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혁명가 손문'을 만나다

[윤효원의 뚜벅뚜벅] "혁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정치적 분위기가 베트남과 중국 혹은 홍콩과 비슷하다. 주기적으로 선거가 이뤄지지만 독립 이후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의 일당 지배가 이어져 왔다. 노동조합도 상황은 비슷하여 싱가포르 노총(NTUC) 중심의 단일 체계다.

면적이 서울보다 조금 큰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의 독립은 두 번 이뤄졌다. 첫 번째는 1963년 8월 31일 144년째 싱가포르를 지배하던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말라야연방(the Federation of Malaya)의 열네 번째 주가 되었고, 두번째는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해 싱가포르공화국을 만들었다. 두 번째 독립은 싱가포르가 원한 것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의회의 축출 결정으로 이뤄졌다.

리콴유 초대 수상(재임 1959~1990)을 비롯하여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노동조합 경력을 갖고 있다. 이들은 당시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반공 사민주의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리콴유(1923~2015)는 영국 유학 시절 좌파 이론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독립 전후로 PAP와 NTUC는 당-노조 동맹 속에서 대중 동원력과 투쟁력을 과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PAP는 권위주의 정권을 지탱하는 여당이 되었고 NTUC는 그에 포섭된 노동조합운동으로 전락했다.

정치적으로 혁명 세력이 거세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싱가포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러한 생각이 단견이었음을 손중산남양기념관(孙中山南洋纪念馆) 방문으로 깨닫게 되었다.

▲ 손중산남양기념관 입구. ⓒ윤효원

현대 중국의 출발점인 신해혁명(1911년 10월 10일~1912년 2월 12일)의 지도자가 손중산, 즉 손문(孙文,1866~1925)이다. 중산(中山)은 손문의 별명이다. 신해혁명은 장개석(1887~1975)의 국민당과 모택동(1893~1976)의 공산당이 함께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다. 이 혁명으로 중화민국(the Republic of China)이 탄생했다.

청일전쟁(1894년 7월~1895년 4월)에서 청나라의 패색이 짙어지던 1894년 11월 스물여덟 살의 청년 손문은 청나라 제국(1644~1912)를 타도하고 민국(民国)을 수립하려는 야망을 갖고 미국 호놀룰루에서 흥중회(兴中会)를 만들었다. 이후 그는 1895년 10월 26일 광저우 봉기(起义)를 시작으로 열 번의 봉기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다.

▲ 손중산남양기념관에는 1895년에서 1911년까지 중국 남부에서 발생한 1차에서 10차 봉기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윤효원

열 번째 봉기가 광저우에서 1911년 4월 27일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86명의 열사(martyrs)가 희생되었는데, 그중 14명이 싱가포르-말라야(新馬) 출신이었다. 최연소 희생자는 17살의 으통홍(余东雄)으로 싱가포르 거부의 일가였다.

손문은 1905년 8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혁명당인 동맹회(同盟会)를 결성했다.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republic)을 수립하고, 토지를 균분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1905년 10월 홍콩과 사이공에 동맹회 분회가 조직되었고, 그해 말 싱가포르에도 분회가 들어섰다.

이후 손문은 싱가포르를 "동남아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의 근거지"로 판단하고 1908년 동맹회남양지부를 동맹회싱가포르분회가 있던 만청원(晚晴园)에 설치했다. 남양(南洋)은 동남아시아를 뜻하며, 오늘날 만청원에는 손중산남양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 손문을 '대통령(PRESIDENT SUN YAT SEN)', '혁명 영웅(A REVOLUTION HERO)'이라 소개한 당시 신문 기사 복사본. 손중산남양기념관 전시물 중. ⓒ윤효원

지금은 싱가포르화교상공회의소의 소유인 만청원은 사업가였던 테오응혹(张永福, 1872~1959)과 테오바탄(张华丹, 1879~1949) 형제의 사가였다. 테오 형제는 1905년 어머니의 별장으로 이 집을 사서 만청원이라 이름 붙였다.

만청(晚晴)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隐, 813~858)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기념관은 만청원을 '해 질 녘 고요한 정원(Serene Sunset Garden)'으로 풀이한다. 중국어 사전에는 "저녁 날씨가 맑다"와 "노년 생활이 넉넉하다"로 나온다.

