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1978년까지 핵무기 개발 추진했다"

76년 '중단' 약속 깨고 비밀리에…CIA 문서로 드러나

한국이 1970년대 초부터 핵개발을 추진하다가 미국의 압력과 설득으로 1976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박정희 정부는 최소 1978년까지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것으로 25일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기밀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피터 헤이즈 미 노틸러스 연구소 소장은 CIA 문서를 분석한 글을 이날 발간한 영문계간지 <글로벌아시아>(가을호)에 게재했다. (☞원문보기)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침투 사건(김신조 사건)을 겪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미국이 주한미군 7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키는 것을 보고 자체적인 대북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핵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이 1976년 핵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남한과의 모든 관계를 중단할 것이라고 강력히 압박하면서 결국 그해 말 핵개발을 포기했다. 같은 해 8월 '판문점 도끼 사건' 직후 북한에 대한 미국의 단호한 대응을 본 박 전 대통령이 미국의 안보 공약을 다시 신뢰하게 된 것도 핵 포기의 이유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CIA 문서는 이와 같은 기존의 통념을 깬다. 박정희 정부는 1977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지미 카터가 주한미군 2사단과 전술핵무기 일부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잠시 접어둔 핵개발 카드를 다시 꺼냈다. 문정인 교수와 헤이즈 소장이 소개한 1978년 작성 CIA 문서에는 "(한국의 정책기획자들은) 한국의 자주국방은 결국 핵무기 개발로 가능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되어 있다.

보고서는 또 "(주한미군) 지상군 철수 문제와 관계없이 한국은 미국이 (북한의 위협에 맞서) 핵무기를 쓰려고 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며 "미국의 핵우산에 관한 한국의 신뢰가 약해지면서, 특히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핵무기 옵션을 추구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힘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CIA 보고서는 1977년 한국이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중심으로 미사일 사거리를 늘리는 연구를 재개했다고 전하며 핵무기 개발과 관련됐을 것이라는 의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박정희 정부는 또 1979년에도 미국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도용하기 위해 미국 기업으로부터 설계도와 설명서 등을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정부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가 암살된 후 들어선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미국이 싫어하는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폐기함으로써 한국의 핵개발 움직임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국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최근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군사적 도발을 한 후에는 핵보유론, 핵 재처리 능력 보유를 통한 핵주기 완성론 등이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문정인 교수와 헤이즈 소장은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하면 1970년대 후반과 마찬가지로 한미동맹이 크게 손상될 것이며 중국·일본 등이 개입하는 신(新)냉전 체제가 돌아올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두 사람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재래식 억지력이 더 중요하며 핵개발은 오히려 북한의 비핵화를 어렵게 할 뿐이라는 게 CIA 보고서가 주는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희가 1976년 핵개발 포기 약속 후에도 핵무기를 추구했다는 사실은 언론인 출신인 돈 오버도퍼 미 존스홉킨스대 한미관계연구소장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 이미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팀을 해산하지 않고 다른 임무를 부여했으며, 핵심 참모들에게 1981년 상반기까지 핵무기 개발을 완료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에 공개된 CIA 보고서는 그러한 사실이 미국 정부 문서로 처음 확인된 것이다.

한편 이 CIA 보고서는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및 전술핵무기 철수를 추진하자 CIA, 국방부 등 안보·국방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저항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도 있다. CIA "미국의 모든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은 '자주국방'으로 나아가겠다는 박정희의 결심을 명백히 강화시킬 것"(77년 8월)이라는 식의 보고서를 지속적으로 작성함으로써 전술핵무기 철수 반대 논리를 제공했다.

다음은 문정인 교수와 헤이즈 소장의 <글로벌아시아> 기고문을 전문 번역한 것이다.

