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양 박사의 대한매일에 대한 재반론이다.
***'대한매일의 반론'에 대해 답한다**
대한매일이 반론에서 주장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 악의적인 비판 운운은 대한매일의 자의적인 판단일 뿐이다. 대한매일에 대해 ‘악의’를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조중동’의 대칭어로 ‘한경대’를 사용할 정도로 일부 보수신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허탈감이 ‘한경대’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채워져 왔고, 필자 또한 최소한 이 글을 쓴 직후까지 한경대의 대한매일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높은 기대치 때문에, ‘다른 보수신문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대한매일은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는 바람이 비판의 강도를 높였고, 대한매일이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자극적인 표현’도 들어갔다. 한국의 언론개혁에 있어 그 동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던 대한매일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을 바탕으로 글을 썼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논쟁에 '쓸데없는 감정의 찌꺼기'가 끼어드는 것을 경계한다.
일단 이 문제의 원인은 필자에게도 어느 정도 있음을 인정한다. 필자의 ‘근거 없는’ 기대치와 대한매일의 반응 사이의 괴리감은 예상과 달리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점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두 가지 측면에서 정중하게 사과한다.
첫째,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백문일 기자와 대한매일에게 사과한다. 둘째, 대한매일에 대한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이 잡음으로써 대한매일이 수용할 수 없는 비판을 했던 것에 대해서 사과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감정의 찌꺼기’를 치우고 본격적으로 반론에 들어가 보자. 필자의 이전 글은 새파이어의 극우적 일방주의적 견해와 '주한미군'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도로 쓰여졌다. 한데 대한매일이 새파이어의 위험한 글쓰기라는 중심주제보다 '대한매일에 대한 비판'에 한정해서 반론을 보내 온 것은 유감이다. 하지만 보내 온 반론에 한정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대한매일 이기동 국제팀장의 ‘쓸만한 반론’을 다음 두 가지로 판단하여 이에 대해 반론한다.
첫째, “대한매일이 새파이어를 소개하면서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라고 표기한 것은 미국의 여론 주도층 사이에서 새파이어를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분류하는 입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주장이다.
일단 필자의 ‘천박함’으로 인해 대한매일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분류하는 입장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몰랐고 또 그렇게 분류한 자료를 찾을 수도 없었다. 대한매일이 다음 반론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 주길 기대한다.
문제는 설령 미국의 여론주도층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할지라도 대한매일이 새파이어를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대한매일은 미국신문이 아니라 한국신문이며, 기존의 새파이어 글에서 '자유주의적 색깔'을 찾아보기 힘들고, 대한매일이 번역 보도한 12월 26일 뉴욕타임스 칼럼 또한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 글에서 대한매일의 백문일 기자를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해 비판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한국 사회에 뿌리 박힌 '사대주의적 근성'의 발현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어정서에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라는 개념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개혁적 보수주의’ , ‘온건 보수주의’ 또는 ‘온정적 보수주의’ 등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새파이어의 칼럼은 '개혁적이거나 온건하거나 온정적인 측면'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국제문제와 관련해서는 오로지 미국제일주의를 강변할 따름이며, 이를 위해서 역사의 일방적 왜곡적 해석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매일이 ‘중요한 팩트’인양 ‘미국 여론 주도층 입장’이라고 해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행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칼럼니스트와 글의 성격을 구분할 때는 ‘누가 뭐라고 말하더라’는 잣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글의 성격이 어떠하더라’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아니 그의 삶과 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의 글이 어떠하더라’는 것이 일차적인 기준이어야 한다.
대한매일이 ‘잘못 반론’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미국 여론주도층의 입장이 아니라 대한매일의 입장을 비판했는데, 이의 반론으로 ‘미국에 그런 입장이 있다’로 답했다. 미국 여론주도층의 입장이라고 하면 무조건 수긍해야 하는가. 독일에서는 아직도 히틀러의 수많은 지지자들이 있다. 이들이 히틀러는 '민족의 영웅'이라고 하면 이는 분명 독일국민들 사이에 있는 입장이니 대한매일은 '게르만 민족의 영웅 히틀러는…'이라고 소개할 것인가. 대한매일이 '새파이어는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라는 입장이 갖고 있어, 이를 반론하려면 '대한매일이 새파이어의 글을 분석한 결과 자유주의적 보수론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대주의'라고 욕먹지 않고 제대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견해차이’가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논쟁할 수 있다. 한데 미국 여론주도층의 입장으로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새파이어를 규정’하면 이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대응할 가치가 없어진다.
