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냄새와 정욕에 질식한 예술의 거리"

['자본'이 걷고 싶은 거리, 밀려난 그들·끝] '종로→명동→신촌→홍대→?' 청년문화 잔혹사

지난 20일 저녁. 최근 신보를 낸 허클베리 핀의 이기용(기타, 보컬)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서교 365번지를 지날 때다. 보랏빛 티셔츠를 맞춰 입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전단지를 길가에 뿌리고 있었다. 여성이 입장하면 술이 공짜고, 부킹을 책임져준다는 내용이었다. 주차장길에 자리 잡은 대형 클럽 광고지였다.

조금 더 나아가니 귀에 이어폰을 꽂은 남성이 여성들을 붙잡는다. 여성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호빠'와 이태원 등지의 나이트클럽 '삐끼'들이었다. 주변에 자리 잡은 건물들을 올려다 봤다. 개성 없는 간판들이 빼곡히 들어찬 대형 빌딩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강남, 신촌 등지에서 익숙하게 본 풍경이다. 홍대 앞도 다르지 않다.

10여 년 전인 2002년, 선술집들이 자리했던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일대가 정부의 주도 아래 '걷고 싶은 거리'로 바뀌었다. 정부는 다시 이곳을 개발하려 한다. 걷고 싶은 거리부터 상수동까지, 사실상 '홍대 앞'으로 불리는 전 상권이 개발 대상이다. 힘겹게 숨 쉬고 있는 홍대 앞 특유의 감수성은 희미한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본'이 걷고 싶은 거리, 밀려난 그들

막창집 주인 이씨는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홍대 앞에는 왜 '부비부비' 클럽만 남게 됐나"

▲주차장길 일대. 서교365번지의 가게들이 위태롭게 버티는 가운데, 이곳은 월세 1000만 원이 넘어가는 최고급 상권으로 변했다. 이제 서교동 일대의 가게 임대료는 신촌을 넘어섰다. ⓒ프레시안(최형락)

70년대 명동

항상 똑같은 패턴이다. 어떤 계기로든, 청년문화가 특정 지역에 융성한다. 사람이 몰려든다. 이걸 보고, 자본이 유입된다. 청년문화는 밀려난다. 자본은 도시를 몰개성화시킨다. 문화가 사라진다. 문화가 떠난 도시는 죽는다. 상권이 죽는다. 자본이 재개발에 나선다. 남은 사람들이 완전히 밀려난다….

과거 종로가 그랬다. 1930년대 종로는 이른바 '모던 뽀이'들의 집결지였다. 일본의 엔카와 블루스가 결합한 새로운 음악, 곧 트로트가 이곳을 점령했다. 기성 세대는 이해하지 못하는 새 세대의 기운이 넘쳐났다.

그러나 이곳은 전쟁의 충격 이후 사창가로 변했다. 자본의 영향이 있었다. 서울시 내무국장과 서울시립대 대학원장을 역임한 손정목 선생은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에서 '종삼(종로3가 사창가)'이 번창한 원인으로 "당시에는 직장이 종로·중구 관내에 밀집해 있었고, 술집들도 무교동·명동·낙원동 등지에 밀집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서울 최대 상권이 인접했던 까닭에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자리의 끝이 인근 종삼의 사창가로 귀결됐다. 이렇게 종로가 끝났다.

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문화가 피어났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막걸리와 함께 학생들의 사회담론이 오가던 선술집 문화가 퍼졌고, 포크 음악이 열풍을 일으켰다. 대중음악평론가 이영미의 말대로 "포크는 한국대중가요사에서 최초로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라는 세대의 대립구도를 내세운 청년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집결지는 명동과 무교동 등지였다. 김민기와 한대수의 포크가 불을 뿜었다. 체제의 반격이 일어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마초 파동이 이어지고 김민기와 신중현은 기타를 놓아야 했다.

그리고 포크는 변했다.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이전하고, 새 정부의 이른바 '3S정책'이 이어지면서 포크는 방송에 의해 '보편적 향수'로 안전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체제 친화적인 안전한 노래만이 살아남았다. 한대수가 밀려나고 통기타 노래가 방송 광고에 쓰였다. 청년문화가 자본과 타협한 것이다.

신촌 잔혹사

새 집결지는 연세대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가 인근에 자리한 서울 서북부의 신촌이었다. 1980년대 후반의 신촌은 기존 청년문화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문화적 욕구가 분출하는 곳으로 일어났다.

