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꽉 쥔 채 떠난 남편, 그 한 풀어주고 싶어요"

[인터뷰] 고 문중원 기수의 부인 오은주 씨

"지금도 기사나 사진들 보면 남편 사진은 다 웃고 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처음 만났을 때 환하게 웃고 있는 인상이었어요."

오은주 씨와 고 문중원 기수는 2008년 처음 만났다. 오 씨는 문 기수를 처음 봤을 때 그 "환하게 웃는 인상"이 좋았다. '저 사람은 정말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구나'. 호감이 갔다. 오 씨가 처음 경마장에 갔던 날에도 말을 타고 나오던 문 기수는 오 씨에게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 씨는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년여의 연애 끝에 둘은 결혼했다.

오 씨가 받은 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문 기수는 가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힘들텐데도 항상 "오늘 애들이랑 뭐하지? 어디 가지?"라고 물었다. 오 씨는 "힘들텐데 쉬어"라며 남편을 말리곤 했다.

오 씨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면 문 기수는 불을 붙인 초를 꽂은 케잌과 꽃을 들고 현관문 벨을 눌렀다. 누가 안 시켜도 명절, 때로 주말에도 장인이나 친척들에게 "잘 지내시냐"며 전화를 돌렸다. 겨울이 되면, 장사를 하는 장인, 장모에게 드린다며 방한용품을 사서 부쳤다. 문 기수의 장인인 오준식 씨는 문 기수를 사위가 아닌 '아들'이라고 불렀다.

가족에게는 힘든 티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 기수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오 씨가 "힘들어?" 하고 물으면 늘 "괜찮아"라고 답했다. 평소 술을 못 마시는 문 기수가 거듭되는 '조교사 채용 비리' 때문에 술에 취해 오 씨 앞에서 눈물을 보이던 날에도 문 기수는 "괜찮다"고만 말했다.

그랬던 문 기수가 2019년 11월 29일. 부산경남경마공원 기숙사에서 세상을 등졌다. 8살, 5살 두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12월 24일에 배송되도록 예약해놓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후 오 씨를 비롯한 어머니, 아버지, 장인 등 유족은 생전에 고인이 가입해있던 공공운수노조와 함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문 기수가 세상을 떠난지 36일이 지났지만,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지난 12월 27일에는 문 기수의 시신이 실린 운구차가 부산에서 서울 정부청사로 올라왔다.


▲ 고문중원열사시민분향소 옆 천막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오은주 씨. ⓒ프레시안(최용락)


"마사회의 갑질과 부조리가 14년 간 남편을 조금씩 죽여왔다"

문 기수는 유서에서 조교사(경마 경기의 감독 역할을 하는 직책)가 기수에게 "말을 대충 타라"는 등의 부정 지시를 한다고 적었다. 이를 거부하면 다음부터는 다친 말을 타야 했다. 비가 오든 태풍이 불든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말 위에 올라야했다. 문 기수는 그런 일이 싫어 조교사가 되려 했다.

오 씨도 문 기수를 응원했다. 오 씨는 문 기수가 자신을 환한 미소로 맞던, 경마장에 갔던 첫날을 잊지 못한다.

"처음 부산 경마장에 간 날, 경마 경기가 신기해서 다른 경주도 많이 봤어요. 전광판으로 서울 경주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수분이 낙마를 하셨어요. 병원으로 이송되셨는데 결국 사망하셨어요. 생생히 기억나요. 그때부터 경마장이 저한테는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던 것 같아요. 그 뒤로 남편 낙마 사고도 여러 번 봤어요. 떨어질 각오를 하고 위험해도 말에 올라타야 했던 순간들... 그래서 남편이 하루 빨리 조교사가 되길 바랐어요.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문 기수는 열심히 준비해서 시험을 치고 조교사 면허를 땄다. 실제 조교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마사회 심사를 거쳐 마사(마방)를 배정받아야 한다. 문 기수는 유서에서 마사 배정 시기가 오면, 마사회 고위 간부와 친한 사람이 마사를 배정받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항상 그 소문대로 되었다고 적었다. 오 씨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런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조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마방을 배정받으려면 사업계획서라든지 준비할 게 되게 많았거든요. 그런 준비를 열심히 하는 상황에서 경마장에 매번 소문이 도는 거에요. '합격자는 정해져 있다.' 힘들어했죠. 힘들어했는데 '설마 그 소문이 맞겠어. 두 자리가 났다고 하면 열심히 했으니까 한 자리는 되겠지.' 마음은 아팠겠지만 아랑곳 않고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 소문이 2번, 3번... 속은 다 부서지고 망가지는데 가족들한테는 괜찮다는 말만."

속이 부서지는 걸 견디지 못한 것일까. 문 기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 씨는 그렇게 떠난 남편의 시신 앞에서 오열했다. 남편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주먹은 꽉 쥐고 있었다. 한스러운 모습의 시신과 유서 앞에서 오 씨는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 남편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남편이 힘든 건 알았지만, 유서를 확인하는 순간 갑질과 부조리가 남편을 14년 간 조금씩 죽여왔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됐어요. 안치실에 누워 있는 남편이 정말로 눈을 감지 못한 채 차갑게 굳어있었거든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계속 떠오르고, 그때마다 고통과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또, 정말 손을 꽉 쥐고 가슴에 안고 죽었어요. 그 손을 펴주는 게 남편의 한을 풀어주는 거라고 느꼈어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고 제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바로 잡고, 왜 죽었는지 규명해야 한다'."


