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하늘 아래 굿판을 가장 잘 찍은 사진쟁이

〈추모사〉 사진작가 김수남씨를 보내면서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는 초조했다. 당뇨가 심각한데도 매일 밤 술 먹는 광경을 보면서, 혈색을 보나 푸석한 머리를 보나 건강이 썩 안 좋은데 그래도 일년의 절반은 무거운 카메라 가방 둘러메고 새로운 오지를 찾아 훌 떠나버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중얼댔다. '저러다 무슨 일 나지.' 드디어 2년 반 전 러시아에서 피 토하고 쓰러졌을 때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올 것이 왔네.' 하지만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 저 고생을 했으니, 그리고 용케 살아났으니 이제 회복만 하면 술 끊고 운동하고 일 줄이고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겠지. 사실이 그랬다. 우리의 바램대로 김수남 씨는 오똑 일어났고 술도 안 마시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일을 줄이지는 않았다.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라 그 많은 사진 다 정리하고 사진전 열고 원고 쓰고, 작년에는 부부가 한 달 동안 독일에서 열린 한국도서전에 초청 개인전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숨 놓았다. '천만 다행이다. 이젠 걱정 없구나.'

정초에 얼굴은 보지 못하고 전화통화만 했다. 올해는 강원도 사진을 찍기로 했다면서 오랜만에 의기투합해서 일해보자는 제안에 나는 참 신났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국내답사는 거의 20년만이고 해외는 인도 서남부지역 조사가 마지막이니 4년만이 아닌가. 3월이 얼른 와서 함께 일하면 좋겠다, 나 혼자 들떴었다. 그런데 김수남 씨는 이제 그 약속을 못 지킨다. 평생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일이라면 칼 같은 사람이 일 약속을 못지키게 되었으니 정말 갔나 보다. 좀체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나는 카메라 하나로 우리 문화를 지키고 우리에게 아시아를 만나게 해준 골수 사진쟁이 친구를 보내야 한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김수남 씨는 1980년 여름 장산도 씻김굿판에서다. 밤새 좁은 마당에서 굿을 하는데 오랜만에 굿구경을 만난 마을사람이 몽땅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남도 사람들 어찌나 잘 놀던지 굿만 못할 뿐 저마다 신명을 내고 저마다 무당이었다. 그럴 때는 나도 마을사람인 양 함께 춤추면서 놀다가 꼭 필요한 대목만 눈치있게 다가가 마이크를 대는 게 제일 좋다. 그런데 녹음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나를 건드리는 팔이 있었다. 보니 카메라 렌즈에 얼굴을 박은 김수남 씨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기 앞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를 막기 위해 왼손을 내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자기만 사진 찍나!

한 발 물러나 지켜본 김수남 씨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사람들이 주는 술은 다 받아먹고 더 달라고 해서도 마셨다. 덕분에 굿판에 있는 마을 사람들보다 더 얼굴이 벌게져서 돌아다니는데 그 와중에서도 협조를 구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었다.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술 한 잔 걸친,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로 웃으면서 부탁하면 무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할 것 없이 시키는 대로 비켜주고 포즈를 취해주고 춤을 추어주곤 했다. 그렇게 밤새 주민들과 함께 놀면서 사진을 찍어대던 김수남 씨의 진가는 새벽 굿이 다 끝나갈 무렵 확실하게 나타났다. 하룻밤 정든 할머니들이 은근히 장가 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저 웃기만 하자 가장 신명 많은 할머니 하나가 본격적으로 나온다. "우리 막내딸 고와. 사위 들어올래?" "에이, 벌써 아들이 둘인데요…." 참 그 사람, 예쁜 여자 좋아하는데 얼마나 아쉬웠으랴만, 그 아쉬운 마음은 할머니가 더한 것 같았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우리는 전국의 굿판을 돌아다니면서 함께 일했다. 김수남 씨가 사진을 찍고 내가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인데 그 제의는 김수남 씨가 했다. 민속문화를 보는 시각이 서로 통했고 일을 분담할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제의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우리가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김수남 씨의 시대적 사명감에 내가 홀딱 넘어갔기 때문이다. 70년대 중반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전통문화의 현장을 찍던 김수남 씨는 특히 강력한 타파의 대상이었던 미신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당굿이야말로 한국 문화의 핵심이라고 믿었던 것인데 바로 그 생각이 우리 둘을 묶은 가장 강력한 끈이었다. 그 결과는 〈한국의 굿〉 스무 권으로 묶여나왔다. 거진 10여 년이 지나 책이 모두 출판되었을 때 이미 책 속에 있던 8명의 문화재급 무당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김수남 씨의 사진이 마지막 기록이자 유일한 기록이었다.

