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할 줄 모르는 서구

서구만이 옳다는 믿음이 곧 근본주의다

카불에 폭격이 가해졌다. 도시 위로 포연이 오르고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단 두개의 발전소 가운데 하나가 폭격 당했다. 한편에는 특수부대가 대기하고 있고, 미국의 회유와 협박과 뇌물을 받은 많은 나라들이 동맹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번 공격이 신중하게 준비됐다는 증거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서방의 여론은 이번 전쟁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의견을 달리하는 목소리는 열광적인 찬동 속에서 거의 듣기 힘들다.

갈등은 이제 선과 악 사이의 싸움으로 투사된다. 빈 라덴과 탈레반 정권은 악당들로 묘사되는 반면 서방은 자신의 머리 위에 후광을 씌우고 있다. 서방의 협소한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 새로운 도덕적 질서의 첫 수혜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테러가 발생하기 전까지 (즉 9월 10일까지), 서방에서 탈레반 치하 여성들의 고통을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들을 위해 싸우고 있단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걱정은 고사하고) 사람들은 더더욱 적었다. 그런데 서방측은 지난 3주동안의 군사보복 위협으로 사정을 악화시켰으면서도 이같은 인도적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탈레반을 제거함으로써 테러리즘을 종식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테러의 악순환을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이를 통해 고상한 도덕적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쟁논리는 속임수인가, 순진함인가, 아니면 그저 희망사항인가? 이 모든 요소들이 혼재돼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서구식 근본주의가 숨어 있다. 서방은 역사의 진보를 믿으면서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해 왔다. 나아가 다른 나라들이 서구의 성취를 따라잡을 유일한 방법은 서구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서방이 다른 문화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 것은 이들이 서구의 가치를 받아들였을 때뿐이다. 따라서 서방은 종종 다른 종교적 신념에 대해 지독한 불관용을 보여 왔고 거리낌없이 경멸과 편견을 표출해 왔다.

최악의 경우, 서구 근본주의는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적인 빈 라덴과 똑같은 성향을 보인다. 첫째, 의심의 여지없는 우월감, 둘째, 자신의 가치가 보편적으로 수용돼야 한다는 주장, 셋째,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의지의 결여가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어두운 측면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1백50년동안 주기적으로 전지구적인 대약탈로 드러났다. 이같은 어두운 측면은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자기만족감에 젖어 있던 영국 빅토리아시대 중반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구 근본주의의 뿌리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정통신앙이라는 믿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교도주의와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건국된 미국은 이같은 도덕적 우위의 믿음을 역사적으로 이어왔다.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이 서방의 경제적, 기술적 힘과 결합되면서 역사상 최악의 식민주의를 지탱해 왔고, 지금은 초국적 기업의 활동과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를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사상들이 그렇듯, 자유주의도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전쟁이 과열되고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가 만연할 경우 관용과 겸손, 자기비판의 능력과 같은 자유주의의 장점들이 가장 먼저 희생된다는 사실이다.

9.11과 그 여파는 서구 문화의 우월성의 가치를 공격적으로 재천명하게 만들었다. 반면 우리 문화와 가치에 대해 사려깊은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두 측면은 단지 무슬림 세계뿐만 아니라 비서구 세계와 서구의 관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점점 더 혼잡해지는 이 지구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대안이 있다. 정치철학자 비쿠 파레흐(Bhikhu Parekh)는 “인간 생활의 광대함과 깊이는 너무도 방대해서 하나의 문화 안에 쓸어담을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각각의 문화는 인간 존재를 양육하고 발전시키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문화를 도외시하게 한다는 것, 그러나 인류의 발전은 언제나 문화간의 대화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주관성에 갇힌 죄수”라고 파레흐는 주장한다. 이는 개인이나 집단, 모두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으로 하여금 우리의 무지함을 깨우치게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가 있다.

파레흐는 인간 사회에 보편적 도덕 원리(여성의 권리, 표현의 자유, 생존권과 같은)가 있다는 자유주의의 주장은 옳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 원리에는 유일한 해석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서구의 것이라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권리는 갈등하기 마련이며 그 갈등의 해소 방법은 각 문화의 독특한 주고 받음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한 주고 받음을 이해하는 것은 때론 복잡하고 어렵다. 그러나 어떠한 문화도 완벽한 주고 받음의 방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서구 자유주의가 자신의 정직함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이같은 점을 인정할 것이다.

사회적 결속력, 공공선과 아량, 그리고 인간적 유대의 중시 등 서구는 이슬람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슬람 사회 또한 서구와 동일한 문제에-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어떻게 이룰까 하는-직면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근본주의라고 비난하기보다는 상대방으로부터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서구가 이슬람에 대해 근본주의를 없애라고 요구한다면 서구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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