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중동평화안, '선거용' 쓰레기 구상"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선거철 맞아 노골화된 미-이스라엘 동맹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막는답시고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이른바 '중동평화 구상'을 두고 세계가 시끄럽다. 그 소식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1월 29일 새벽. 그 소식을 듣자마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문제투성이의 일방적 방안을 '평화구상'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얼굴 두꺼워도 참으로 두껍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갖고 또 트럼프 비판 기사를 써야할까. 무시하는 게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슬며시 들었다.

'힘의 논리'에 바탕한 트럼프스러운 해법


백악관을 방문한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와 함께한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중동평화안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쪽 다 이로운(win-win) 방안이라 주장했다. 나아가 '가장 현실적인 2개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자 '세기의 거래(deal)'라며 그 특유의 넉살을 부렸다.

하지만 중동평화를 바라는 지구촌 사람들은 "트럼프여, 당신 너무 한 거 아니오? 이스라엘에만 치우친 편파적 구상을 세기의 딜이라니?"라며 분노와 더불어 허탈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지금껏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의 최종 해법으로 '두 국가 해법'을 꼽아왔다. 중동 땅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개의 독립국가를 세움으로써 중동 분쟁을 평화적으로 마무리 짓자는 방안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현실적인 2개 국가 해법'이란 말장난을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점령해온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바탕을 해서 약자인 팔레스타인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힘의 논리'이자 '트럼프스러운' 해법이 담긴 중동평화 구상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긴 세우되, 주권국가라 말하기 어려운 수준의 모욕적인 내용들이다. 논란이 되는 트럼프의 발표는 크게 세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4년 동안 정착촌 건설 못한다? 4년 뒤엔?

첫째,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에 대해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되, 앞으로 4년 동안 추가 정착촌 건설을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서안지구의 60만 유대인 정착민이 중동평화의 암초라는 것은 어제오늘의 지적이 아니다. 정착민들은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터를 잡고 줄곧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충돌해왔다.

전쟁에 관한 국제법은 점령지의 민간인 재산과 생명을 해쳐선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따라서 점령지에 정착촌을 세워선 안 된다. 국제법을 무시한 유대인 정착촌이 서안지구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 중동평화를 바라기 어렵다. 트럼프의 평화안은 아예 그 불법 점령지에 대한 영유권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이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노릇이다.

트럼프의 구상에 따르면, 앞으로 4년 동안 추가 정착촌 건설을 못하도록 한다고 돼 있다. 그렇지만 4년 뒤엔? 속이 너무나 빤히 들여다보이는 제안이다. 여태껏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논조를 펴온 <뉴욕타임스>마저 "서안지구 곳곳에 세워진 유대인 정착촌이 영구화되면, 팔레스타인 주민의 고립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라고 지적할 정도다.

▲ 베들레헴 분리장벽에 그려진 대형벽화. 독립 이룰 그날까지 이어질 팔레스타인의 투쟁의지를 담고 있다. Ⓒ김재명

동예루살렘 휘젓는 이스라엘군

둘째,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되, 이스라엘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동서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예루살렘을 '유엔 신탁통치 아래 양쪽에 모두 개방된 국제도시로 둔다'고 결의한 바 있다(유엔총회 결의안 181).

이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아랍 그 어느 쪽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은 국제사회가 오랫동안 존중해온 합의였다. 대사관을 예루살렘에 두질 않고 지중해에 접해 있는 텔아비브에 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201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70년을 맞아 텔아비브에 있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도록 함으로써 세계적인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이스라엘은 강경파나 온건파를 막론하고 "예루살렘은 결코 분할되거나 공유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고집을 부려왔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들어서더라도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랍어로 '알 쿠즈'라 부르는 동예루살렘은 언젠가는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로 삼으려는 곳이다. 트럼프의 이번 중동평화 구상을 보면, 얼핏 이스라엘이 양보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속은 이스라엘에 있다. 이스라엘이 동서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지금껏 사실상 그래왔지만 더 확실하게 명시적으로) 갖게 된다면, 팔레스타인 독립은 허울뿐인 셈이 된다. 한 나라의 수도를 다른 나라의 군대가 휘젓고 다닌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꼬리표 달린 500억 달러 원조

셋째, 미국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위해 500억 달러(약 59조 원)를 지원하되, 팔레스타인은 군대 창설과 외국과의 안보 조약은 금지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1년에 30억 달러가 넘는 군사 원조를 해왔다(2006년까지만 해도 미국의 대 이스라엘 원조는 군사원조 2, 경제원조 1의 비율이었지만, 2007년부터는 군사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미국의 군사원조를 무상으로 30억 달러어치나 받는 나라가 없다.