▲ 기밀해제된 CIA 문서와 박정희 전 대통령 ⓒ글로벌아시아

박정희, CIA 그리고 핵폭탄 - 문정인, 피터 헤이즈

최근 기밀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는 1970년대 한국의 핵개발 시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다. 미국이 [한국의] 핵 프로그램이 중단됐다고 여긴 후에도 최소한 2년 간 이 프로그램이 계속됐다는 것이다. 한국 내 일부 세력이 '핵 옵션'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피터 헤이즈 노틸러스 연구소 소장이 [이 사건이] 오늘날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논한다. <글로벌아시아 편집자주>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 말기의 한국 핵확산과 관련된 미국 외교전문(電文)들이 최근 몇 년 간 공개됐다. 이 문서들은 특히 1976~78년 한국 핵무기 개발 시도에 대해 그간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최근 한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미 정부의 애매모호하고 약화된 대한(對韓) 안전 보장이 박정희의 공격적인 핵 관련 행동을 촉발시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베트남전 종료와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이 전술핵무기 등 주한미군의 핵심 전력을 한국으로부터 철수한다는 결정으로 인해 당시 미국의 안보 공약이 약화됐다. 박정희는 그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한국이 스스로 핵 억지력을 갖기를 원하게 됐다.

CIA의 문서는 홍성걸 국민대 교수가 2011년 발표한 중요한 연구의 근간을 이룬다. 홍 교수는 1975년 이후 시기를 포함해 박정희의 핵무기 생산 노력을 다루고 있다. 1975년은 미국이 만약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한다면 한미 안보동맹은 끝장 날 것이라고 경고한 해다. 하지만 홍 교수의 결론에 따르면, 박정희는 한국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했다. 박정희가 '핵 옵션'을 가지고 장난친(toying) 것은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눈에 그를 제재가 필요한, 예측할 수 없고 심지어 위험한 인물로 보이게 했다.

<글로벌아시아>는 최근 기밀이 해제되어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와 미국의 대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는 일련의 CIA 문서들을 연구했다. 이 문서들은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많은 양의 미사일 및 핵분열 물질, 관련 기술의 확산이 1976~78년까지 계속됐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의 핵개발이 1976년 중단된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다.

CIA 문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78년 6월 작성돼 25년의 비밀 지정 기간을 거친 후 2005년 공개된 '한국 : 핵개발과 전략적 의사결정' 보고서다. 이 문서는 공개된 이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인터넷상에 머물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 보고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검토한다.

한국 정부가 공공연히 핵무기[개발]을 입에 올리고 있는 지금, 박정희의 실패한 핵개발 전략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박정희의 시도는 잘못된(misguided) 것이었으나 안보에 대한 실질적인 우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의 군사적 공격에 대응하는 한국과 미국의 역량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은 군사적 충돌이 발발할 경우 자신들이 패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핵무기 프로그램 재개만큼 북한의 핵무기[의 개발과 보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한국은 박정희의 핵개발로 인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 역사를 반복할 이유는 없다.

CIA 문서에 드러난 핵심적인 사실

1974년 말 박정희는 핵무기 기술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그러나] 1976년 1월 그는 재처리 기술 획득을 위한 프랑스와의 협상을 종료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지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한국의 핵개발 활동은 1976년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것은 주한미군 제2보병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핵무기까지 가져가는데 대한 한국의 대응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다. 홍성걸 교수의 연구가 이를 보여줬다.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후 미국이 한국을 버릴까 두려워했다. [당시] 북한의 공세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1968년 1월 청와대에 대한 북한 특수부대의 공격[김신조 사건]이 있었고, 사흘 후 미 군함 푸에블로 호가 나포된 것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게다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한국과의 사전 협의 없이 중국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박정희로 하여금 '미국이 한국의 등 뒤에서 북한과도 채널을 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했다. 1974~75년에는 휴전선에서 북한의 남침 땅굴이 발견됐고, 박정희는 1974년 부인 육영수가 저격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미국이 1971년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7보병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했으며 추가적인 철수를 논의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인들과 언론은 박정희의 독재체제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박정희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1977년 1월 26일 카터 대통령이 미군 2보병사단과 함께 전술핵무기를 철수시키자 한국은 미국을 더 믿지 못하게 됐다.

