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 뺨치는 <독일 이데올로기> 미스터리!

[프레시안 books] <독일 이데올로기의 문헌학적 연구>

1. 정문길 선생님이 이번에 발간한 <독일 이데올로기의 문헌학적 연구>(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제목대로 마르크스, 엥겔스의 대표적인 철학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헌학적인 연구서이다. 그 가운데 첫 논문이 발표된 지 무려 20년 만에 그동안 발표한 논문들이 마침내 하나의 책으로 묶였으니 실로 '학문적인 연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선생님의 후기를 보니, 엄혹한 시절 이 땅에서 마르크스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겪었던 말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 선생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나 같은 후세대들이 그 캄캄한 밤 한가운데서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고 생각되니, 그 노고에 다시 한 번 깊이 머리 숙여진다.

학교 다니던 시절 잡지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나로서는 찾아 볼 수 없던 어떤 것을 선생님은 보았다는 것에 경탄과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 선생님의 지극히 간결한 글 속에 말하고 싶지만 말 할 수 없었던 것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느낌 때문에 그것을 찾아 안타까이 헤매었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2. 더욱이 <독일 이데올로기>는 나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최근 필자가 속한 학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새로운 전집을 번역하는 것이 시대의 사명에 속한다고 결정했다. 학회가 내게 번역의 임무를 맡긴 책이 바로 <독일 이데올로기>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의 문헌학적 연구>(정문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이 책의 1권 1장에 해당되는 '포이어바흐' 부분은 여기서 마르크스의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이 태동하였다고 하여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어서 여러 군데서 이미 번역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이 책의 전체의 번역이 나오지 못했다.

그간 국제적으로는 1932년 소련과 동독의 마르크스 엥겔스 연구소가 공동으로 편찬한 구판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 중 1부 5권이 <독일 이데올로기>의 권위 있는 텍스트로 간주되어 왔다. 정문길 선생님의 책에서 충분히 밝혀 놓은 것처럼 이미 1960년대부터 문헌학적인 연구의 결과 이 구판 텍스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1960년대 사회주의 진영이 사회주의 사상의 운명을 걸다시피 시작했던 새로운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 신판)의 편찬 작업 중에 <독일 이데올로기>는 완전히 새롭게 편집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독일 이데올로기> 속에 처음으로 등장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이 오롯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그간의 문헌학적인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여 이 책의 전체를 번역해야 한다는 학회의 명령 아닌 명령을 나는 기꺼이 수행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나는 현재 몇 명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이 책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번역의 바다에서 풍랑에 시달릴 때마다 그동안 선생님이 조사, 연구해 놓은 문헌학적인 연구 성과들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3. 선생님은 이 책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의 생성사와 연관하여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의 정확한 저술 시점은 언제이고 그 동기는 무엇인가? <독일 이데올로기>는 잡지의 원고로 저술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독자적인 책으로 저술되었는가?

공저로 알려진 이 책의 저술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이 책은 왜 출판되지 못하였는가?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집요한 노력은 어떠했는가? 그들의 사후에 남겨진 수고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보존되었고, 어떤 인연을 만나 다시 하나의 책으로 출판되었는가? 그런 중에 혹시 산실되어 찾을 수 없는 부분은 없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라면 독자가 직접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이런 문제들은 드라마틱해서 마치 탐정 소설을 읽는 듯한 흥분을 일으키니까 굳이 내가 독자의 읽는 즐거움까지 뺏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번역이라는 아마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에 도전한 나나 공동 번역자들이 선생님의 책에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문헌학적인 실체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1932년의 구판 MEGA <독일 이데올로기>가 가진 문제점은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미 여러 논문들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그런 문제점을 극복하여 <독일 이데올로기>의 문헌학적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그동안 있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그 실체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 중 대표적인 시도는 바로 신판 MEGA 1부 5권 <독일 이데올로기>를 편집하기 위한 동베를린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IML/B)의 노력이라 하겠다. 이 연구소의 노력으로 이미 1972년에 시쇄본(Probeband)이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이 작업은 국제 마르크스 엥겔스 재단(IMES)의 4개 핵심 기관 중의 하나인 트리어의 칼 마르크스 하우스(속칭 '독일-프랑스 MEGA 작업 그룹')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 그룹의 노력으로 마침내 2004년 앞의 시쇄본과는 다른 잠정판(Vorabpublikation)이 발간되게 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새로운 편집본들조차 실험적인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우선 이 편집본들은 대체로 구판의 1장 '포이어바흐' 부분과 2장 '성 브루노' 장에 대한 재편집에 한정되었다. 나머지 1권의 3장 '막스 슈티르너' 그리고 2권 '진정 사회주의자' 부분은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잠정판이 나온 뒤에도 완결본이 나온다는 몇 차례 예고가 있었지만 결국 아직까지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완결본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문제는 실험적 시도들에서 소화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는 약간의 문제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해 거의 최종고의 형태로 편집된 수고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이미 실험적으로 재편집된 포이어바흐 부분 자체에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너무나 많은 이견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완결본 발간이 지체되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의 연구를 참조하여 그 이유를 소개하자면, 이 1장 '포이어바흐' 부분은 마르크스가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저술하려 했던 부분이 아니었다고 한다. 먼저 2장 '성 브루노' 부분과 3장 '막스 슈티르너' 부분이 작성되던 도중에 마르크스,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와 자신들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낼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 결과 나중에 가서야 2장이나 3장 가운데 포이어바흐와 관련된 부분들을 끄집어내어 독립적인 장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 책을 발간하는 작업 자체가 포기되면서 이 부분은 미완성인 채로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마르크스, 엥겔스가 마음속에 그렸던 원래의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 특히 포이어바흐 장의 실체를 찾는 작업은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이 부분에 대한 실험적인 편집본으로 제시된 여러 종류의 시도들은 불가피하게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고 그래서 누구도 선뜻 어느 것이 권위 있다고 확정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 <독일 이데올로기>의 문헌학적인 실체와 관련하여 논란 중인 핵심적인 문제를 여기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구판 MEGA는 포이어바흐와 관련된 마르크스의 수고들을 주제에 따라 재구성하려 했다. 반면 신판 MEGA는 가능한 한 마르크스 엥겔스가 남긴 페이지 순서를 그리고 만일 순서가 결여되면 수고의 작성 날짜 순서를 지키려 하였다.