운동권 문화도, 기성세대의 술자리 문화도 아닌 이 새로운 문화를 일으킨 중심은 음악 감상실, 그리고 술집이었다. 이들 장소에서 울린 음악은 '미제의 노래'라거나 '정신 사나운 소리'로 폄훼되던 록이었다. 마니아들의 공간이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다. 일렉트릭 뮤즈의 대표이자 밴드 플라스틱 피플을 이끄는 김민규(90학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는 라이브클럽이란 개념이 없을 때였어요. 기성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이들이 오직 '같이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모이고 싶어 했죠. 이런 욕구가 집결되던 곳이 신촌의 우드스탁, 도어스와 같은 술집이었어요. 음악을 좋아하는 애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음악에 대해 토론하고, 새로운 음악을 접하게 됐죠."

이기용(93학번)도 비슷한 기억을 공유한다. "이대 상권은 밤 11시만 되면 끝나요. 아직 홍대에는 음악적 기반이 자리 잡지 못했죠. 당시 신촌, 특히 우드스탁은 분명 청년문화의 중심지였어요."

때맞춰 <월간 팝송>, <핫뮤직>과 같은 음악 전문 매체가 수만 부의 판매고를 자랑하며 황금기를 맞이했다. 신촌블루스가 대학가를 휘어잡았고 강남의 카페 '바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H2O가 동시대 영미권의 음악을 연주했다. 격정의 청년문화가 운동권으로 쪼그라들고, 빈 공간을 새 세대의 새로운 문화가 차지했다. 신촌은 그 용광로의 한가운데였다.

신촌의 4년여에 걸친 영화에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대자본이 유입되고 백화점이 들어섰다. 식당가가 줄을 잇고 모텔촌이 큰 규모로 형성됐다. 당시 변화상을 나타내는 두 단면으로 이기용은 미군의 증가와 '삐끼'들의 등장을 꼽는다.

"뭐라고 할까…. '정액이 날아다니고 있었'어요. 우드스탁과 같은 곳이 입소문 나니, 이곳을 찾는 미군이 늘어나더라고요. '원나잇 스탠드'를 노리는 부류가 보이니까, 자연스럽게 모텔촌과 나이트클럽이 들어서게 됐죠. '신촌이 맛이 가는구나'하고 느낀 순간이었어요. 문화가 사라지고 욕망만 남게 된 거죠. 90년대 중반? 그 정도에요."

홍대 신의 태동

▲김웅 드럭레코드 대표. 홍대폭발의 처음부터 지금까지를 지켜본 사람 중 하나다. ⓒ프레시안(최형락)
90년대 초반, 홍대 앞에는 잠시 록카페가 유행했었다. 김웅 드럭레코드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강북에 '낑깡족'이라는 말이 돌았어요. 압구정동 오렌지족을 따라하는 강북 애들을 비하하는 말이었죠. 이런 애들이 홍대 앞으로 모이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오래 가진 못했죠. 곧 신촌 문화에 눌려서 사라졌어요."

그러나 홍대 앞은 '다른' 문화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홍대 미대가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홍대 앞에는 미술학도들의 작업실이 많았다. '108작업실(보증금 100만 원, 월세 8만 원)'로 회자되듯, 저렴한 체류 비용 덕분에 예술가들이 몰렸다. 안상수 시각디자인과 교수, 미술가 최정화 등이 이곳에 예술적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발전소, 황금투구 등 기존 록카페와 다른 분위기의 클럽이 1992년을 전후로 홍대 앞에 생겨났다. 예술적 감수성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성기완(시인, 3호선 버터플라이 기타)이 쓴 <홍대 앞 새벽 세시>에서 조윤석(전 황신혜밴드 멤버, 홍대 건축과 졸업)은 안상수 홍대 시각디자인과 교수가 홍대 문화 태동의 주역이었다고 설명한다.

"디지털, 디자인, 뭐 그런 것이 주도하게 되었죠. 분위기도 엘리트들끼리만 놀던 분위기에서 함께 나누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안상수 선생이 이끌던 '일렉트로닉' 카페에서 최초의 웹 아트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김형태(조윤석과 함께 황신혜밴드를 만든 예술인, 발전소를 운영했다, 홍대 회화과 졸업), 백현진, 달파란, 성기완 등의 새로운 예술인이 기성 문화와 다른 새 문화를 홍대 인근에 이식시켰다. 서서히 이곳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위 문화가 알려질 때가 다가왔다. 홍대가 하위문화 해방구로서 일어설 준비가 끝났다.

▲드럭레코드가 내놓은 [아워네이션] 시리즈는 홍대의 인디음악 폭발을 견인했다. ⓒ드럭레코드

홍대 폭발

미술인들이 일궈놓은 홍대 앞에 음악가들이 결집했다. 태동은 1994년 7월, 홍대에서 극동방송국으로 가는 길에 자리했던 한 작은 술집이었다.