중국 혁명에 헌신한 싱가포르 '3걸'이 만청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3걸은 만청원의 소유주 테오응혹를 비롯해 림니순(林义顺,1879~1936)과 탄초람(陈楚楠, 1884~1971)을 일컫는다. 탐초람은 동맹회싱가포르분회의 첫 분회장으로 테오응혹의 죽마고우였고, 1903년에 <혁명군>을 인쇄해 유명해진 림니순은 분회 창립회원으로 테오응혹의 조카였다.

▲ 1905년 말 동맹회싱가포르분회 결성 후 회원들과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테오응혹, 세 번째가 탄초람, 네 번째가 손문, 맨 오른쪽이 림니순.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테오바탄. 손중산남양기념관 전시물 중. ⓒ윤효원


당시 싱가포르는 중국 남부에서 이주한 이들로 넘쳐났다. 1840년 영국이 자행한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국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중국은 안팎으로 무너져 내렸다. 1824년 1만683명이던 중국인은 1901년 22만6842명으로 늘어나 인구에서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31%에서 72%로 급증했다.

대부분 하층민에 속했던 이들은 중국 혁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싱가포르에는 세 가지 정치적 흐름이 존재했다.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 정부, 캉유웨이(康有為, 1858~1927)를 따르던 유신파, 그리고 손문의 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혁명파가 그것이다.

▲ 싱가포르(新加坡)의 중국 이주민들과 함께 한 손문과 동맹회 간부들을 묘사한 그림. 손중산남양기념관 전시물 중. ⓒ윤효원

손문의 혁명 동지들을 소개한 방에는 중국, 일본, 싱가포르, 말라야(쿠알라룸푸르, 페낭, 이포, 말라카, 사라왁 등등), 방콕, 사이공, 랑군, 인도네시아, 홍콩, 타이페이에서 중국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운 이들의 사진과 이력이 붙어 있다. 아쉽게도 조선(Korea)의 인물은 볼 수 없었다.

기념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혁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동지여 꾸준히 애쓰라(革命尚未成功 同志仍须努力)"라는 손문의 유지였다. 손문은 1900년 7월을 시작으로 신해혁명 발발 직후인 1911년 12월까지 아홉 번 싱가포르를 방문했고, 그중 네 번을 만청원에서 묵었다. 마지막 방문 이후 중국으로 돌아간 손문은 중화민국임시대총통에 선출되었다.

▲ 손문의 사망을 전하는 신문의 복사본 전시물 아래 "혁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동지여 꾸준히 애쓰라(革命尚未成功 同志仍须努力)"는 문구가 쓰여 있다. 손중산남양기념관 전시물 중. ⓒ윤효원

만청원 앞 길 건너에 손문을 기리는 중산공원(Zhongshan Park)이 자리 잡고 있다. 학교 운동장 반의 크기도 안 되지만 나무와 풀과 물이 소박하고 아담하게 어울려 바쁜 도시인들에게 잠시 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중산공원 표지석 너머로 조그맣게 보이는 주황색 지붕의 집(사진 한가운데)이 손중산남양기념관으로 쓰이는 만청원 건물이다. ⓒ윤효원

중산공원 한 켠에 손문이 쓴 "천하위공(天下为公)"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온 세상은 모든 인민의 것으로 조금도 사적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뒷면에는 "손중산, 중국의 운명을 바꾼 한 사람(孙中山一个改变中国命运的人)"이라는 리콴유의 글이 새겨져 있다.

손문이 주창한 민주혁명의 강령인 삼민주의, 즉 '민족주의(民族主义), 민권주의(民权主义), 민생주의(民生主义)'를 써 놓은 비석도 공원의 다른 귀퉁이에 세워놓았더라면 더 좋을 거라 싶었다.

▲ 중산공원에 있는 손문이 쓴 '천하위공(天下为公)'이 새겨진 비석. ⓒ윤효원


싱가포르의 만청원과 중산공원은 소박하지만 진지하고 품위 있게 위대한 선조와 자랑스런 역사를 기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어느 역사기념관보다 수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4.19혁명기념관을 둘러보고는 조잡한 전시물과 '유치 찬란'한 설명에 경악한 기억이 떠올랐다.


11월 초순의 싱가포르 날씨는 덥지만 그리 습하진 않았다. 백 년 전 1905년 말 손문과 그의 동지들이 동맹회싱가포르분회를 만들 때도 이런 날씨였으리라. 기념관에 새겨진 손문의 날 선 외침을 뒤로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혁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동지여 꾸준히 애쓰라(革命尚未成功 同志仍须努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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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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