전자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포이어바흐 비판을 전체적으로 구성해주지만 그게 과연 마르크스, 엥겔스의 본래 구상이었는가는 의심스럽다. 반면 후자는 그들의 의도를 존중한다는 뜻이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본래 마르크스, 엥겔스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는 독자 자신이 헝클어진 수고들의 늪 속에서 찾아 재구성해야할 부분으로 남겨진다.

둘째로 구판 이후의 편집자들은 대체로 신판의 원칙을 지키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현재 가장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신판 잠정본은 이 원칙을 너무 밀고 나갔다. 그 결과 신판 잠정본은 구판에서 내용상 가장 흥미로웠던 마르크스의 '서문(Vorrede)'을 탈락시키는가 하면, 구판에서 너무 초고 상태에 머무른다고 보아 부록에 집어넣었던 부분('메모와 초안')이나 수고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생전에 이미 떨어져 나가서 독립적으로 출판된 부분('브루노 바우어에 반대하며')까지도 모두 텍스트 속으로 다시 수용했다.

특히 잠정판은 신판의 원칙인 작성의 순서를 지킨다는 원칙을 밀고 나가서, 포이어바흐 장의 본문에 해당되는 부분이 포이어바흐 장의 서문보다 먼저 나옴으로써 마치 머리가 배에 붙어 있는 듯한 기형의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이런 난처한 논란들 가운데서 정문길 선생님은 이 책의 결론으로 나름대로의 편집 원칙을 제안한다. 우선 선생님은 신판의 구성 원칙에 찬성한다. 선생님은 주제별로 재구성한 구판을 마르크스 엥겔스의 본래 의도를 유린한 것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선생은 신판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점정본도 비판한다. 잠정본이 무리하게 끼어 넣은 부분을 제거하고, 순서에 있어서도 서문 부분을 본문 부분의 앞에 두고자 한다. 특히 여러 이고(異稿)들이 병존하는 서문 부분과 관련해서도 수고에 표시되어 있는 '종이(보겐, 페이지와 다름)'의 번호를 가능하면 지키려 한다. 결과적으로는 선생님은 간명한 원칙에 따르면서도 그 어떤 편집본들과도 다른 독특한 편집본을 구성하였다.

5. 나는 문헌학적 차원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학자로서는 정문길 선생님의 제안에 더 신뢰감을 느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비록 괴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신판 잠정본이 가진 국제적인 권위를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번역자로서 대중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 구판 MEGA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다. 솔직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선생님의 제안도 있으니 한국에서 우리들끼리라도 <독일 이데올로기>의 번역과 관련하여 편집의 문제에 대해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다행히도 정문길 선생님이 어느 정도 정리를 해 주셨기에 큰 혼란은 없을 것 같아 나는 정말 고마움과 더불어 후련함을 느낀다. 나는 선생님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역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 헤겔 좌파들 사이의 논쟁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 유물론이 사상적으로 태동하게 되었는가가 밝혀지면서,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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