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

보신각 종

서울은 2000년 전 한때 백제의 수도였고 근대에는 조선과 대한민국의 수도로 6백년이 넘는 도시가 됐다. 몽촌토성 풍납토성 백제고분 같은 유적은 한강을 낀 서울이 고대국가의 도읍지로 얼마나 우월한 곳인가를 일찍부터 말해주는 증거다.

서기1394년, 조선을 개국한 이태조와 무학대사가 풍수 좋은 땅을 골라 서울의 터를 잡던 이야기는 어느 면에선 거대한 설치예술이다. 산이 에워싸고 한강이 흐르고 성벽과 길이 나고 대궐과 시장이 들어서며 종각에서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인간관계가 일어나고 ...

그리고 6백여년이 지난 오늘 서울은 8만가량 인구에서 1천1백만명이 사는 도시로, 그 면적은 18평방 km(500만평)의 사대문안과 성밖 사방 10리에서 1억8천3백여만평으로 확대되고 근대화되었다. 그 과정에 6백년을 알리는 외형상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30년 된 도시같다는 평도 듣는다.

지금 남아있는 서울사람들의 생활모습은 북한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휘돌며 옛 서울을 둘러싼 성곽 안 경복궁과 창덕궁 주변 동네, 청계천 이북 북촌으로 불리는 곳에 주로 남아있다. 종로구 가회동과 안국동 삼청동 일대에는 낯익은 검은 기와지붕의 살림집 한옥들이 모여있고 그 사이에 가리마처럼 이어지는 오래된 골목길이 있다. 서울을 형성하던 수많은 궁과 저택들이 근대화바람으로 헐려 나간 뒤 보호정책 아래 마지막 남은 9백여 채의 한옥들이다. 주택 말고도 절과 성균관, 정자 등도 보여 생활의 구조를 알게 한다.

높은 빌딩에서 이 일대를 내려다 보면 밀집된 검은 기와지붕군이 양식건물사이에 고립된 섬처럼 혹은 침묵하는 호수처럼 보인다. 햇빛이 비치면 우진각 지붕등 여러 가지 지붕 곡선과 검은 기와골 만으로도 그림 한폭같은 조용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실제로 눈내린 한옥동네 지붕을 그린 유명한 유화가 있다.

북촌이 서울의 전통 주거지로 알려진 것은 궁과 도심에 가깝고 북한산의 맑은 공기에다 지대가 높아 물이 잘 빠지며 볕바른 양지라는 좋은 지리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에 있던 남촌은 상대적으로 권력과는 거리가 먼 서생들이 많이 살았다.

오랜 세월의 정취가 담긴 서울의 진면목, 친근감과 향수가 마지막 힘처럼 숨어있는 서울 북촌의 이즈음 라이프 스타일을 '서울, 북촌에서'란 이름으로 찾아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북촌은 한정된 지역이 아닌, 서울생활의 한 전형으로 붙여본 이름이다. 필자***보신각 종**

종로 2가 네거리에 보신각이 있다. 각종 나무, 주변의 시설물로 가려진 1500평 마당 안에 검은 기와(청기와처럼도 보인다) 팔작지붕과 강렬한 붉은 기둥이 보인다. 살림집 아닌 누각의 자태가 화려한데, 종은 그 안 깊숙이 올려져 있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20톤 무게에 경주 성덕대왕 신종만큼 큰 이 보신각 동종은 일년에 세 번 종을 친다(지름 2.23m 길이 3.78m). 삼일절과 광복절 아침 기념타종을 하고 12월 마지막 밤 제야의 종을 칠 때는 새해를 맞으려는 사람들이 종로 네거리를 가득 메운다.

<사진> @하지권

쇠줄에 매달린 박달나무 굵은 방망이를 멀리 당겼다가 놓으면 땅! 하고 당좌에 맞으면서 종은 수백년 전처럼 '웅....'하면서 운다. 그 소리는 어딘가 세속을 초월해 나는 소리 같다. 이때만큼은 보신각 종을 서울의 상징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조선시대 종각에서 새벽 4시 파루를 쳐 성문을 열면 기다리던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일제히 8대문 성밖으로 나갔다가 밤 10시 인정을 쳐서 문닫기 전 들어왔다. 닫힌 성문을 넘어 들어오다 무슨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극적 얘기, 성밖의 주막 등이 그림과 기록으로 남았다.