둘째, 대한매일이 “새파이어를 '신보수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양문석 실장의 자유이겠지만 그가 강경 보수파의 선두에 있다는 자신의 판단과 다르게 표현했다고 해서 남의 의견을 '무식하다', '미국으로 귀화하라' 운운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이다”고 지적한 점이다.
이 주장은 두가지로 분리되어야 한다. 먼저 "새파이어를 ‘신보수주의자’로 규정한 것은 양문석의 자유"라는 점으로 결코 대한매일은 새파이어를 '강경보수파'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자신의 판단과 다르게 표현했다고 해서...운운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이다"고 규정한 점이다.
먼저 새파이어를 ‘신보수주의자’로 규정한 것이 과연 ‘양문석만 자유’인가? 이에 대해 대한매일 1월8일자 국제면 기사 '거듭되는 주한미군 철수론'을 통해서 살펴보자.
"북한 핵 문제를 외교ㆍ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미국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강경 보수 논객들이 잇따라 주한 미군 철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뉴욕 타임스의 보수적인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가 지난달 26일자에 이어 지난 2일자 칼럼에서 잇따라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한 데 이어 또 다른 강경 보수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노박이 6일자 시카고 선 타임스에 실린 칼럼에서 미군의 점진적 철수를 주장했다."
위의 기사에서 ‘미국의 강경 보수 논객들이 잇따라’ 또는 ‘또 다른 강경 보수 칼럼니스트’라는 소개 글을 쓰고 있다. 분명히 대한매일의 국제면이다. 국제팀장이 새파이어를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강변하고 있는 마당에 소속 기자는 ‘또 다른 강경 보수’라는 표현에서 앞서 언급된 새파이어를 분명히 ‘강경 보수’로 분류하고 있다.
새파이어를 이기동 국제팀장과 12월 31일자 기사의 담당기자만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보고 있든지, 아니면 대한매일의 국제팀은 ‘데스크의 입장이나 팀의 입장과 상관없이’ 기자들의 견해를 절대적으로 존중해 주는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이든지, 이것도 아니면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 정도에서 이 팀장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고 본다. 하지만 대한매일이 여전히 ‘자유주의적 보수론자’로 소개한 것에 대해서 우긴다면, 이것은 단순한 ‘견해차이’가 아니라 사실 왜곡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의 의견 다르다고 언어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앞서 필자는 ‘자극적이었다’고 인정하고 이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한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대한매일의 주장처럼 필자가 ‘언어폭력’을 휘둘렀다고도 하는데 문제는 ‘언어폭력’을 당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당했다는 점이다.
필자의 글이 ‘프레시안’에 소개된 후 필자는 직ㆍ간접으로 대한매일로부터 상당히 불쾌한 경험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오간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문제의 대한매일 기사를 ‘워싱턴 특파원 백문일 기자’가 쓰지 않았다는 것, 실명 비판을 하면서 당사자에게 기사를 썼는지 안 썼는지 확인하는 소양도 없다는 것, 법적 대응 운운 등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글쓰는 사람’과 ‘바이라인’(기사를 쓴 기자 이름)이 다르다는 점이다. 언론이 ‘기사실명제’를 도입한 이유는 그 기사에 대한 기자의 책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더 객관적인 기사와 완성도 높은 기사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 언론에서 이런 ‘잘못된 관행’이 남아있다는 점은 대한매일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관행이 끼치는 폐해들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건의 당사자들은 언론보도를 보고 취재해 간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사를 쓴 담당기자들에게 항의할 때, 기자들은 ‘데스크’에서 기사의 핵심이 바뀌었다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런 변명에 ‘피해자’는 더 이상 문제삼기 어려워진다. 비겁하고 야비한 짓이다. 데스크가 내용의 핵심을 바꾸면 이같은 관행에 대해 항의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취재대상의 몫’이 아니고 ‘기자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대한매일의 데스크가 저지른 것은 기자이름 도용이다. 기자 몰래, 또는 기자의 동의 없이 이름을 다는 것은 ‘이름 도둑질’에 다름 아니며, 또한 이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자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효율성이나 상황논리를 통해서 합리화되는 ‘관행’을 통해 관련자나 기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이는 당연히 고쳐야 한다.
대한매일의 냉정한 재반론을 기대한다.
2003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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