"처음 드럭은 음악 틀어주는 술집이었어요. 신촌의 술집들과 별 다르진 않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 하는 애들이 공연하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했죠."

김웅 대표는 이듬해를 홍대 폭발의 결정적 시기로 꼽는다. 커트 코베인(90년대 록 부활을 이끈 전설적 밴드 니르바나(Nirvana)의 보컬, 기타) 사망 1주기 추모 공연이 드럭에서 열렸다. 한국에서 펑크(Punk, 대형화되는 록의 엘리트주의에 반발해 탄생한 장르, 이후 펑크도 록의 한 가지로 흡수된다) 공연이 열린, 거의 최초의 순간이었다. 프리버드, 재머스, 마스터플랜, 스팽글, 롤링 스톤즈(현 롤링 홀) 등 라이브클럽이 홍대 등지에 연달아 생겨났다. 커버곡을 연주하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자작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메탈 형님'들과도, 방송에 나오는 주류 가수와도 달랐다.

곧 이어 드럭은 인디 폭발의 기원으로 평가되는 [Our Nation] 시리즈를 발매했다. 크라잉 넛과 노 브레인, 위퍼, 옐로우 키친 등이 이 앨범을 통해 데뷔했다. 원종우(딴지일보 필진 파토)는 일인그룹 '배드 테이스트'를 만들어 독립음반 [One Man Band…]를 내놨다. 모던록 이식의 결정적 획을 그은 언니네이발관의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가 나왔고, 기존 헤비메탈과 다른 결을 지녔던 노이즈가든의 데뷔앨범이 충격을 안겼다. 신촌 놀이터 대신 홍대 앞 놀이터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이 모든 사건이 1996년까지 마무리됐다.

1996년, 드디어 지하에 머물던 '새로운 청년'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에너지가 길거리로 나왔다. 홍대 주차장거리로 펑크 밴드들이 몰려나와 '스트리트 펑크 쇼'를 열었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으로 밴드가 청중에게 물을 뿌려대고, 아이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고, 소음과 같은 음악이 고막을 때리는 현장을 지켜봤다. 대낮이었다. 음지의 문화가 양지로 나온 순간이었다.

걷고 싶은 거리, 클럽, 그리고 음악

90년대 말은 조금 이상한 시기였다. 허클베리 핀, 럭스, 마이 앤트 메리, 코코어 등이 수작 앨범을 내놨다. 1997년 라이브클럽들은 '개클연(개방적인 클럽 연대)'을 통해 클럽 합법화에 나섰다. 클럽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매체들은 홍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었다. 김민규 대표는 "한 사이클이 돌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다. 변화가 시작됐다.

1999년 12월,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가 홍대 부근에 댄스클럽 엔비(nb)를 세웠다. 곧 이어 2001년 3월, nb와 MI, 언더그라운드, SSAB 등 4개 클럽이 뭉쳐 '클럽데이'가 출범했다. 하우스, 테크노 등 90년대 중반 세계를 강타한 전자음악이 한국의 클럽가를 뒤흔들었다.

그런데도 에너지는 가라앉고 있었다. 이 이질감의 정체는 자본 유입이었다. 마포구가 걷고 싶은 거리를 홍대에 조성했다. 2002 한일월드컵이 열렸다. 한 달 동안 모든 사람들이 해방감을 만끽했다. 폭발한 에너지를 더 발산할 장소가 필요했다. 홍대 클럽이 가장 좋은 대안이었다. 클럽데이가 폭발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몰려들었다. '부비부비'가 알려지고 '원나잇 스탠드'가 회자되고 '엑스터시'가 뉴스를 탔다. 홍대 상권이 급격한 속도로 팽창했다.

"라이브클럽이 1998년을 기점으로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는 말 못하겠지만, 댄스클럽이 인기를 끌면서 외부 자본이 들어온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서교동에 있던 단독주택이 하나 둘 허물어지고 빌딩이 늘어섰으니까요." (김웅)

"2002한일월드컵이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외부 자본의 융단폭격이 시작됐죠. 프리마켓도 이 때 시작했는데, 어찌 보면 예술인들의 소극적인 저항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정지연 스트리트 H 편집장)