김수남 씨는 프로페셔날이다. 그는 자신이 프로페셔날인 것을 자랑으로 알아 어떤 경우에도 일이 되도록 일을 만든다. 물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다. 1985년 위도 띠뱃굿 답사가 단적인 예다. 당시 위도는 전라도 곰소나루에서 배로 두 시간 거리였다. 띠뱃굿은 정월 초사흘에 한다. 그런데 김수남 씨는 섬의 날씨는 알 수 없으니 실수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닷새 전에는 들어가야 한다고 우겼다. 우리는 섣달 그믐 전날 위도에 들어갔고, 덕분에 계획에도 없었던 섣달 그믐날 아침, 뱃고사를 조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정말 설날 아침부터 불어치는 바람에 온 바다가 뒤집혀 그후 일 주일 동안 배가 뜨지 않았다. 위도 띠뱃굿은 그 해 처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마을의 준비가 상당했었는데 구경한 외지인은 우리 둘뿐이었다. 민속행사란 임의로 정해진 날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은 곰소나루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수남 씨는 기획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무턱대고 현장을 쫒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긴 안목으로 출판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여러 분야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한 프로의식과 치밀한 계획이 아무도 생각지 못한 시리즈를 엮어내 〈한국의 굿〉 스무 권 전집과 〈한국의 탈〉, 〈한국의 탈춤〉, 〈장승제〉, 〈풍물굿〉, 〈호미씻이〉 등의 사진집을 만들어냈다. 모두 전국을 대상으로 무속, 민속, 탈, 탈춤의 사진을 수록하고 전공학자들의 해설이 있는 공들인 책들이다. 책 속에는 우리문화에 대한 녹녹챦은 내공이 담겨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의 사진이 보여주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삶의 미묘한 순간을 영원으로 정지시킨 한 장의 사진을 보면 그가 타고난 예술가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특히 사람을 잘 찍는다. 사실 무당은 연예인 못지않게 한 연기하는 사람들인데 김수남 씨 카메라 앞에서는 내면의 아픔을 곧잘 털어놓는다.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호령하는 당당한 무당의 얼굴에 긴 세월 억압당하며 살아 온 그늘이 슬쩍 비친다. 허리 잘록 졸라매고 흰 수건 한 장 들고 춤추는 늙은 무녀의 발뒤꿈치에는 한이 깊어야 춤이 가볍다는 깊은 애환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주바다와 잠수의 사계〉에는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사람다운 사람의 얼굴들이 잔뜩 있다. 사람 좋아하는 김수남 씨가 그 마음으로 찍은 얼굴들이다.

1988년을 계기로 김수남 씨의 작업내용은 크게 바뀌었다. 시선을 아시아로 돌린 것이다. 일본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6개월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오키나와의 굿을 찍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후 김수남 씨는 일년의 절반을 외국에 나가 지내면서 동남아시아의 민속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모든 사람들이 북쪽의 우리 문화의 원류를 찾아 올라갈 때 그는 혼자 남쪽을 훑었다. 일본은 물론이고 타이완, 필리핀, 중국의 남부, 인도네시아, 베트남, 타일랜드, 스리랑카, 미안마와 인도의 북부로 올라가서 라다크를 중심으로 한 티벳트문화까지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김수남 씨가 처음 오키나와를 조사하고 있을 때 궁금한 나머지 보름 동안 쫒아간 적이 있었다. 멋모르고 따라나섰는데 막상 해보니 해외답사는 장난이 아니었다. 궁금한 것은 많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갈수록 난감했다. 하지만 일본에 간 지 불과 몇 달만에 김수남 씨는 술집에서 익힌 일어, 간단한 오키나와어, 그리고 가장 요긴한 브로큰 잉글리쉬로 제법 의사소통을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굿판의 술이란 술은 몽땅 얻어마시면서 오키나와 할머니 무당들의 절대적인 사랑 속에서 제 집처럼 사진을 찍어대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것이 당시 내 눈에 비친 김수남 씨 모습이었다. 나중에 진짜 이야기를 들었다. 답사를 오기 전 동경에 머물면서 오키나와 무속에 관한 책을 쌓아놓고 수없이 사전을 뒤져가면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참 무서운 사람이다.

