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양대 앞 작은 서점에서 리영희 선생을 가까이서 본 일이 있다. 몇십 년 똑같은 헤어스타일, 가무잡잡한 낯빛, 공기를 유쾌하게 쟁쟁 울리게 하는 목소리. 그는 여전히 평안도 소년이었다.
영혼의 주마등 속에서 그때의 시공간을 일시정지 해놓고 확대해 보려고 애를 써보니 내 손에는 <프랑스대혁명사>(알베르 소불)가 들려 있다. <프랑스혁명사>(알베르 마티에)보다 정평 있고 급진적 해석을 한 책이라고 해서 들춰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리영희 선생은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양대 여학생에게 '서점에서 일하니까 더 미인'이라는 덕담을 건넸다. 노교수가 젊은 여학생에게 던지는 그런 말은 일그러진 오늘의 시대상에 비추면 언뜻 민망하거나 불미스러운 단상들을 곱씹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무애한 덕담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서점 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보며 '역시 미인'이라며 '화이팅'을 덧붙이고는 총총 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평안도 소년이었다.
<역정>은 청년 리영희의 자전이다. <역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희대의 군 부정부패 참사인 국민방위군 사건 이후 그가 전역하면서 나부끼는 태극기에 깍듯한 거수경례를 하고 뒤돌아서는 장면이다. 국군 장교 리영희가 낮에도 눈에 불을 켜고 정의를 찾아 나서는 비판적 지성의 늑대가 되어 황야로 나서는 순간이다.
반추를 위한 가벼운 수필로 다룰 일은 아니지만, 정운영이 돌아갔을 때 김규항이 정운영의 교수 시절 이미지를 돌아보며 그에게서 '유럽 지식인'을 느꼈다고 한 일,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리영희 비판 등을 되새겨 보니 입맛이 씁쓸하다. 김규항과 윤평중은 그때에 있어서만은 '영웅의 무덤에서 춤추는 테르시테스'(호머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고대 그리스 최악의 횡설수설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대의 황혼에 대한 비판은 새벽을 위한 황혼의 비판이어야만 하며, 황혼녘까지 새벽이고자 했던 고된 역정에 대한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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