CIA 보고서는 "(한국의 핵 개발자들이) 전체적으로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도, 한국 정부가 핵 옵션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개발] 활동은 계속할 수 있고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북한을 위협할 수 있는 미사일을 획득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수행됐고, 핵 옵션을 열어두기 위해 장기적인 핵연료 주기 관련 기술도 계속 추구했다.

CIA의 1978년 보고서 내용 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현재 핵무기 설계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증거는 없다.
△ 한국이 우라늄 농축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증거는 없다.
△ 재처리 능력 획득과 관련해 현재 진행중인 활동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 핵분열 물질을 저장중이라는 증거는 없다.
△ 무기 제작 작업의 증거도 없다.


하지만 CIA는 한국이 1978~80년 동안 추후의 핵무기 획득 완료 시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에 직면했다고 결론지었다. CIA는 "향후 도래할 [한국 정부의] 결정 사항 중에는 초기 모델(프로토타입)을 제작하고 지대지 미사일을 다량 생산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 핵 연구 인력에 들어간 실질 투자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종합적으로 CIA는 "미국의 안보 공약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북한이 가하는 위협의 급박성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CIA가 1978년 당시 박정희의 핵 프로그램을 비교적 느긋하게 보고(relaxed interpretation)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널리 퍼진 소문 - CIA가 박정희의 핵개발 야심을 막기 위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을 지휘했다는 소문과 상반된다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1단계 : 핵미사일 프로그램

1974년 5월 '백곰'이라고 명명된 미사일 프로그램이 박정희의 명령에 의해 시작됐다. 1975년까지 '890계획'이라는 암호명으로 핵무기 전용 [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고 CIA는 말한다. 이 프로그램은 미사일 설계, 핵탄두, 화학무기 탄두 등을 담당한 국방과학연구소(ADD) 산하의 3개 팀에 의해 수행됐다. 재외 한국인 과학자들이 1975년 중반까지 소집되어 탄두 개발과 고폭 장치, 컴퓨터 코드 등의 작업을 맡았다. 탄두 설계에는 약 50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참여했고, 화학무기 탄두 팀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1976년 중반 미사일 팀은 250명을 넘었다.

CIA는 "미사일 시스템 개발이 초점이었다"면서 정확히 어떤 타입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다수의 핵 관련 장치를 얻는데 관심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더욱이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핵무기의 물리적 통제 및 지휘계통상 통제에 대한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는 점은 명백하다"고 밝혔다.

1976년 12월 완공된 국방과학연구소의 미사일 연구 개발 기지에서는 미국의 [지대공 미사일인]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지대지 미사일로 개조하는 작업이 진행됐다고 홍 교수는 전했다. CIA는 이 미사일은 개조하지 않아도 이미 평양을 타격할 수 있었다면서, 한국의 개조 작업은 적의 지휘부와 350km 내의 시설물을 타격할 수 있도록 사거리를 늘리는데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가진 미사일 기술을 획득하려는 시도는 1975~76년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미국은 미사일 사거리를 180km, 탄두 무게를 440kg로 제한하라고 국방과학연구소를 압박했다. 1976년 5월이 되자 설계도 초안은 거의 완수됐다. CIA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에 대한 기술적 세부 사항을 알아낼 수 있었다. CIA는 보고서에서 "로켓 엔진과 기체, 통제 시스템, 비행중 유도 시스템(onboard guidance system)은 대폭 개선되거나 완전히 다시 설계됐다"며 "국방과학연구소는 로켓 추진과 생산 기술에서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크기를 줄인 엔진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또한 프랑스 회사로부터 생산기술을 사들임으로써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록히드사(社)의 추진체 공장을 획득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반대를 교묘히 피해갔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미국 회사로부터 기술을 획득해 기존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의 추적 레이더 장치를 개조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프로그램을 노출시킬 위험이 너무 크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CIA 보고서는 지적한다. 대신 국방과학연구소는 "기존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에 쓰인 진공관 기술 대신 고체전자공학(solid-state electronics)을 이용한다"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1976년 12월 프로그램이 중단될 때까지 국방과학연구소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못했고 1977년 9월 새로 추진하라는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잠정 중단됐다.

