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10.4선언, 버려선 안 될 역사

[기자의 눈] 굳이 盧 전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까닭

10.4남북정상선언 1주년을 맞은 한반도의 오늘은 우울하다.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붙어 있고, 북핵 문제는 뒷걸음질 치고 있다.

그 책임은 이명박 정부에 있다. 반 노무현 정서에 편승해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가 해 놓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시하고 뒤집는 게 능사인 양 행동하고 있다. 10.4선언도 그중 하나이고, 그로 인해 북한과의 대화는 단절됐다. 기존의 합의는 무시하면서 북한을 향해 왜 대화에 응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9.19공동성명, 2.13합의, 10.3합의 등 북핵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행위자였던 한국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철저히 주변화됐다.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핵무기 미신고에 대한 유감 표명, 에너지 지원 중단 시사 등 미국도 자제하는 강경 태도를 보이며 합의 이행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일 '10.4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행사' 특별강연에서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 것은 그같은 상황에 대한 답답함의 표현이다. 노 전 대통령은 10.4선언과 9.19공동성명을 비롯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미사일방어 체제(MD) 등 외교·안보 분야의 거의 모든 의제를 거론하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다. (☞ 강연 전문)

한반도 평화와 화해·협력의 관점에서 노 전 대통령의 말들은 타당하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최근 김정일 건강이상설을 대하면서 섣부른 말과 행동을 보였다. 이에 대해 누군가 나서서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집단인지를 알릴 필요가 있었는데, 노 전 대통령이 그 역할을 자임한 것 같다.
▲ 10.4선언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뉴스

BDA 때문에 정상회담 늦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도 현재의 상황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교착 상황은 '노무현의 오류'와 '이명박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잘못을 엄밀하게 따져 보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데 긴요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가) 한미일 협력관계를 과시하는 것은 남북관계는 물론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까지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합의해 줌으로써 북한은 물론 중국을 긴장하게 한 것은 바로 노무현 정부였다. 그 외에도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 곳곳에는 실제 자신이 했던 정책과 충돌하는 대목이 적잖았다.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를 해 봐도 온전히 수긍할 수 없는 모순들이 보였다.

현재의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노무현의 오류를 따져본다는 측면에서는 'BDA 사태'에 관한 발언만한 게 없었다. "BDA만 아니었더라면 (남북)정상회담은 훨씬 일찍 열렸을 것이고 남북관계는 훨씬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2005년 9.19공동성명 직후 시작된 BDA 사태는 작년 5월까지 1년 8개월 간 한반도 정세를 옥죄었던 괴물이었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있는 북한 자금을 동결시켰던 미국의 조치는 북한의 국제 금융거래 전체를 마비시켰고, 북한은 이에 반발해 2006년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을 감행하며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만들었다.

핵실험에 놀란 미국은 2006년 11월 이후 북한과 직접 대화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꿨고, 이듬해 2.13합의를 탄생시켰다. 북한이 핵 시설을 폐쇄하면 중유 5만 톤을 지원하는 것을 약속한 것인데, BDA 금융 제재를 먼저 풀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미국 내 강경파들의 농간으로 제재 해제가 늦어지다가 러시아의 도움으로 겨우 약속을 지켰다. 그게 작년 5월이었고, 핵 합의 이행은 그 뒤부터 진전됐다.

MB 정부의 '핵 연계론' 비난할 자격 있나

노무현 정부의 오류는 그때 발생했다. 미국이 대북정책을 바꾼 2006년 11월부터 BDA 사태가 끝나고 핵 시설 폐쇄가 시작된 2007년 6월까지 약 7개월을 허비한 것이다. BDA 해결이 안 되는 게 미국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또 미국의 정책 변화로 남북대화의 여지가 생겼는데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남북관계가 북미관계의 반걸음 뒤에서 따라 간다는 이른바 '반보론'(半步論)은 그 때 나왔다.

노무현 정부는 핵 시설 폐쇄가 시작되고 나서야 움직였고, 그러다 보니 대선을 2개월 여 앞둔 10월이 되어서야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10.4선언의 이행을 위해 부랴부랴 뛰어 다녔지만 임기 만료까지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더라도 뒤집을 수 없는, 뒤집으려 했다간 오히려 정치적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튼튼한 교류협력 체제를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임 사장이 계약을 하면 후임 사장이 이행하길래 그리 되는 줄 알았어요. 근데 국가 CEO는 아니더라구요." 이명박 대통령의 '계약 불이행'은 심각한 문제지만, 그 계약(10.4선언)을 어겨도 별 지장이 없는 상황을 초래한 노 전 대통령의 오류는 별도로 비판받아야 한다. 2006년 11월 이후가 절호의 기회였다는 건 나중에 따져보니 그렇더라는 결과론적 얘기가 아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남북관계에서 기회가 왔다고 얘기했었다. 정상회담이 늦어진 건 BDA 때문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 자신 때문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얽매였던 '반보론'은 더 큰 문제였다. 그것은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를 병행해 푼다는 화해·협력 정책의 대전제를 포기한 것이다. 북핵이 풀려야 남북관계를 가져간다는 노무현 판 '핵 연계론'이었다. 김영삼 정부에서 등장해 이명박 정부가 부활시킨 핵 연계론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미 있었던 것이다.

북한이 핵 합의를 이행시키고 있는데도 노무현 정부는 정상회담 추진은 고사하고 미사일 발사 때 끊었던 쌀 지원을 재개하는데도 한참 뜸을 들였다. 그런 노 대통령이 현 정부를 향해 '역지사지'와 '신뢰'를 말할 자격이 되는지 묻고 싶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특별강연에서 나온 날카롭고 때론 '급진적인' 얘기를 재임 당시 실천하지 않았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도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MB 변화시킬 수 있나

끝으로 이걸 묻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말을 듣고 바뀔까? '전임 사장'의 뜻을 새삼 깨닫고 먼지 쌓인 계약서를 다시 들춰볼까? 아니다. 이 대통령은 무시를 넘어 오히려 거꾸로 갈 공산이 크다.

6.15공동선언 행사에는 통일부 장관을 보내고 10.4선언에는 보내지 않은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는 '말의 성찬'이나 베풀어 주고 노무현 정부의 그것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가는 것.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이명박 정부에게 거꾸로 가야 할 포인트를 알려준 것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물론 외교안보 정책에 있어서도 '반 노무현'으로만 일관하는 이명박 정부의 이념외교가 더 큰 문제긴 하다. 대북 선제공격 혐의가 짙은 작전계획 5029도 '노무현 정부가 반대한 것이기 때문에' 추진해야 한다고 여기는 게 보수세력이고 이명박 정부다. 그렇지만 그런 전략이 분명히 보이는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노 전 대통령은 헌법상 북한 땅을 우리 영토라고 말하는 것은 법적 당위일 뿐이라며 "당위는 당위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자"라고 강조했다.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할 사람은 노 대통령 자신 아닐까? 서랍속에 넣어두면 세상의 변화에 따라 자연 소멸될 쟁점들을 굳이 끄집어내 따지는 것이 바로 "상투적인 이념투쟁" 아닌가? 그냥 화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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