1993년 오랜만에 미안마 답사에 동행했다. 김수남 씨는 외국답사에 이력이 나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기사와 타협하여 암시세로 환전하는 일(미안마는 이중화폐제도를 사용해서 공식환율과 실제 환율이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현지에 도착하여 가이드를 고를 때 임금을 정확히 정하고 관계맺는 일, 싸면서도 안전한 호텔 정하기, 답사일정 짜고 적절한 인터뷰 대상을 선정하는 등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일들을 별로 피곤해 하지도 않고 척척 처리하는 솜씨가 놀라웠다. 그리고는 일단 답사에 들어가자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고 바쁠 때는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면서 아프지도 않고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잘 버텨내는 것이었다.

미얀마에서 우리는 빡빡한 일정과 더위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바지를 짜서 입어야 할 만큼 끔찍하게 더웠고 수십만 명이 모여드는 축제를 조사하다가 나는 밀려드는 군중 속에 깔려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보니 그 정도의 고생은 김수남 씨에겐 보통 수준이었다. 수교 전에 중국 미개방지역에 들어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한 달 동안 찍은 필림을 몽땅 빼앗기고 사형당할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슬리핑백 하나로 타일랜드 소수민족 마을에서 두 달 동안 버티기도 하면서 그는 몸으로 사진을 찍었다. 더운 지역은 끔찍히 덥고 추운 곳은 영하 40도를 넘나들게 추웠다. 때로는 자신을 위해 가져간 약 덕분에 오지의 슈바이처가 되기도 했지만 외국인을 몹시 경계하는 베트남에서는 간첩으로 오인될까 두려워 매일 새벽 4시에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요 단지 웃음과 특유의 너스레로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고독과 불확실한 답사일정이었다.

김수남 씨는 스스로 해외 답사계획을 세우고 그 일정을 실천했다. 문화인류학의 업적이 많이 쌓여 있는 선진국 사진작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알려지지 않은 문화의 현장을 찾아다닐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외국 건축잡지에서 본 특이한 집을 찾아 더 이상의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베트남으로 간 사람이다. 배 모양의 지붕을 한 그 집은 베트남의 총각들이 성인식 때까지 일정기간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조사하고 사진으로 담아냈다. 때로는 그만한 단서도 없이 길을 떠나기도 한다. 정월에 인도 북부에서 무슨 축제가 있다더라 라는 정도의 정보만 있으면 그는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는 현지에서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끈기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답사를 할 때 보면 그는 마치 동물처럼 자신의 본능과 판단을 믿는 것 같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외의 것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법이 별로 없어 다양하게 바뀌는 문화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유연성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수남 씨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안다. 그는 거의 모든 답사를 혼자 다녔다. 답사가 계속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사진만 찍는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답사일정이 불투명할 때는 호텔 방문을 잠그고 혼자 술을 마셨다. 술 마시며 외로움에 가끔 혼자말을 하면서 자신을 달래고는 술이 깨면 그동안 쌓은 지식과 감성을 총동원하여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개척자다. 사실 우리나라 학자 중에서 김수남 씨만큼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조사하고 기록한 사람도 없다. 물론 학자가 어떤 지역에 대해 연구보고서를 쓰려면 상당기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진작가처럼 한 사람이 여러 나라를 조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순서는 분명히 바뀌었다. 학자들이 조사한 것을 토대로 사진작가가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진을 보고 나중에 학자들이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여러 민족의 삶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순수한 관심과 애정이 통한 결과일 것이다.