현대는 그런 생활리듬은 아니지만 하루 24시간의 일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같다. 보신각 종은 그러나 1953년부터는 일년에 단 세 번 만 치는 의례로만 남았다. 좀 인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사람들이 붐빈다. 강남 등 더 화려한 장소가 등장하기 전 종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상권으로 최신 유행의 주단집, 큰 지물포, 이런 이층 한옥가게들이 있었다. 보신각은 그 기점이었다. 한때 최신식이던 4-5층의 건물은 이제 쇠락한 종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도 하다. 역으로 새 빌딩 신축이 한창이어서 보신각에서 보이는 북악산 능선은 이미 가려졌다. 네거리의 기념비적 건물이던 화신백화점 자리 고층의 국세청 앞 광장은 길거리 탁구, 무슨 음악연주, 데모 같은 요즈음의 도시풍경으로 채워진다.

그 맞은 편에 비스듬히 서있는 보신각은 이 일대 유일한 2층 한식 누각으로 빌딩들 사이에 아주 고답적인 조각품처럼 보인다. 종각 경내에는 구한말 미국 군함을 물리친 기념물 대원군의 척화비도 있는데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옛 보신각 종은 세조 14년인 1468년에 높이 3.18m 지름 2.28m 무게 19.66t에 쌍두 용뉴의 고리가 달려 주조됐다. 5백십수년이 지나면서는 수명을 다해 박물관에 들어갔다. 대신 새 종이 만들어져 1984년부터 타종을 시작했다. 국민의 성금으로 된 이 종의 표면에는 비천의 꽃줄이 나붓기고 태극이 조각됐다. 세조때 만든 옛종은 20-30여명이 참여해 제조했고 김덕생 감역에 정길산, 김몽총이 주조했다. 현대에 만든 새 종은 강찬균이 조각, 염영하 이장무가 감리하고 성종사에서 주조했다.

보신각 종 관리소의 조진호씨(78)는 5대를 이어 타종과 종각관리를 도맡아 왔다.

'1946년 광복절을 잊지 못하죠. 이승만 김구 두 분이 중앙청에서 광복절 기념식을 하고 바로 이리로 와서 기념 타종을 했어요. 그 날 흰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천연두 흔적이 있는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김구선생은 스무살난 내 등을 두드리며 '아버지를 대신해 오늘 종을 쳤다지? 이젠 임정도 들어오고 했으니 같이 일해 봄세. 불러다 쓸테니 어디 가지말고 여기 있어. 허허허' 라고 했지요. 난 정말 김구 선생이 부르면 옆에 가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려고 기다렸는데 그분은 얼마 뒤 돌아가셨지요. 고종친필의 보신각 현판은 6.25때 불타고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다시 걸린 것입니다. '

그때는 종로 4거리에 화신이 7층 건물로 유일했고 2층집이 고작이어서 북악산 인왕산이 눈에 다 들어오고 종소리가 멀리 갔다. 통금이 있던 1970년대에 보신각 옛 종소리를 녹음했는데 차가 다니지 못하게 하고 개도 짖지 않도록 '당부'해서 3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녹음했다. 상원사 종, 옛 보신각 종, 성덕대왕 신종은 특히 그 소리가 아름답기로 이름을 얻었다. 지금 걸려있는 새 종은 너무 드물게 쳐서 그런지 종소리에 대한 특별한 추억거리가 쌓이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종을 치면 서대문 영천에서 간밤의 소리를 들었다 하고 동으로는 왕십리에서 사는데 들었다 하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만큼 멀리 간 것이죠. 지금은 사방 콩크리트 건물에 막혀 종을 쳐도 소리가 띵하고 날라가고 이 부근에서도 잘 안들려요. 의례로만 치는 셈입니다.'

종을 치는 횟수는 불교의 33천, 28수(宿: 별자리)를 의미한다. 종은 처음부터 누군가를 기려 만들어지는 것이 많았다. 신종이 성덕대왕을 기려 그의 왕비가 만든 종이듯, 보신각 종은 서울시민을 위한 종으로 현대에 만들어졌다. 아쉽게도 천 수백년 동안 치고 듣던 종소리를 이젠 잘 듣지 못하게 됐어도 종치는 일이 의례로 남은 것은 그만한 전통을 잊을 수 없어서일 것이다.

보신각 종을 위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 때는 타종도 못했지만 화신상회 주인 박흥식씨는 이 종을 그의 조상처럼 여겼다. 몇 년 동안 매달 초하루 보름 새벽에 와서 종 앞에 제를 올렸다. 해방 후에는 경찰청장 조병옥씨가 가끔 이 종을 찾아와 치성드렸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한번 와서 직접 쳤을 뿐이다. 요즘 사람들이 특별히 이 종을 아낀다는 어떤 징표도 없다. 커녕 '왜 내가 종을 치면 안돼냐'고 난리여서 밤이 되면 '종님'의 안위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조진호씨는 걱정한다.