핵연료 주기 연계 문제

1974년까지 한국은 대량의 핵발전소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1년에 1기의 핵무기를 생산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핵연료 제작 및 재처리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은 벨기에로부터 시범적으로 재처리 시설을 구매하려고 했으나 미국과 캐나다는 이 계획을 포기하도록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을 압박했다.

미국은 특히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캐나다의 연구용 NRX 중수로 방식 원자로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플루토늄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1975년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소규모의 혼합형(플루토늄-우라늄) 핵연료 시설 도입을 놓고 벨기에와 협상했다. CIA는 "벨기에 핵시설은 한국에 핵연료 주기 기술의 마지막 열쇠를 쥐어줄 것"이라고 보고서에 썼다.

NRX 원자로 도입 계획은 캐나다가 한국과의 대화를 중단하면서 틀어졌다. (이 원자로는 인도가 1974년 핵실험에 사용한 플루토늄을 추출했던 것과 같은 모델이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재처리 시설과 혼합산화물 연구 단지 계획 모두를 포기하게 하려고 핵발전소에 대한 자신들의 재정적인 영향력을 이용했다. CIA는 "청와대의 입안자들은 (이 시설들을) 핵무기 개발을 위한 군 내 비밀 프로그램의 필수 요소로 봤다"고 서술했다.

박정희는 미국이 외교적으로 강력히 개입한 이후인 1976년 12월 [NRX 도입] 추진을 중단했다. 하지만 CIA는 "박정희가 '890계획'을 중단하기로 한 것은 주로 국방과학연구소 성과가 초라했고 즉각적인 핵무기 개발의 필요가 없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가 프로그램을 중단한 가장 큰 이유는 1975년과 1976년 미국이 보여줬던 확고한 태도 때문이었다. 제임스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은 1975년 8월 27일 박정희를 만났다. 두 사람은 사실 한국이 북한보다 핵공격에 더 취약하지만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핵무기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어떤 말이든 해도 좋으며, 한미 연합군은 "핵무기 사용 없이도 북한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다"는 데에 합의했다.

박정희는 또한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두 명의 미군 병사를 사망케 한 북한의 공격[판문점 도끼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에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한국군과 미군은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에 있었고 미국은 북한 해안으로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으며 B-52 폭격기가 매일 출격해 폭격 훈련을 했다.

미 국무부 내부 문건에 따르면 이 사건의 영향, 그리고 미국이 한국의 핵발전소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을 끊을 수 있다는 위협이 결합되어 박정희로 하여금 '890계획'을 시작 2년 만에 끝내게 했다.

'통제 받지 않는 미사일'

CIA 보고서는 또한 박정희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한 내부적 과정도 새로이 밝히고 있다.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내각 수준의 토의는 1969년부터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행시키기로 한 결정은 1974년 후반기 오로지 박정희에 의해 내려졌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CIA는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정책 계획이 "변덕스럽고, 심지어 되는 대로(erratic, even haphazard)"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CIA는 "핵무기 개발과 배치 및 사용에 대한 찬반양론을 평가한 연구는 아직 발간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이는 한국 연구 개발 기관들이 일반적으로 너무 '앞서가는 경향'을 보이는데 따라 나타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기관들은 "통제를 받지 않는 로켓(unguided rockets)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 국방과학연구원에 대해 CIA는 "의도적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과장했으며 복잡미묘한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어려움을 과소평가했다"면서 이는 최대한 많은 예산을 타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890계획'이 취소됐을 때에야 비로소 핵개발 프로그램을 철저히 점검할 책임[또는 권한]을 청와대[참모들]에 부여했다고 CIA는 말한다.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의 책임자였던 오원석 청와대 제2경제수석은 내각 차원의 조사를 통해 핵 연구 과정을 합리화하려 했고[일종의 구조조정] 그로 인해 핵 연구기관의 독립성은 축소됐다.

