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 단죄하지 않으면 문명 국가로 갈 수 없다"

[인터뷰] 이자훈 여순항쟁서울유족회 회장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제주 4·3'을 무력 진압하라는 이승만정부의 명령에 반발,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항명 군인 2700명을 비롯해 여수, 순천 지역의 민간인 등 약 1만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8살이었던 이자훈(78세)씨는 이 사건으로 아버지, 큰아버지와 사촌형들, 고모와 고모부 등 일가족 8명을 잃었다. 그는 지난 7월 발족한 여순항쟁서울유족회의 회장으로 여순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여순사건의 빌미가 된 제주 4.3사건의 정부 주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만큼, 여순사건도 이에 상응하는 국가 차원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순사건특별법안은 2001년 여수 출신 김충조 의원이 처음으로 법안을 발의한 이후 2011·2013·2017·2018년 등 5차례나 제출됐으나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안에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이번 20대 국회에서도 특별법 제정은 어려울 수 있다.

이자훈 여순항쟁서울유족회 회장을 13일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만나 여순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회장은 이승만 정부가 여수·순천 전체를 빨갱이 지역으로 규정하고, 청년을 비롯한 지역 주민을 무차별 학살한 탓에 억울한 희생자가 대거 생겨났다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묻혀온 여순 항쟁의 진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진행했다.


"숨죽이고 산 세월이 너무 길다"

프레시안 : 아버님을 비롯해 일가족 8명이 여순 항쟁과 관련해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자훈 : 큰 아버지가 메이지대를 나왔다. 당시에 메이지대가 사회주의 운동이 센 대학이었다. 귀국 후 큰 아버지는 몽양 여운형과 가까워 같이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해 위원장도 했다. 그러다 여순 항쟁에 대한 정부 토벌 이후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부산으로 도피했다.

당시 여수 경찰서에 유근섭이라고 친일 경찰이 있었다. 이 사람이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잡으러 특파대를 보냈다. 1년 6개월여를 이 잡듯 뒤져서 큰아버지를 체포해 여수경찰서로 압송했다. 큰아버지가 체포되니 아버지도 여수 율촌면에 오셨다가 체포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니까 6월 25일 새벽에 지금 여수 엑스포 자리인 만성리에서 큰아버지를 총살하고 석유를 뿌려 시체를 태웠다. 아버지는 6월 30일 여수 앞바다 애기섬에서 총살당했다.

프레시안 : 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직접 보셨나.

이자훈 : 못 봤다.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날짜를 몰라서 제사도 못 지냈다. 기록이 없었다. 나는 건국대에서 한일회담 반대운동 등을 했지만 연좌제 때문에 1968년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에서 살았다. 이후 1995년에 처음 귀국해 당시 형사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증언을 들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냐고 물으니 6월 30일 저녁에 배에 싣고 가서 총살한 뒤 50kg 정도 돌을 매달아서 수장했다고 했다.

프레시안 : 민주화가 안 됐으면 영영 몰랐을 수도 있겠다.

이자훈 : 그럴 가능성이 높다.

프레시안 : 그런 분이 많을 것 같다.

이자훈 : 너무 많다. 그런데도 유족이 잘 안 나타난다. 연좌제로 빨갱이라고 왕따를 당하고 살아왔다. 아예 거론하고 싶지도 않고 나타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숨죽이고 산 세월이 너무 길다.

"여순 반란이 아니라 여순 항쟁"

프레시안 : 여순항쟁이 4·3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라니까 당시 14연대가 동족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일어난 일 아니었나.

이자훈 : 그렇다. 동족상잔 반대 요구가 있었다.

프레시안 : 지금까지는 여순 반란이라고 해서 반란으로 알려졌다가 최근에 항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통은 군의 항명으로 촉발된 사건이라 군인이 죽었을 거라고 보지만, 당시 14연대 인원이 2700명이었는데 전체 희생자는 1만 2000명 정도로 조사됐다. 왜 이렇게 전체 희생자가 많았나.

이자훈 : 진압 과정을 봐야 한다. 1948년 10월 23일 순천이 제압되고 나서 여수를 4면으로 포위했다. 국군 포위 병력이 5000명이었다. 당시 한국군 병력이 5만 명이었으니 10분의 1을 동원한 것이다. 여수에서는 자체적으로 2 ~ 300명 정도 시민군이 형성돼 군의 무차별 학살에 저항했다.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고 두 번 이상 후퇴했다.