▲ 서울 정부청사 앞 매일 열리는 추모문화제에서 촛불을 들고 앉아 있는 오은주 씨와 문 기수의 어머니. 공공운수노조 제공.

유족과는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태를 봉합하려 한 마사회

문 기수가 세상을 등지고 유족들이 싸움을 시작한 지 36일이 지났지만, 김낙순 한국마사회 회장을 비롯한 마사회 고위 간부들은 한 번도 유족과 만나지 않았다.

지난 12월 21일 유족은 김 회장을 만나기 위해 직접 렛츠런파크서울에 있는 마사회 본관으로 향했다. 당일 마사회는 경찰에 경호를 요청하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울부짖는 유족을 건물에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경찰은 기어서라도 본관에 들어가려는 오 씨의 머리를 발로 차고 목을 졸랐다. 해당 경찰에 대해서는 폭행 혐의로 고소·고발장이 접수되어 있다.

"저는 그 날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도 유족이 가면 마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마사회장이 나와서 상황 설명도 하고 대책을 이야기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경찰 병력이 저희를 다 막아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더군다나 경찰이 저를 폭행하고... 못 만나고 나왔을 때는 왜 마사회장 자리에 앉아있나 의문도 들고. 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사람의 책임감 있는 모습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12월 26일 마사회는 유족이나 사고가 일어난 부산경남 경마공원 기수와의 협의 없이 '경마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 승자독식 상금구조 개편 △ 기수의 기승횟수 제한을 통한 출전 기회 확대 △ 외(外)마사 도입을 통한 조교사 취업 기회 확대 등이 골자였다.

마사회의 안이 나왔지만, 유족은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오 씨는 "사태가 커진 탓에 사태를 어떻게 해서든 덮으려고 하는 안"이라고 말한다.

실제 '승자독식 상금구조 개편안'은 1위 57%, 2위 21%, 3위 13%, 4위 5%, 5위 4%로 나누던 부산경남 경마공원의 순위상금을 1위 55%, 2위 22%, 3위 14%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4위와 5위의 상금은 그대로다. 1위 상금의 2%를 깎아 2위와 3위에게 1%씩 얹어주겠다는 것이다.

나머지 두 안도 문 기수가 죽음으로 호소한 마사회와 조교사의 갑질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기승횟수를 제한해도 조교사의 부당 지시를 거부한 기수가 출전기회를 빼앗기고 이에 따라 생계를 위협받는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외마사를 도입해 마사의 수를 늘리는 것은 경쟁체제를 심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유족과 노조가 요구하고 있는 진상규명, 진정성 있는 사과, 유족 관련 대책 마련 등의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유족과 노조가 재발 방지 대책으로 주장하고 있는 기수의 적정 생계비 보장, 조교사와 기수 간 불평등 구조 완화를 위한 표준 기승계약서 작성 등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유족은 12월 27일 문 기수의 시신을 운구차에 실어 서울 정부청사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고문중원열사시민분향소'를 차렸다.

▲ 문 기수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서울 오던 날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오은주 씨. 공공운수노조 제공.

"마사회를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문 기수의 시신이 서울로 오며, 오 씨를 비롯한 유족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유족은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과 시민분향소 옆 천막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8살, 5살 먹은 두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부산의 이모 집에 남겨졌다.

자꾸 통화하면 보고 싶을까봐 아이들에게 전화도 아껴 건다는 오 씨. 아이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참으면서까지 싸움을 지속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아이들은 아직 잘 몰라요. '아빠가 다쳐서 아빠가 더 이상 다치지 않게 엄마가 할 일이 많아' 그렇게만 이야기했어요. 작은 애는 아빠가 다쳤다 그러니까 119 타고 다시 오는 줄 알아요. 큰 애도 다쳤으면 수술하면 되는데 왜 수술 안 하냐 그래요. 크면 알게 되겠죠. 그때 아빠가 부끄럽지 않게 돌아가셨다. 아빠가 이렇게 고생했고, 아빠 희생으로 인해서 마사회를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으로 만든 그런 멋진 분이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애들이 보고 싶지만 싸우고 있어요."

남편의 한을 풀어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물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다. 그러나 지금 오 씨는 더 먼 곳을 함께 보고 있다. 인터뷰 말미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오 씨는 "마사회를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다시 한 번 전했다.

"부산에서 기수 한 분이 오셨어요. 걱정된다고. 같은 기수니까. 그 기수 분한테 이야기했어요.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하셔야 한다고. 저는 이제 남편을 다시 살리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남아있는 사람들 살게 하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시고, 절대 나쁜 생각하지 마시라고, 남편 옆에 친한 분들, 좋은 분들도 많았어요. 그런 분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갑질 없는 바로 잡힌 구조 속에서 당당하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2018년에서 2019년으로 이어지던 겨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과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이번에는 문 기수의 유족과 마사회 노동자들이 서 있다. 일터에서 사람이 죽지 않게 하겠다던 지난 겨울 한국 사회의 다짐은 허망한 꿈이었을까. 일터에서의 부당한 대우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의 외침 앞에 마사회도, 정부도 답이 없다.

▲ 시민분향소 안에 놓인 문 기수의 영정과 유품. ⓒ프레시안(최용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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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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