연구기관들은 자신들의 활동으로 인해 한국이 받을 [국제]정치적 리스크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hedging)하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리스크 관리를 시도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한국을 이스라엘에 비유하며, 이스라엘이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미국의 군사 지원은 계속됐다는 점을 내세웠다. CIA 보고서에 따르면, 이 관리들은 "미국은 단기적으로는 무기 개발에 반대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한국의 독립적인 핵능력 필요를 인정하고 허용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1975년 말에야 과거 수동적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던 한국 정부 내의 비공식 그룹은 [핵개발에 대한] 관료제적 적대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결정적 주장은 한미동맹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핵개발에 대한] 반대자들이 부상했다는 CIA의 설명은 부정확할 수 있다. 이 관리들은 저항하기보다 다른 [국제정치적] 행위자들의 도전에 대해 미사일과 핵개발 활동을 보호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점은 역사에 분명치 않게 남아 있다.



2단계 : '890 계획'의 재개

카터 대통령의 당선은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한 상황인 한국 주둔 미 지상군 및 핵무기의 갑작스런 철수를 현실화했다. 실제로 취임 1주일도 안돼 카터는 "한국의 핵[개발] 의도와 고도의 미사일 기술 획득을 위한 노력"에 대한 고려를 포함해 미군 핵무기 철수 계획을 진전시키라고 명령했다. 1977년 1월 29일 공식적인 검토가 시작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한국의 관변 언론은 곧 1977년 5월 '핵 옵션'을 개시해야 한다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CIA는 별도 보고서에서 이 프로파간다(선전)를 '공격적'이라고 규정했다. CIA는 "박정희 정부가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미국을 압박해 [미군] 철군 계획을 재고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국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평했다. CIA는 한국 정부가 실제로 핵무기 획득을 위해 논의중이라는 증거도 없으며, 그런 비밀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개발을 진행한 정황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1977년 8월 미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으로부터의 핵무기 철수가 가져올 충격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CIA가 작성한 '한국에서의 핵무기 철수 영향' 제하의 비망록은 미국의 핵무기 제거가 북한의 전략적 목표와 일치함을 암시했다. 그러나 북한의 지도자들은 미국이 언제든 핵무기를 다시 들여오거나 한반도에 재배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CIA는 덧붙였다. 하지만 한국은 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CIA는 "한국 정부는 핵무기 완전 철수에 대해, 미래의 분쟁에서 핵무기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도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고 적었다.

비망록은 [한미]동맹에서의 급격한 불화가 미국의 무기 세일즈에 얼마나 위협이 될지, 무역 관계를 얼마나 악화시킬지를 설명하고, 심지어 이로 인해 미군 철수가 가속화되고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재개하게 될 수도 있다고 서술했다. CIA는 "미국의 모든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은 '자주국방'으로 나아가겠다는 박정희의 결심을 명백히 강화시킬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 미군 철수 정책을 번복하기 전까지 1977년 9월 1000명의 미군을 철수시켰고 1978년 11월 500명을 추가로 철수시켰다.

1978년 6월 미국에서 전략의사결정보고서(Strategic Decisionmaking report)가 발간될 쯤에는 '890계획'에 참여했던 국방과학연구소의 핵무기 개발자들이 고성능 폭약과 화학전 관련 연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 연구의 목적이] 핵무기냐 비(非)핵무기냐 하는 경계는 불확실했다. CIA 분석관들이 설명하듯 "고폭탄 관련 능력이 개발된다면 이는 한국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했을 때도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과학연구소는 1977년 9월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개조해 사거리를 늘리는 연구를 재개할 것을 승인받았고 미사일 기술자들도 연구에 복귀했다. 1978년 6월 CIA는 국방과학연구소의 미사일 개발자들이 대전에 위치한 국방과학연구소 산하 고성능무기연구소(Advanced Weapons Center)의 6개 중 3개 부서에 분산 배치됐다고 보고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개조된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의 시험 발사를 1978년 4월부터 시작했다. CIA 분석관은 "이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개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또는 실제보다 과장해 선전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로 인해 1985년까지 사거리 3500km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계획을 박정희로부터 승인받았다고 보고했다.