26일 군대가 청야(淸野) 작전을 썼다. 여수 시내에 불을 질렀다. 연기에 질식해서 죽은 사람도 있고, 불에 타 죽은 사람도 있다. 어린아이, 노인, 병약자도 많이 죽었다. 완전히 평정된 게 28일이다. 온 시내가 허허벌판이었다. 10월 말이면 아침, 저녁으로 추울 때다. 하루아침에 가옥이 소실되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노인과 어린이는 빼고, 서쪽에 사는 시민은 서초등학교, 동쪽에 사는 사람은 동초등학교 하는 식으로 집합시켰다. 거기서 즉결처분이 나왔다. 손가락질 당한다든지 즉결심문에서 답을 못하면, 즉 폭도로 의심되는 사람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학교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죽여서 묻었다. 3, 4일 동안 그렇게 했다. 당시 여수 인구가 8만여 명이었다. 젊은 청년 열에 아홉은 희생됐다. 이승만 정부가 지역 전체를 빨갱이 지역으로 본 거다.

프레시안 : 당시 지휘관이 누구였나.

이자훈 : 백선엽, 백인엽, 김백일 같은 사람들이었다. 만주국 시절 항일 빨치산 토벌을 담당했던 간도특설대의 주요 멤버들이다. 백선엽이 지리산 토벌도 오래 했다.

프레시안 : 정예부대를 보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식민지 시절의 친일과 반일 구도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이자훈 : 그렇다. 왕년의 친일 세력이 동족상잔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이다.

프레시안 : 진압이 시작되기 전, 여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이자훈 : 항명이 일어나고 여수 경찰서를 제압한 다음 날인 1948년 10월 20일 아침에 시민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유명한 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지역에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분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했다.

여기서 6개 공약이 나왔다. 첫째 남한 단독정권 반대, 둘째 여운형 선생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 지지, 셋째, 일제 경찰 청산, 넷째,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한 토지개혁, 다섯째, 미군 철수, 여섯째, 자치 정부 구성. 인민위원장에는 이용기 씨라고 일제 시대 때 독서회 사건으로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했던 분이 선출됐다.

공무원들도 다 나와서 협조했다. 여순보다 앞서 항쟁이 일어났던(1946년 10월) 대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제일 급한 게 식량이었다. 식량이 떨어진 절량(絶糧) 농가가 엄청나게 많았다. 쌀 달라고 요구해도 이승만 정권이 없다고 안 줬다. 그런데 인민위원회가 식량창고에 가보니 쌀이 다 썩어 있었다. 그래서 머릿수에 맞춰 쌀 배급하고, 우파들이 갖고 있던 은행에 쌓여 있던 저축을 생계에 도움이 되도록 융자해줬다. 시민들이 인민위원회를 자발적으로 열렬히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레시안 : 4·3항쟁이나 여순항쟁이나 5·18민주화운동이나 강력한 국가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으로 일어났는데, 5·18은 정당한 항쟁으로 인정됐고, 4·3항쟁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그런데 여순항쟁은 안 됐다. 왜 그렇다고 보나?

이자훈 : 군사반란으로 보기 때문이다. 군대가 어떻게 반란을 할 수 있냐는 거다. 하지만 군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돼있다. 반란 진압이 불가피했다 해도 민간인에 대해서는 합법적 절차를 거쳐야 했다. 당시 군은 민간인들을 단지 폭도라는 의심만으로 무차별 학살을 했다고 본다.

"민간과 지자체 차원에서는 여순항쟁 진상조사 노력 있다"

프레시안 : 여순항쟁에 대한 진상조사 노력은 얼마나 진행됐나.

이자훈 : 사단법인 여순지역사회연구소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인 이영일 씨는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국장을 했던 사람이다. 그 분이 피해자 증언을 수집해 90년대 중반 이후 증언집을 두 권 냈고, 학술토론도 하고 있다. 여순 항쟁과 관련해서는 제일 권위 있는 기관이다.

순천대학교에서는 여순연구소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백서도 내고, 얼마 전에는 증언집도 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장 참고가 되는 책은 국사편찬연구회의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2009년)이다. 아주 공들여 쓴 책으로 나의 증언도 이 책에 기록돼 있다. 여순항쟁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가 미국에 있는데, 미국에서 일부 자료를 가져오기도 했다.

프레시안 : 후속 연구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나.

이자훈 : 사건 직후 8일 간에 걸친 여순의 민중 자치를 집중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으면 정당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는 지배자 입장이 아니라 절대 다수 민중의 관점으로 써야 한다. 민중이 요구하고 민중이 스스로 참여해 실현했다는 점에서 여순항쟁이 당위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는 가운데 옳은 일을 많이 했다. 그러면 정당성이 부여된다. 이런 것들이 연구에 의해 극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건 역사학자의 사명이자 의무다.

프레시안 : 진상조사 사업에 대한 시나 도의 지원도 있었나.

이자훈 : 11월 20일에 칼 마이던스라고 당시 <라이프> 사진기자의 사진 자료집이 나오고, 12월 6일에 국회에서 사진전을 한다. 칼 마이던스가 맥아더와 아주 절친이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보호를 받으면서 당시 사건 현장 아무데나 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500여 장의 사진을 남겼다고 하고, 미공개된 게 300장 정도 되는데 그 중 100장 정도를 전라남도청의 지원을 받아 아주 비싸게 사왔다. 굉장히 귀중한 자료다.