"클럽데이는, 엄밀히 말해 홍대 인디문화의 폭발을 상징하는 사건은 아니에요. 오히려 정반대죠. 자본의 홍대 점령을 완료하는 사건이었다고 봐요. 당시 외국 담배회사가 매주말 클럽마다 담배 한 박스 씩을 뿌려댔으니까요. 외부 자본이 홍대 앞에서 '돈'을 본 거죠. 홍대 앞이 '번잡하다'는 생각이 든 게 이 무렵이에요. 음악과 예술이 홍대 앞 '청년문화'의 코드에서 탈락했어요." (김민규)

"걷고 싶은 거리를 2002년 이후로 가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우리가 예전에 부르던 '홍대 앞'의 개념은, 이제 홍대 주변으로 밀려났죠. 지금 홍대를 보세요. '디자인'과 '음악'이 사라졌어요. 감성이 사라진 거죠. 대자본에 의해 아무 색깔이 없는 가게들만 넘쳐나요. 강남, 신촌, 지방 중심가와 이곳이 뭐가 다른가요?"
(이기용)

자본의 침식, 쓰러지는 독립 문화

홍대 폭발을 이끌었던 이들은 물밀 듯 몰려드는 자본의 힘을 견디지 못했다.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예술인들이 하나 둘씩 홍대를 떠났다. 홍대 예술을 상징하던 '씨어터제로'가 문을 닫았다. 미술인들이 먼저 밀려난 이유는 이들이 수익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익을 '크게' 못 내는 음악인들의 이전이 뒤따르는 것 또한 예정된 수순이었다. 상당수 음악인의 거주지, 연습실, 인디레이블 사무실이 서교동을 떠났다.

지금 홍대의 모습은 90년대 초 신촌이 쓰러질 때와 정확히 겹친다. 홍대 앞은 문화생산기반시설이 밀려난 대신, 주말마다 외국인이 넘쳐날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역으로 변했다. 사람이 밀려들면서 주말 홍대입구역 9번 출구는 이동이 어려울 정도다. 각종 홍보전단지가 길을 뒤덮고, 밤새 도시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홍대에 더 이상 '내일은 없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1998년 홍대로 이전한 클럽 빵의 김영등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찌됐든 신(scene)은 계속해서 성장하곤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급격한 상업화로 인해 클럽 고유의 개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죠. 영세한 클럽들이 온통 대관에 의존하게 된 원인이에요. 그러니 '돈 되는' 음악인만 클럽에 서게 되는 현상이 심해지죠."

"예전 홍대 앞이 가졌던 그 창조적 에너지가 부활하진 못할 것 같아요. 신 내부에서도 돈을 좇는 일부만 번성하고, 나머지는 전부 죽어가는 상황이에요. 사실상 홍대 앞의 '인디 문화'가 지역 상업화에 따라 돈을 좇는 '매스 컬처'로 변했어요. 설사 마포구에서 홍대 개발을 중단한다손 치더라도 이 흐름을 바꾸진 못할 것 같아요."
(김민규)

▲걷고 싶은 거리. 길은 깨끗해졌고, 벽화는 이질적이다. 고깃집과 가게들이 길과 사람을 포위했다. 홍대 앞의 얼굴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내일은 있을까

대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대대적인 도시재개발 시스템 자체를 바꾸거나, 지역 특성을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의 대안적 개발이 나오지 않고선 힘들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무엇보다,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홍대 앞의 고유성은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나온다.

"결국 한국이 경쟁사회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다들 경쟁적으로 개발에 나서고, 돈만 좇고, 예술과 상관없는 상인들이 득세하는 것 아니겠어요? 문화소비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 관객들을 보면, 20대가 지나면 공연장에 오질 않아요. 공연에 소비할 자본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거죠." (이기용)

이기용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허클베리 핀이 운영하는 '샤'를 돌아봤다. 성수동에서 열린 허클베리 핀의 공연을 보고 온 이들이 이소영(보컬, 기타)과 어울리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지역 문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비틀스(Beatles)를 비롯해 오아시스(Oasis), 엘라스티카(Elastica) 등 허클베리 핀의 정서를 닮은 90년대 해외 록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기용은 "샤를 계속 운영하고 싶은데, 임대료가 올라 버티기 어렵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서교동 등지의 술집 대부분에선 '나가수'의 노래가 나왔다. 홍대 앞도 표준화된 문화에 포섭됐다는 상징이다. "강남 너무 사람 많아/ 홍대 사람 많아/ 신촌은 뭔가 부족해"라는 <이태원 프리덤>의 가사는 오늘 홍대의 위치를 정확히 설명한다. 과연 이곳에서 '방송에 나오지 않는' 음악이 언제까지 흐를 수 있을까. 홍대 앞은 확장된 걸까, 밀려난 걸까.

(☞이전 기사 보기 : "홍대 앞에는 왜 '부비부비' 클럽만 남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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