김수남 씨는 처음으로 아시아를 보여준 사람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그는 아시아의 사람, 아시아의 축제, 아시아의 신화를 기록했다. 스스로 아시아인이지만 아시아는 우리에게 미국이나 유럽보다 생소한 곳이었다. 어쩌면 아프리카만한 관심도 없었던 것같다. 김수남 씨는 주로 무속과 의례의 현장을 통해서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삶을 소개하고 우리 문화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주면서 은연중 우리가 앞으로 연대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알려주었다. 굳이 논문을 써서 주장하지 않아도 그의 사진 한 장은 우리가 왜 아시아인인지, 우리 문화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증언하고 있다. 〈아시아의 하늘과 땅〉,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 〈아름다움을 훔치다〉는 우리에게 더불어 함께 살 소중한 이웃- 아시아를 보여준 보석같은 책들이다.

1995년 7월 김수남 씨는 아시아의 무당과 민속을 기록한 성과로 일본에서 히가시가와(東川) 사진작가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민속사진에 관한 한 그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국제적인 작가였다. 그러나 김수남 씨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제3의 외국문화를 대상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과 경쟁하여 국제적인 사진작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나는 그 사실이 친구로서 무척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후 10년을 더 이어지다가 결국 외롭게 마감한 고된 역정을 생각하니 안타깝고 안쓰럽기만 하다.

치앙마이는 황량한 도시다. 시도 때도 없이 흙바람이 불어가는 건조한 거리는 아직 문화 이전의 원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태국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구석구석 틀어박혀 모진 목숨을 잇고 있는 정글이 가까워 어차피 조사하려면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김수남 씨는 그곳에서 죽었다. 일 주일 동안 산속에 들어가 리수족의 신년축제를 촬영하고 잠시 숨을 돌리던 참이었다. 뼈끝까지 스미는 추위와 고된 일정으로 쌓인 피로가 한순간 그의 뇌로 치올랐던 모양이다.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그러나 '다큐멘터리 작가는 현장에서 죽어야 해' 평소 폼잡으면서 했던 말처럼, 김수남 씨는 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수남 씨는 사진하고 제 생명을 바꾼 사람이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기록하느라고 제 나라에서 편히 있지 못했고 남의 인생을 찍느라고 정상적인 제 삶을 살지 못했다. 술 때문에 명을 줄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의 일부일 뿐이다. 그가 평생 가장 사랑한 것이 가족과 친구와 술이다. 가족은 믿거니 일찍부터 아내에게 떠맡겼다. 국내 답사 현장에는 술친구가 너무 많았고 해외에는 술밖에 친구가 없었다. 인생의 목적을 '사라져가는 아시아 문화현장의 정직한 기록'에 둔 작가에게 술은 고독한 여정을 지탱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오늘 우리는 찬 술 한 잔을 그의 영전에 부었다. 먼저 가서 좋은 술집 하나 길터놓으라고, 곧 뒤따라가겠노라면서 친구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 좋아하는 술자리도 사진 찍을 게 없을 때 일이지…. 나 대보름 답사 가는데…, 하고 한 마디만 던지면 금세라도 카메라 메고 벌떡 일어날 것 같은데 정작 사진 속의 김수남 씨는 빙긋 웃기만 한다. 저기, 혹시나 내가 모르는 더 좋은 현장이 있는 것일까?

이제 그를 만나러 양평에 가려 한다. 지난 연말 '갤러리 와'에서 시작한 〈한국의 굿- 만신들 1979-1997〉 사진전은 결국 유작전이 되고 말았다. 혹시 나처럼 마지막으로 김수남 씨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3월 1일까지 양평에 가면 된다. 필히 술 한 병 품에 안고서.