CIA 분석관들은 이런 미사일에 탑재하기 위해 국방과학연구소가 개발할 핵탄두가 어떤 종류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고 털어놓았다. CIA는 "무기 설계는 정교한 작업이기에 수많은 고폭발 실험이 필요하며, 실험을 수행할 기지는 초고속카메라, 플래시 X-레이 시스템, 오실로스코프 등 정밀기기와 발사대 및 벙커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면서 "한국 정부는 몇몇 장비를 획득했지만 이 장비가 어디에 설치됐는지는 불확실하다"고 보고했다.

분석관들은 핵탄두의 크기와 종류는 미사일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들은 한국의 탄두는 핵분열 시스템 때문에 300~350kg[보다 작게 만들 수는 없을 것]으로 제약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한국이 "단순하고 효율적인 설계"라는 제약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한국이 개발한 핵탄두의] 폭발력은 최대 20kt 이상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 CIA 문서 ⓒ글로벌아시아
핵 옵션 유지

CIA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4년 말까지 핵무기를 실제로 만들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단지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결정만을 내린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1977~78년 핵무기를 한국에서 철수시키려는 카터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확보해야 하는 즉각적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없다"고 CIA는 평가했다.

CIA는 한국이 1978년 미국 수출입은행의 자금을 얻어 경수로 원자로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 연료는 우라늄 농축보다 더 쉽고 빠르게 핵분열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CIA는 설명했다. 1974년까지 재처리 플루토늄을 비축하는 것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를 충족시키기만 하면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8년 재처리 공장을 얻기 위해서는 공장을 짓는 길 밖에 없었으나, 미국은 이미 핵 공급 국가들로 하여금 한국에 그러한 공장을 지어주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다. 한국의 초기 원자로에서 핵분열이 되어 사용후 연료가 된 미국의 저농축 우라늄이나 캐나다산 천연 우라늄 역시 미국과 캐나다에 의해 재처리가 거부된 상태였다. 경수로건 중수로건 원자로의 일부를 다른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발각될 위험이 매우 높았다고 CIA는 결론내렸다.

CIA는 또 "1970년대 초 한국원자력연구원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재처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장기적인 핵 발전 개발과 관련된 재처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봤다. 그러나 1978년에도 한국의 많은 기획자들은 한국이 자신들의 방위를 위한 더 많은 책임을 맡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주 국방'은 결국 핵무기 개발로 가능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CIA는 결론내렸다.

또한 CIA는 미사일, 고폭약, 중수로 방식의 원자로에 관한 연구는 단지 연구기관의 [예산 확보 등] 동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 기술을 얻기 위한 시도였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개발하려고 해왔던 핵무기 시스템에 필요한 기술은 매우 복잡했지만, 일부 기획자들은 핵무기 생산까지 가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핵 기술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 점에서 핵 연구 집단에서는 강력한 요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지상군 철수를 [공언한 대로] 완료할지 말지, 북한의 공격 위험과 관련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에 엄청난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CIA 보고서는 "그러나 지상군 철수 문제와 관계없이 한국은 미국이 [북한의 위협에 맞서] 핵무기를 쓰려고 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며 "미국의 핵우산에 관한 신뢰가 약해지면서, 특히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핵무기 옵션을 추구하길 원하는 이들의 힘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시대

미사일 보유국이 되고자 하는 한국의 열망은 1978년 6월 CIA가 전략의사결정보고서를 발간한 후인 1979년까지 계속됐다.

1979년 8월 29일 미 하원의원 앤서니 베일렌슨은 사이런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 정부가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미국 기업으로부터 "미국의 아틀라스 센타우르 미사일 프로그램에 쓰인 세부 장치, 설계도, 설명서, 청사진, 일부 조립품"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베일렌슨 의원은 "또한 [한국이] 미사일 탄두 부분의 물질, 합금, 특정 유도 시스템도 확보했다고 들었다(…) 한국은 현재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고 보완할 수 있는 컴퓨터 장비와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획득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서한에 따라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야망은 지정학적 고려보다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 좌우됐다.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1980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지지를 얻는 게 급선무였다. 이에 전두환은 1981년 한국원자력연구원의 간판을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바꿔 다는 과정에서 그 규모를 축소시켰고 핵무기 프로그램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폐기했다.