프레시안 : 도 차원에서 또 하고 있는 일이 있나?

이자훈 : 전라남도에 여순특별위원회가 구성된다. 12월 초에 조례가 100% 통과될 것 같다. 도지사가 국회에 의원들 방문하러 가기로 하기도 했다.

프레시안 : 대략적으로 보면, 진상 규명이 1990년대 이후에 민간 차원에서 시작됐고, 최근에 와서는 지자체 차원에서는 열심히 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중앙정부까지는 올라가지 못한 것 같다.

이자훈 : 촛불 혁명 덕분이다. 이 정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또 중요한 시점이 있다. 반란 도시로 낙인 찍혀 근 60년을 고난 속에 산 순천시민이 시와 연합해 1994년 김영삼 정권때 정부에 탄원을 냈다. 그래서 드디어 '여순 반란'이 아니라 '여수 10·19사건'이라고 교과서에 등장했다.


"과거의 잘못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여순항쟁 특별법 제정 필요"

프레시안 : 7월 4일 여순항쟁 서울 유족회가 발족했다. 계기는 무엇이고 얼마나 가입해있나.

이자훈 : 여순항쟁 유족회의 당면 목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등 당시 피해를 입었던 전남 동부 6군에는 유족회가 결성되어 있다. 그런데 전라남도에서 국회로 왔다 갔다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경기도와 서울에도 유족들이 많이 있을 테니 한번 만들어보자' 생각하게 됐다. 현재는 100여 명이 가입해있다. 몰라서 못하는 분도, 주저하는 분도 있을 테지만, 좀 더 알려지면 더 많이 참여하지 않을까.

프레시안 : 여순항쟁 특별법 제정은 어디까지 와있나.

이자훈 : 국회의원 5명이 법안을 발의했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12월 초에 행안위에서 통과 여부를 결정한다고 합의한 것 같다. 특별법 소심의위원회가 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김성태, 윤재호, 이채익 의원이 들어와 있다.

프레시안 : 자유한국당은 반대하는 입장인가?

이자훈 : 반대한다. 9월 한 달 동안 국회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면담을 갖고 설득하려 했는데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10월 11일 전라남도청 국정감사 때 도에서 설득해 동부 6군 유족회 회장과 제가 자유한국당 간사인 이채익 의원과 면담을 가졌다. 회장단은 다 직계가족이 희생된 분들이다. 각자 절절한 사연을 이야기했다.

듣기로는 이 의원도 민주화 운동도 했고, YMCA 사무장도 하고 했다더라. 이 의원이 '회장단 말씀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절절한 사연에 대해 저희도 최선을 다해 힘을 쓰겠다'고 약속했다. 당에서 반대하는 걸로 알고 있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시안 : 어쨌든 보수 진영에서는 군대가 상부 지시를 거부한 건 군사반란이라고 보는 것 같다. 유족회 입장은 14연대의 항명보다는 군의 민간인 학살이 불법적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되는 건가.

이자훈 : 맞다. 국방부와 전남도청이 낸 통계를 보면 여순항쟁 희생자가 1만 2000명이다. 그때 여수 인구가 8만 명이었다. 대부분 죄도 없고, 사상적으로 자본주의가 뭐고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 죽음도 많다.

프레시안 : 민주당에서는 법안에 찬성하는 사람 수가 얼마나 되나?

이자훈 : 주승용 의원 발의안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139명이다. 300명 중에 반이 안 된다. 국회의원들 만나면 당신들은 직무 유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회의원들은 역사적 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러면 자진해서 해결해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면 알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한다. 역사 인식이 뚜렷한 의원들은 앞장서서 하겠다고 하는데 흐릿한 의원들은 군인이 항명했는데 그거 서두를 필요 있냐 이런 식이다.

프레시안 : 결국 여순항쟁의 실상이 많이 알려져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여론이 형성되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자훈 : 과거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 그리고 잘못을 청산하지 않은 민족은 잘못을 되풀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5·18항쟁을 비롯해 우리 민중 항쟁사에서 국가 폭력에 의해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래서 과거사, 국가폭력을 어떻게 단죄하느냐가 중요하다. 국가가 스스로 단죄하는 건 기대할 수 없다. 막스 베버가 말한 대로 국가 자체가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자기 죄를 인정하겠나. 정당화를 위해 감출 수밖에 없다.

민중이 희생됐으니 민중의 힘에 의해 단죄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진상규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민간인 학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가 극명하게 규명되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고 역사 인식이 바로 서야 한다. 역사 인식이 바로 설 때 민간인 학살을 단죄하고 잘못을 청산할 수 있다. 독일처럼. 그래서 문명국가로 가서 패륜적이고 인륜을 져버리는 국가 조직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진영이나 이념 논리가 아니라 그걸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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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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