 이 전기가 상당히 매력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월터 아이작슨이 자신의 반대자들을 두루 취재하고 다니는 사실을 알고 스티브 잡스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탈고가 거의 다 된 무렵,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한 잡스는 곧바로 자신의 전기를 읽지는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이 그 약속을 지키게 했지만 말이다.
▲ <스티브 잡스>(월터 아이작슨 지음, 안진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아이작슨은 스티브 잡스를 일러 내면적 평안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책을 읽다보면 이 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한다. 기이하고 괴팍한 그의 경영 스타일은 칭송받을 일이 아니다. 그의 아내가 솔직히 고백했듯 배려심이 없어 빚어진 추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관계를 맺거나 친하게 지냈던 출판인들 일부가 떠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잡스 같은 경영인, 우리 주변에 숱하게 많다. 이 점이 장점이라 추켜세울 일이 아니다. 아이작슨은 이 점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인도로 여행을 다녀오고, 선불교에 심취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만 핥는 식이었을 뿐이다. 그 정신이 그의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비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스티브 잡스를 이야기하며 이 점을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별 의미 없다.
스티브 잡스 죽음 이후 쏟아져 나온 글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칼럼은 <한겨레> 기자 구본권이 쓴 '히피 자본가 잡스'다. 록밴드 U2의 보노가 말했다는 대로 잡스의 정체는 "마리화나를 즐기고 긴 머리에 샌들을 신고 다니던" 그리고 "다르게 생각할 줄 알았"던 히피였다. 그러니, 잡스는 한마디로 하자면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을 거머쥔 히피라 정의하면 될 성싶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구본준이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960~70년대 반전, 평화, 자유, 사랑을 추구한 히피 중엔 회사를 세운 이들도 있다. '평화, 사랑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내건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제리의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 "당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자연주의 화장품 회사 보디숍의 애니타 로딕, "처녀 같은 미지의 영역을 찾아 발전시키는 게 꿈"이라는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등이 '히피 자본가'로 불린다. 벤앤제리는 친환경 재료를 고집하고, 이익의 상당 부분을 기금으로 조성해 인종 차별, 성차별, 빈곤 등 사회 문제 해결에 투입했다. 미국 국방 예산 1퍼센트를 평화 유지 활동에 쓰자는 제안도 했다. 보디숍은 동물 실험 반대, 환경 보호 운동 등 기업 활동을 사회 운동과 연계시켰다. 파격 마케팅으로 즐거움과 윤리 경영을 추구하는 브랜슨은 내년엔 스스로 우주 여행에 나서며, 이를 새로운 사업 분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성공한 히피는 두 층으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이 거둔 부를 바탕으로 더 나은 세계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무리와, 성취 그 자체에 환호하는 무리가 있다. 아이작슨이나 구본준은 잡스의 히피성을 잘 찾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잡스가 히피 정신을 내면화에 세상을 질적으로 다른 곳을 만들고자 한 무리에는 들지 못했음을 통렬히 비판하지 못했다.
다시 책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그래서 <스티브 잡스>가 올해의 책이라 여긴다. 가치와 정신을 내면화하지 못한다면, 한낱 부와 명성을 누린 인물로 그치고 만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것들이 삶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와 다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데 있다. 가구도 없었다는 그의 황량한 집안은, 기실 스티브 잡스의 내면 풍경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이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트위터에서 본 "한 명이 죽었을 때 100만 명이 슬퍼했지만, 100만 명이 죽었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광고 문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터다. 물론, 이 책이 나에게 더 가치 있있던 것은, 잡스가 그리 못살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나는 그리 살고 있느냐는 성찰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잡스 탓할 일 아니다. 정말, 나나 잘해야 하는 법이다.
더 많은 이들이 <스티브 잡스>를 읽었으면 좋겠다. 단, 삐딱하게, 비판적으로, 냉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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