오늘에 주는 교훈

CIA 보고서에 나온 이야기들은 단지 역사적 흥밋거리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이 북한의 핵 능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 박정희 철권 독재도, 모든 것을 금방 알아차리는 미국의 승인 없이는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개방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오늘날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은 1978년보다 더 불가능하다.

물론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오히려 [핵개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한다. 그로 인해 미국의 핵무기를 다시 가져오도록 미국을 압박하고, 북한에는 비핵화와 한국 및 국제사회에 협조하라고 하는 최고 수준의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박정희가 핵 옵션을 미국과의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던 초기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는 군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이 핵무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취약성만 더 키울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을 실제 핵 능력을 가진 나라로 만들려고 하기 보다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핵보유국 지위에 오르길 원했고, 그 노력은 역효과만 내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이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을 궁지로 몰게 될 것이고, 아울러 한반도에서의 불안정한 핵 경쟁을 촉발시키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둘째, 박정희의 전략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한국은 실질적인 무기 기술도 거의 얻지 못했다. 또한 미국의 관리들이 근본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에 카터의 철군 정책을 뒤집으려 하는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협박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갉아먹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핵무기를 확산시키려 한다면 한미동맹을 손상시킬 것이고 국제 제재, 무역 손실, 일본의 핵 불보유 공약 약화, 한국의 도시들이 중국과 러시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상황 등 전략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2012년 핵안보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한국의 국격을 떨어뜨릴 것이고, 2014년 한미 원자력협정의 갱신·개정 시도를 어렵게 할 것이다.

셋째, 1976년 8월 북한의 군사적 공격으로 인한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중요한 것은 재래식 무력의 대규모 동원이지 핵 공격의 위협이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무장지대(DMZ)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의 군사적 공격에 대응하는 한국과 미국의 능력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패할 것임을 알고 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한국의 우월한 재래식 군사력은 북한이 핵으로 공격하건 재래식 무력으로 공격하건 억지하고 대응하기에 거의 확실히 충분하다.

박정희가 핵 프로그램을 접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한국군에 대한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보유한 한미연합사령부가 1978년 창설됐기 때문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미군이 자동적으로 개입하고 박정희를 위한 인계철선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했음을 의미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레이건이 1979년 대선에서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재확인한 후 전두환은 모든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했는데, 그것은 핵무기는 동맹 관계를 해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CIA가 리포트를 쓸 때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넷째, CIA 보고서는 미국의 일방적인 [핵무기] 철수는 한국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가동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후인 1991~92년 미국이 핵심적인 재래식 병력만 남겨두고 일방적으로 [전술핵무기를] 철수했을 때에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한국은 핵개발을 재개하지 않았다. 미국의 전술핵무기 철수는 북한에 개입(engagement)할 수 있는 길을 텄고, 그로 인해 10년 동안 북한의 핵확산 속도를 늦췄으며,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이 지금처럼 고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중반 북한은 분명 한국의 핵개발 드라이브를 깊숙이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북한도 초기 핵 프로그램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이 핵개발을 시도한다면 북한 비핵화를 위한 협상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남북간의 핵 경쟁이 벌어진다면 중국, 일본을 포함해 이 지역에 새로운 냉전 상황이 벌어질 게 거의 틀림없다.

미국이 20여년 전 한반도에서 전술핵무기를 없앤 후에도 계속 이어진 북한의 위협 인식은 북한이 미국을 얼마나 불신하고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이 핵으로 보복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낮지만,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엄청난 동기가 된다.

끝으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개선되는 기간 동안 대화와 개입이 북한의 핵무기 능력 획득을 중단시키는데 진전을 가져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역(逆)도 성립한다. 북한은 레이건이 소련과 대결함으로써 냉전의 정점을 찍는 동안, 그리고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미관계를 악화시키는 동안 핵 활동을 가속화했다.

오늘날 정치인들과 전략가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이렇게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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