〈박스〉

***한국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고 김수남 추도사**

제가 김수남을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6월 23일 서울 석관동 김금화 만신 집에서 있은 채희아의 내림굿 현장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25년 동안 김수남의 삶과 사진작업을 옆에서 지켜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남다른 면모를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을 만큼 김수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김수남의 남다른 점들 중 제일 먼저 손꼽지 않을 수 없는 특징은, 그의 예술적 감각과 감수성, 특히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것에 대한 순진무구한 애정과 열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중문화가 되었건 민속이 되었건, 또는 사람이건 정치이건 막론하고 오염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는 순수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표현방법 또한 순진무구해서 가장 원시적인 접촉방법을 동원하길 좋아했습니다. 이를테면, 그 유명한 김수남이 대장노릇 하는 술자리에서 그의 오른쪽에 앉는 사람은 누구라도 술이 거나해져 감에 따라 잦아지는 김수남의 손바닥 매를 등이나 넙적다리에 맞아야 했습니다. 그의 왼쪽 자리에 앉는 사람은 난데없는 기습적 입맞춤을 당해야 했습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의 천진함의 표현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진기 파인더(finder)를 통해서는 그의 동물적 감각이라고 할 야수적 본능이 느닷없이 발동하곤 했습니다. 예술가적 감수성, 영혼의 순수함, 그리고 길들여질 수 없는 야수성이 김수남의 가장 큰 남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수남의 또 다른 남다른 점은 field worker의 기본 조건인 친화력입니다. 김수남은 대한민국 무당 모두의 사랑을 받은 사진작가였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객관적 관찰대상이나 이용대상으로가 아니라 그들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지녀 왔던 그들 속에 감춰져 있는 아름다움을 본인들보다 먼저 느끼고 좋아하니까, 그런 감수남의 느낌과 마음이 온 몸 온 얼굴로 전달되니까 그의 친화력에서는 말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굿학회 회원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 않았던 고 임석재 선생님께서는 김수남의 이런 친화력에 얼마나 사로잡히셨던지 오직 김수남에게만 "나를 형님으로 불러라"는 호형 허락을 하셨을 정도입니다. 김수남은 저만이 임 선생님을 형님으로 부른다는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알면서 임 선생님의 따님인 임돈희 교수를 '질녀'라고 불러대곤 했습니다.

김수남의 이런 친화력과 특징들은 우리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본 중국 태국 라오스 베트남 인도 등 아세아 전역의 오지 원주민들과의 만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광범위하고 방대한 영역에 걸친 그의 남다른 작업을 가능케 했습니다.

김수남의 또 다른 특징으로, 시대의 흐름과 변화의 조짐을 앞서서 읽는 남다른 눈을 지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사라져가는 순수한 우리문화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의 고향 제주도에서의 굿 field work이 그의 한국무속 촬영 작업의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서 보는 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 있다고 본 것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결단의 용기를 그가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1980년대 초 열화당과 〈한국의 굿〉 총서 20권 출판을 계약하고 계약금을 받아든 김수남이 주변 친지들에게 한턱 내겠다는 전화를 사방으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자리에 없거나 선약이 있어서 저 혼자서만 김수남의 자축 술자리에 초대되어 밤늦도록까지 술시중을 든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언감생심 우리나라 전국의 굿을 망라하는 20권 전집을 내겠다는 계약을 한 김수남의 남다른 용기 배짱 결단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결단과 선택의 용기는 몇 년 후 한국의 굿 작업에 전력투구하기 위해서 동아일보 기자직을 버리고 freelancer, 무소속 사진작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발휘되었습니다. 그를 아끼고 걱정하는 주위 여러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field 사진작업 한 가지 일에만 전력투구하기 위해서 나는 이 길을 택했습니다. 아내, 상훈이 엄마도 동의했다면서 그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진을 통한 김수남의 선두주자로서의 가치와 의미입니다. 그의 사진작업으로부터 비롯되어 그 때까지 부끄럽고 천한 부분문화로 무시당해 오던 우리나라 무속의 사회적 문화적 위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수남의 〈한국의 굿〉 총서가 속속 출간 되어감에 따라 제주도 황해도 동해안 진도 등등 각 지역의 무속과 무당들이 국가에 의해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는 범위가 넓어져 갔습니다. 드디어 지난해에는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한국 무속문화의 위상 변화과정에서 김수남은 사진으로 그런 문화운동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사진으로 아세아 문화와 사람들의 사귐의 장을 새롭게 연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21세기 아세아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우리나라로서는 김수남이 시작하고 이루어놓은 미완의 작업에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작업은 완성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 시작의 장을 새롭게 열었다는 사실 속에 이미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고 하겠습니다. 좁은 땅 안에서 복닥거리며 싸우고 있는 우리를 깨우쳐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끔 만드는 그의 사진들이 비록 김수남은 갔어도 우리들에게 수천, 수 만장을 헤아려야 할 문화적 보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와 다음시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김수남이 김수남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대지 같고 누이 같고 애인 같은 그리고 담임선생님 같은 사랑하는 아내 이희영 여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전에 김수남 스스로도 인정하고 제게 자주 자랑했던 사실입니다. 믿는 데가 있어서 그렇게 마음 놓고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끝으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을 고 김수남씨에게 말합니다. 김수남 씨! 현처가 있기에 집안걱정 안하고 그리도 잘 나가 돌아다니더니, 이제는 아주 가출한 거요? 거기 가서 임석재 형님에게 뭘 자랑하고 싶었던 게요? 하긴, 아세아 여러 나라 민속에 대해서라면 콧대높은 형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이제는 술 때문에 위장에 구멍 날 걱정 안 해도 되고, 당뇨 걱정 안 해도 될 터이니 마음 놓고 그곳 술자리에서 대장노릇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 '사케오니', 酒仙으로 즐겁게 지내시요.