이에 비해 미국의 대팔레스타인 원조는 3억 5000만 달러에 그쳤다. 이것도 오바마 행정부 때까지의 일이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선 뒤 3분의 1로 깎여 겨우 1억 달러에 머무른다. 이스라엘이 받는 원조액의 30분의 1 수준이다. 그마저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면 끊기기 일쑤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지원금으로 트럼프가 제시한 500억 달러는 제법 큰돈이다. 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도 있는 액수다. 하지만 트럼프가 누구인가. 우리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을 5배나 올려 받으려는 물신주의자 트럼프가 아닌가. 야비한 장사꾼 근성을 지닌 그가 나중에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오리발을 내밀 게 뻔하다. 더구나 500억 달러 원조 카드에 꼬리표처럼 딸려온 조건이 군대도 못 만들고 외국과 안보 조약도 못한다고? 팔레스타인 쪽에서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 사위와 강골 총리의 합작품


트럼프의 터무니없는 중동평화 구상에 강력한 입김을 불어넣은 문제의 두 인물이 있다. 하나는 유대인 출신인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다른 하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다. 이 둘의 끈끈한 교감 속에 트럼프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중동평화안 뼈대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네타냐후와 쿠슈너 두 사람은 백악관 기자회견 내내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의 모습을 전하는 영국 BBC 방송기자가 "형식은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공동 기자회견이지만, 외교 관련 기자회견이 아니라 사교 파티나 다름없었다"고 보도한 것도 그런 분위기를 못 마땅하게 여겨서일 것이다.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겠다"

트럼프가 내놓은 평화안이 가뜩이나 휘발성 높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불장난을 치는 거냐는 비판이 쏟아지는 중이다. 트럼프의 중동평화안 소식을 들은 중동 지역의 많은 사람들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해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친미 아랍 국가인 사우디나 이집트를 빼고는)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이 비난하고 나섰다.

중동평화안이라면 이해 당사자가 참여해야 하는 것인데,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강골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만 일방적으로 싸고 돌아왔다. 이번 경우엔 팔레스타인의 강경파인 하마스는 물론이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인 마무드 압바스와도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 압바스는 하마스로부터 '타협파', '친미파'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만큼은 압바스도 "그같은 중동평화 구상이라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겠다"며 하마스와 비판적 입장을 함께 했다.

유대인의 돈과 표를 바라는 트럼프

트럼프가 이번에 내놓은 문제의 중동평화구상은 터무니없는 내용도 문제지만, 발표 시점도 논란거리다.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와 3월 총선을 앞둔 네타냐후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선거철 정치쇼라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 내 유대인 집단의 정치자금과 지지를 챙기고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비롯된 탄핵 국면을 돌파함으로써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트럼프의 당면 목표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유대인들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 압도적이다. 공화당 대선후보가 30퍼센트 이상 유대인 지지율을 기록한 경우는 지미 카터와 맞섰던 로널드 레이건(1980년, 38%), 조지 H. 부시(1988년, 30%) 정도다.

유대인 표심에 관한 한 트럼프 후보도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후보에 크게 뒤졌다. 힐러리 71퍼센트를 얻은 데 비해 트럼프는 29%에 그쳤다. 재선고지를 넘으려면 미국내 700만 유대인의 돈과 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트럼프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팔 유혈분쟁 바라는 네타냐후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는 트럼프보다 더 절박한 모습이다. 2019년 두 번의 총선에서 이기지 못해 내각을 구성하지 못한 데다 부패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상태다. 그야말로 위기의 사내다. 오는 3월 2일로 다가온 이스라엘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리쿠드당을 비롯한 보수-강경-유대교 연합 정치세력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 트럼프의 이번 중동평화 구상 발표는 벼랑끝 네타냐후의 정치적 생명줄을 이어주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10년 동안 이스라엘 정치권을 지배해온 교활한 네타냐후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섬뜩해진다. 트럼프의 중동평화안이 부싯돌이 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유혈분쟁이 격화되길 바랄 것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위가 가자지구는 물론 서안지구에서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다. 3.2 이스라엘 총선을 앞두고 유혈분쟁이 격화된다면, 선거지형이 강경파 네타냐후에게 더 이롭게 바뀌기 마련이다.

지난 10년 동안 피를 먹고 자란 정치인을 이스라엘에서 꼽자면 네타냐후를 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온건 유권자들은 이번에도 네타냐후가 이-팔 유혈분쟁을 선거에 이용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총선은 이제 한 달 남았다. 2월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문제다. 1월 초 미국과 이란 사이의 긴장이 전쟁 국면으로 번질 가능성은 다행히도 크게 줄어들었다. 오는 2월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혈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틀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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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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