그래도 내가 요즘 들은 가장 재미있는 보신각종 얘기는 지난 8월 올림픽 축구 예선전 중계방송에서였다. 말리에 지고 있다가 한국의 조재진 선수가 솟구치며 헤딩으로 한골을 넣었을 때, 한 해설자가 너무 좋아 '보신각 종치듯 했어요! 완전히 붕 떠서 말이죠!' 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장면을 사진으로 보았는데 공을 노려보는 얼굴, 팔이 꺾인 각도와 힘이 넘친 모습이 사냥에 나선 매를 보는 듯 했다. 해설자가 보신각 종을 생각해낸 것이 기분 좋았다.

조진호씨에게 보신각종은 단순한 종이 아니라 종님이다. 그는 작고한 부친에 이어 1960년대부터 종을 관리하면서 이제까지 20수만번이 넘게 종을 쳐왔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는 아침에 33번 저녁에 28번씩 하루 세 번 하루 100번쯤을 치는 기간이 있었다.

종을 치는 종목은 먼저번 것이 다되어 새로 구하려고 여럿이 돌아다녔으나 그만한 박달나무 재목을 구하지 못했다. 할 수없이 대추나무로 만들어 썼는데 한 두해 치고 나니 금방 갈라졌다. 여러 사람이 필사적으로 각지를 알아봐 강원도에서 길이 170센티, 직경 36센티의 방망이를 만들어와 지금까지 쓰고 있다. '박달나무에는 콩크리트 못도 안 들어가죠.'

이제는 종도 실리콘으로 만들어 새까맣게 번쩍이는 종이 많지만 이 종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전통양식을 따랐다. 언제고 오랜 시일이 지나면 파랗게 청동 녹이 앉은 아름다운 종이 될지 모른다.

'종을 만들 때 금이 많이 들어가면 소리가 좋다죠. 내가 금이 어디 보이나 하고 종 속에도 많이 들어가 보았지만 모르겠어요.'

종의 안쪽은 항아리 속처럼 생겼다. 종 아래바닥은 공명을 위해 약간 움푹하게 파놓았다. 보통은 땅 속에 항아리를 묻는다. 종의 윗부분은 여의주를 지닌 용의 형상으로 고리를 해 매달았다. 무거운 종을 달아매기 위해 서까래에 철근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끄떡없다고 말한다. '용님이 여의주 손에 들고 바퀴돌리고 계신 거예요' 라고 그는 표현한다.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는 서울의 심장부 광장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버금가는 곳이다. 세종때 종각도 2층 누각이고 아래로는 사람과 말이 다녔다. 1979년에 지은 지금 보신각도 기둥이 아래 위층 각 28개씩 장엄한 150평 누각이다. 종은 종각이 먼저 세워지고 난 몇년 뒤 1984년에 만들어 달아올렸다.

보신각이 만일 이순신 장군 동상이나 적어도 동십자각처럼 주변에 가리는 것 없이 반듯하게, 산뜻하게 보이고 종치는 것도 확실히 볼 수 있다면 그 상징은 더 강렬할 것이다. 고대에는 이런 대종을 만들 수 있는 나라가 한국뿐이었다. 그런 전통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종, 서울과 처음부터 함께 한 종각은 좀더 대접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

북촌에서는 법련사와 칠보사에서 하루 세 번 종을 친다. 보신각에서도 옛 방식대로 좀더 자주 종을 치면 고풍스런 서울다운 서정이 생겨날지 모른다. 뮨헨시청 마리안 광장에 12시가 되면 인형극의 장면처럼 종치는 것 하나 보려고 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모여드는가.

큰 종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유산의 면모를 한눈과 귀로 다 들어오게 한다. 그런 한국의 종을 생각하면 비천상 조각이 있는 경주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던 힘든 과정이 먼저 떠오른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과정을 겪었나. 종 만드는 기술이 없던 일본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한국 종을 탐내 종을 떼어 훔쳐가다가 바다에 빠뜨렸고 그래서 바다 속에서 아직 종소리가 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백년이 넘게 보아왔다고 반쯤 죽어있는 유물로 둘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게 활기가 생겨났으면 한다. 꼭 기능적인 것만으로 도시생활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무심히 지나치지만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자리하며 어쩌다 소리를 낸다는 것만으론 너무 소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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