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등 완성차에서 벌어지는 심야노동 해소를 위한 교대제 개편 논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기회로 여겨졌으나, 몇 년째 공전만 거듭하면서 한국 사회에 긍정적 충격을 가져다 줄 기회도 놓칠 공산이 커지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과 고용의 영역에서 우리가 되새겨 볼 일은 무엇이고, 단기적이고 현실적인 우려를 넘어서 노동시간체제의 새로운 전망을 가져올 방법은 무엇일까? 박근태 금속노조 전 부위원장, 김성희 고려대 연구교수, 조건준 금속노조 경기지부 교육선전부장, 이상호 전 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이 4차례에 걸쳐 글을 보낸다. <필자>
교대제 개편 연속기고 ① 이제는 주 35시간 노동제다 ② '개미의 노동' 할래, '베짱이의 권리' 찾을래? |
한국의 노동시간 체제는 여전히 '48시간 체제'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1989년부터 44시간 제, 2004년부터 40시간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항상적인 잔업과 휴일 특근으로 주당 노동시간이 상한인 52시간을 넘어 60시간 이상인 현실, 연간 2200시간이 넘는 노동시간 구조, 거기에 총 노동시간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 고용형태인 파트타임 비중이 6%에 불과한 현실(서구 평균 17% 수준)에 견줘보면 한국의 노동시간 체제는 40시간제가 아니다. 서구에서 100년 전 넘어서기 시작했고 한국의 노동시간 출발점이었던 48시간 체제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간 한국경제는 양적 확대가 아니라 질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노동시간 체제는 산업화 초기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여전히 48시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해진 한도 안에서 밀도 있게 일하는 효율적 노동체제를 구축하기보다, 작업장이나 사무실에 사람을 붙들어 매 놓는 걸 능사로 여기는 대책 없는 노동관리 체제의 산물이다. '회사형 인간'을 모범으로 삼고 이를 사회의 모범으로 확산하고 있는 기업들의 자기중심적 욕구의 반영이다. 장시간 노동 의존형, 요소투입 중심형, 노동력수탈형 노동시간 체제에 다름없다. 이른바 '잠일술 세대(조건준 민주노총 금속노조 정책국장이 쓴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에서는 죽도록 일하면서 지친 몸으로 쓰러져 자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술을 마시는 부모 세대를 '잠일술 세대'라고 표현했다)'의 등장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시간 체제의 반영이다.
▲ 지난 4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조합원들은 52.7%의 찬성률로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안을 가결했다. 이로써 현대차의 올해 임금협상은 마무리됐으나, 쟁점이었던 '불법파견에 따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향후 특별협의로 다루기로 해 노사 간 과제로 남았다. 사진은 8월 22일 파업 당시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가로막힌 아산공장 비정규직 노조 모습 ⓒ프레시안(김윤나영) |
비정규 착취형 노동시간 구조
더구나 한국의 노동시간 체제는 비정규직의 노동시간이 정규직과 동일한 고용착취형 구조이다. 비정규 고용의 주축을 이루는 고용형태가 부분적으로 시간주권을 활용하는 파트타임 고용이 아니라(물론 서구에서도 자발적 파트타임 비중은 50%가 안 된다), 정규직과 동일하게 일하거나 더 일하되 임금은 절반 또는 그 이하인 임시계약직, 파견용역 등 간접고용, 특수고용이 주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비정규 고용의 착취(남용과 차별)는 노동시간 측면에서도 예외 없이 관철되고 있다. 또한, 장시간 노동체제로 인해 기업들은 비정규 고용을 통해 '많이 일하게 하고도 훨씬 덜 주는' 비정규 고용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게 된다. 장시간 노동체제가 유지되는 한 비정규 고용 착취에 의존하는 한국 기업들의 고용구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남성가장형 + 유연화형'에 초 장시간노동이 결합한 최악의 노동시간 체제
국제비교의 시각에서 노동시간체제를 견주어보면, 초 장시간노동이라는 특징이 부가된 남성 가장 모형 또는 자유방임형 유연화 모형으로 볼 수 있다. 고용되어 있는 남성과 여성의 노동시간은 모두 길며, 여성의 경제참가율은 중위수준이며, 비정규직 비중은 여성이 압도적이다.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정규직과 동일한 장시간 노동체제에 속해있다. 남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불문하고 장시간 노동체제에 속해 있어 영국형의 자유방임형 유연화 유형으로 급격한 이행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노동시간단축은 영미형 무차별적 유연화에 대한 방어벽의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정규직 또는 남성의 주도권이 강조되는 남성 가장 모형에서의 탈피와 함께 연대주의적 평등모형으로 이행해 나가기 위한 핵심 지표이자, 정책방향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성희의 "노동시간단축의 사회적 의미 실현을 위한 과제", 국회발표문 2012, 9. 4 참조).
지지부진한 사회적 노동시간단축 논의
고용문제가 심각하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은 하나 마나 한 정책 수단을 재탕, 삼탕으로 내놓는데 그친다. 대통령이 한국의 유력 재벌 회장을 불러다 고용을 위한 투자에 주력할 것을 주문(요구인지 간청인지)하는 블랙 코미디가 때마다 연출되는 나라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고용 문제를 해결하는 유력수단이 노동시간 단축에 있다는 상식을 재확인해 보자.
첫째, 저성장 체질로 이행한데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기를 경과하고 있다. 성장이 고용을 그냥 갖다 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업들은 고용 또는 직접 고용을 최소화하는 데서 경쟁이점을 찾고 있다. 둘째, 그렇다고 이런 상태를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문제는 심각하다. 셋째, 신성장동력과 사회적 기업 등 고용촉진형 투자를 유발하는 방법은 생각만큼 기대한 효과를 보기 어렵고, 또 당장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다. 이와 별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일자리를 최대한 많이 나누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논지는 더 이상 '일자리는 기업이, 투자가, 성장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일자리는 사회적으로 사회정책으로 만들어내는 게' 가장 빠르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고용으로 연결할 장치 마련이 지지부진한 것은 노사정이 동상이몽에 사로잡혀 있고 이를 탈피해 고용 문제에 주력하는 새로운 주도권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의 노동시간 체제 개편 논의가 서구에서 40시간제 이하로 단축할 때 등장한 선진적(?) 제도라는 유연화 제도를 도입할지 여부를 논의하는 데 기간을 너무 많이 쏟고 있다는 점이다. 초장시간 노동체제, 왜곡된 노동시간구조, 전근대적 노동시간 관행을 해소하는 과제에 충실해야 한다. 정작 선진화해야 할 것은 노동시간 단축의 사회적 의미를 확장하고, 가장 중차대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고용 확대와 노동시장의 고용형태별 차이를 노동시간단축을 계기로 해결하는 연계방안을 찾는 일이다.
노동시간 단축의 흐름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은 세 가지다.
첫째, 구속노동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작업현장의 생산성의 측면에서 경쟁력은 정규노동시간의 길이에 크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전반적인 사회생활의 변화의 경향을 노동시간제도가 반영하고 있으며, 변화하는 사회생활상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노동시간제도가 변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노동시간 단축은 일시적인 성장이 아닌, 자본주의의 장구한 성장 추세에 따른 과실의 배분이라는 사실이다. 실업해소방안으로서 노동시간단축은 이런 배경요인 하에서 노동시간단축의 장기적 경향을 반영하는 한편, 급격한 수요감축에 의한 고용조정을 회피하기 위해 이런 추세를 공식화하고 가속화하는 의도적인 정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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