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김미숙의 삶

[인터뷰] 아들의 1주기를 추모하고 있는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평범할 수도 있고, 그런 아이었어요. 어릴 때는 까불까불 춤추면서 돌아다니고, 마이클 잭슨 춤 배운다면서 따라 하기도 하고. 크면서는 친구들 만나는 거 좋아하고. 그래서 생일 때 되면 제가 돈 주면서 '쏠 때는 화끈하게 한 번 쏘고,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다와' 그러면 제일 좋아하고. 그런데 엄마 아빠가 힘들게 사는 거 보면서 애어른이 됐어요. 생일 때도 돈을 좀 많이 주면 애가 안 받아가요. 저도 크면서 메이커 옷 찾고 그랬는데 용균이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 게 마음이 아파요."

사람들이 아들 용균이를 어떻게 기억해주면 좋겠냐는 질문에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아들과의 추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아들처럼, 그냥 평범한 모습"이라고 답했다.

김 이사장은 특별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루에 7명, 한해에 2000여 명이 일하다 죽는 한국사회다. 아들의 죽음 뒤의 행보가 김미숙 이사장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다. 톨게이트, 현대기아차, 아사히글라스, 한화케미컬….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파하고, 때로 죽어 나가기도 하는 수많은 현장에 김미숙 이사장의 발길이 닿았다.

그런 김미숙 이사장은 기자회견장에서도, 인터뷰에서도 자신과 용균이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한해에 2000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다는 것은 한해에 2000명의 '김용균'과 '김미숙'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미숙 이사장의 눈은 그들의 죽음과 아픔에 가 있다. 이를 끊어내는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김미숙 이사장은 자신도 평범한 사람이라며, 더 많은 평범한 사람의 공감과 행동을 강조한다.

아들의 1주기를 추모하고 있는 김미숙 이사장을 지난 4일 민주노총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김미숙 이사장의 1년

김 이사장은 지난 1년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지난 1년 거의 보도가 됐듯이 사고 난 데 찾아다니며 손잡는 역할을 하려고 했어요. 김용균재단 만들려고 준비하다가 10월 26일에 출범식도 하고. 톨게이트, 아사히글라스, 철도, 현대기아차 노동자들에게 연대활동도 하고."

김 이사장은 지난 1년, 스스로의 표현대로 "일생 동안 돌아다닌 곳보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을까.

"힘들어요. 사실. (아들의 죽음)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손바닥 뒤집듯 다른. 7, 8년 동안 직장 생활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활동한다는 게 갑자기 엄청 무리가 가더라고요. 적응도 안 되고."

김 이사장도 전에는 이런 삶이나 지금 골몰하고 있는 문제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며,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고 노후생활을 걱정하던.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평범한 여성 가장이었다.

"저도 비정규직이었는데 회사가 성장할 때는 사람도 계속 들어오고 그랬지만 성장 못하고 사람이 필요 없을 때는 인원 감축을 확. 문자로 한 번에. 그런 거 봤을 때 '그 사람들 잘려나가면 그 나이에 갈 데도 없고 구하기도 힘들고 안정된 직장이 거의 없는데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이 아닌 내 입장에서 봤어요. 내 자리 굳히기를 생각했어요. 더 열심히 일하고. 잘려나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많은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 그래야 입지도 굳어진다. 다른 사람은 쉴 때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쉬고 일했어요. 집에서 가장 역할을 했기 때문에. 책임감 때문에."

아들도 김 이사장도 열심히 살았는데,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했다는 이유로 아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다시는 볼 수 없는 몸이 됐다. 김 이사장이 살던 세상도 같이 무너졌다.

"그렇게 산 게 결국 애도 못 지켰잖아요. 애 못 지키면서 내가 돈 벌 이유가 없어졌어요. 애한테 크게 뭘 해주겠다기보다도 맛있는 거 하나라도 주면 내 행복이었는데. 결국은 저는 내 것도 못 지킨 거잖아요. 일하느라 못해준 것도 자꾸 떠올라요. 애 아빠가 아파서 제가 일을 하다 보니 반찬 같은 거 못해준 거. '정년퇴직하면 애한테 반찬 같은 거 해줘야겠다. 그때는 실컷 해줘야지' 생각했는데 못해줬어요. 늙어죽을 때까지 애 얼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김 이사장은 아들의 죽음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집에 혼자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힘들어요. 애 죽음 상태를 떠올리게 되고. 용균이 현장이 자꾸 떠오르고... 왜 못 지켰나. 애한테 얘기해서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 속에서 발 빼게 하지 않았을까. (아들이 일하는) 세 달 동안 멋모르고 ‘배움의 길은 힘들고 그럴 수 있어’ 그런 생각으로 있었던 게 애한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배울 때는 힘들지만 배우고 나면 나아지리라 생각했던 거. 애에 대해 많이 몰랐다는 죄책감."

'그때 내가 다르게 했다면 애가 살았을까. 왜 나는 그렇게 못했을까.' 견딜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 앞에서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김 이사장은 아들의 죽음에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개인 개인의 잘못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자꾸 확인해 들어가니까 공공기관이고 나라에서 구조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게 드러났고. 여기뿐 아니라 다른 회사에서도 이렇게 진행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한해에 2400명이 일하다 죽어서 생을 마감해요. 억울하게. 안전이 방치되어 있는 상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태에서 말이죠. 억울함이 용균이 거에서 묶여 있다가 확 확장됐어요. '다른 사람도 용균이와 같다. 기업과 정치인이 협력해서 죽음을 허용해주고 있구나.' 이런 거 정말 저한테는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어요. 엄청 크게 놀랐어요."