2006년 2월 8일

한국 굿학회 회장 김인회

〈별도 박스〉

***김수남 연표**

1949년1월19일 제주도 생

1973 연세대학교 졸업
1972-1975 월간 세대 기자.
1976-1985 동아일보사 기자.
1986-1987 동아일보사 객원 편집위원.
1988 일본 류큐대학 사회학과 외국인 객원 연구원. 일본 게이오 대학교 지역 연구소 방문 연구원.
1990-97 연세대학교 강사
1999-2000 상명대학교 예술, 디자인 대학원 사진과 강사
2002.8-2005.8월 경상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연구교수

1981 신영 연구 기금을 받아 한국의 굿을 촬영.
1988 일본 국제교류기금을 받아 일본의 산과 바다의 마츠리 촬영

2002-2005 2002-현재 경상대 인문학 연구소, 경상대 민속 무용학과와 공동으로 「한국, 중국, 일본, 인도의 굿에 나타난 춤사위 비교 연구」프로젝트 수행
1995-1997 3년간 연세대학교 박물관과 일본 게이오대학 지역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사하는 「한·일 문화 비교 연구」 프로젝트 수행.

1988- 아시아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촬영 중.

***사진집 및 저서**

2005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
「Gut, Korean Shamanic Ritual」(열화당)
2004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
1999 「살아있는 신화 아시아」(연세대학교 박물관)
1997 「김수남 아시아 문화탐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
(석필)
1995 「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 스페이스)
1983-1993 「한국의 굿」(열화당, 전 20권)
1993 「사진집 제주도」(일본 국서 간행회, 전3권)
1989-1992 「팔도굿」,「민속놀이」,「조상 상례」,「전통 제례」,「안동 하회 마을」 (공저, 대원사)
1988 「한국 마음의 아름다움-민의 문화」(일본 오리진 쇼보)
「한국의 탈, 탈춤」(행림 출판, 전2권)
「제주 바다와 잠수의 4계」(공저, 한길사)
1986 「풍물굿」,「호미씻이」,「장승제」(평민사)
「홀로가는 사람」(공저,행림출판)
1985 「흐르는 섬」(공저, 행림출판)

***전시**

2005 「한국의 굿-만신들1979-1997」김수남 사진초대전(갤러리 와)
2005 「Schamaninnen in Korea」(독일 베를린 Werksttat der kultern )
2005 「빛과 소리의 아시아」(인사아트센타)
2004 「신들의 얼굴」(한옥마을)
1999 「살아있는 신화 아시아-김수남사진전」(연세대학교 박물관)
1998 「한국 샤머니즘 전 」(독일 함부르크 민족 박물관)
1997 『삶의 경계』전 (광주 비엔날레)
1995 「아시아의 하늘과 땅」(개인전, 그레이스 백화점)
「한국의 무속(일본 히가시가와 사진상 해외 작가상 수상 기념전, 히가시가와 문화갤러리)
1983 「한국의 굿 출판 기념 김수남 사진전」(한마당 화랑)
1993 「한국 현대 사진 흐름전」(그룹전, 예술의 전당) 등 그룹전 다수.

***수상**

1996 한국일보 출판 문화상 사진부문 수상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스페이스 간)으로
1995 일본 히가시가와 사진상 해외작가상 수상
1989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수상
한국의 탈.탈춤 (행림출판 간)으로
1986 제 13회 오늘의 책 수상
한국의굿(전20권 열화당 간)으로

***소장**

예술의 전당, 연세대학교 박물관, 일본 히가시가와 문화 갤러리 등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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