이 같은 깨달음 앞에서, 그 깨달음을 피할 수 없어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것이 김 이사장의 지난 1년이었다.

▲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정부와 기업이 이많은 죽음을 다 허용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난 1년 동안 이룬 일에 대해 김 이사장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먼저 작년 12월, 28년 만에 이루어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에 대해 물었다.

"용균이 이름이 붙여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법이에요. 저는 산안법이 개정되면 모든 사람이 혜택 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중요한 내용들을 다 빼버리고 통과됐어요. 원청의 책임을 물어서 처벌할 수 있겠구나 했는데 결국은 다 빠져버렸고. 또 산재 사고가 나면 하던 일을 전면중지하고 안전 점검부터 하게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안 됐고요. 용균이뿐 아니라 구의역 김군, 조선, 건설, 다 지킬 수 없는 법이 됐어요. 여전히 그대로 사람이 죽잖아요."

산안법 개정은 김용균 씨의 죽음을 계기로 '위험의 외주화'가 이슈화된 가운데 이뤄졌음에도 도급금지 업무 범위를 좁게 제한했다. 김용균 씨가 수행하던 발전소 연료환경설비운전분야는 도급금지 작업이 아니다. 조선업 위험작업, 건설현장의 덤프, 굴삭기 작업 등도 도급금지 작업에서 빠졌다.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고의 근본적 원인을 찾기 위해 작업을 전면 중지할 수 있던 기존 산안법의 작업중지 조항도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방식으로 후퇴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진행상황이 없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 발전소 특별노동조사안전위원회'의 권고안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김 이사장은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진상조사를 하는 이유가 뭐에요. 현장 이행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발전소만이 아니고, 여기 저기 몇 군데 진상조사가 됐더라고요. 그런데 이행을 해주지를 않아요. 정부는 도대체 이걸 이렇게 해갖고 뭘 우리한테 해주겠다는 건지... 유가족이 원하는 건 책임자 처벌, 안전 대책 현장 이행. 그 두 가지인데, 이를 안 하고 있어요. 이 많은 죽음을 다 그냥 허용하고 있어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약속 이행도 안 되고 있어요. 좋은 말 많이 했는데 지켜지는 게 없어요."

김용균특조위가 진상조사 이후 낸 22개 권고안 중 현장에서 일부나마 이행된 것은 인력 충원뿐이다. 그마저도 특조위가 권고한 490명에 크게 못 미치는 170명이 충원됐다. 충분한 인력이 충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위험 작업에 대한 2인 1조 근무가 시행되면서 노동자의 담당 범위는 두 배로 늘었다. 핵심 권고안인 직접고용에 대해서는 진행상황이 없다. 조선 노동자, 집배원의 죽음을 막겠다며 꾸린 조사위원회의 권고안도 시행되지 않았다.


"제가 그동안 이웃의 아픔을 보지 않아서 용균이가 죽었어요"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개정한다던 법이 누더기가 되어 통과되고,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행한다던 사고 조사가 현장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현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 이사장은 또 한 번 평범한 사람, 더 많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용균이가 있을 때는 내 가정만 지키면 된다 생각했어요. 못 지켰어요. 그게 결국은 내 이웃을 안 봐서 그런 거였어요. 그 중에는 유가족도 있었을 거고, 불의를 당한 많은 사람도 있었을 거고. 이런 걸 내가 생각을 안 하고, 내 이웃을 보살피지 않아서 내가 당했어요.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이웃이 당하면 나도 불행을 당할 수 있다는 거, 이 생각을 깊이 해서 악법 만들 때 광화문에 나간다든지, 그런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보조한다든지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10월 26일 출범한 김용균재단을 통해서 김 이사장이 하고 싶은 일도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뭐라도 하려는 사람들의 힘을 키우는 일이다.

"재단을 통해서 사고 난 유가족 손 내밀 때 믿을 수 있게끔 손 잡아주고, 억울하게 죽었거나 이럴 때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얘기 듣고 손잡고 활동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재단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국사회에 단체가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악법도 막을 수 있고, 이미 만들어진 법도 개선할 수 있게, 그런 단체랑 활동하는 시민이랑 유가족이랑 다 손 잡아서 엮어서 크게 뭉칠 수 있게 하는 일도 하고 싶어요."

▲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 중인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 ⓒ프레시안(최형락)

김미숙 씨의 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는 사람들


인터뷰를 마무리한 김 이사장은 광화문광장에 있는 고 김용균 추모 분향소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분향소 앞에서는 고 김용균 1주기 3일차 추모 문화제가 열렸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철도공사 자회사 코레일네트웤스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힌 조지현 씨가 김용균 씨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조 씨가 24살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이를 겪은 어머니의 아픔,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 그 현실을 바꾸는데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읽어나가자 앞에 앉아 있던 김용균 엄마인 김미숙 이사장이 울었다.

울고 있는 김 이사장 곁에는 톨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된 교사 노동자들이 촛불을 들고 앉아있었다. 김 이사장처럼 평범하지만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 고 김용균 1주기 추모 분향소.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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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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