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한국에서 철도는 주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도로 교통의 발달로 철도의 수송분담률이 떨어졌다. 수송분담률 하락은 수익 악화를 불러왔고 투자도 줄어드는 이유가 되었다. 설상가상 분단은 규모의 경제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삭막한 철도 현실에 단비가 되어준 것은 고속철도였다. 고속화는 주요 도시들의 물리적 거리를 단축시키는 효과를 내면서 철도의 새로운 부흥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철도에 대한 철학과 이해가 부족한 관료들이었다. 이원적 사고와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이 만나면서 한국철도의 조화로운 발전의 길이 막혀버렸다.
철도개혁을 말하는 관료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철도의 비효율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철도의 문제가 경영비효율에서 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전문 경영인이 혜성처럼 등장해 수술 장갑을 끼면 비효율을 제거하고 우수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이 같은 전제 아래 철도 민영화나 수서고속철도 경쟁체제 같은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철도정책을 총괄하는 관료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철도와 같은 거대 장치산업의 특성은 인프라 자체가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효율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국내선 항공 수요가 사라진 것은 갑자기 항공사들이 영업을 비효율적으로 했거나 철도공사 경영진이 특별한 노하우를 발휘해 경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철도의 발전을 위한답시고 SR(수서고속철도)을 출범시켜 고속철도 경쟁체제를 만든 것은 허구적 우상을 만들어 숭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결과는 정부의 정책부실과 투자부재 속에서도 시민의 발 역할을 했던 일반철도의 기능과 역할이 위축되고 있다. 또 고속철도와 일반철도의 상호 조화를 막고, 고속철도간 이동 편의성까지 제한하는 이상한 철도 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상한 철도정책의 총괄본부는 국토부다. 2013년 박근혜 정권이 출범 하자 국토부는 한국철도 발전방안의 새로운 길이라며 수서고속철도 경쟁체제를 밀어붙였다. 그 일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 지금 김경욱 국토부차관이다. 나는 2013년, 국토부 철도국장으로 부임한 당시 김경욱 철도국장과의 면담에 참석한 적이 있다. 김경욱 국장은 국토부의 일반적 고위 관료들과 달리 신사적이고 겸손한 태도까지 갖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신임 철도국장에게 철도정책을 어떻게 펼쳐나갈 생각인지 물었다. 신임 국장은 재정국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철도 정책은 더 면밀히 살펴보고 공부한 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집행해 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철도를 잘 몰랐던 국장이 불과 몇 달 후 한국철도의 나아갈 길은 수서 고속철도 경쟁체제라는 확신을 가진 전문가로 거듭나있었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철도에도 개혁의 꽃이 필 것으로 기대 됐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이상한 정책을 밀어붙였던 사람들이 승승장구 했다. 단순히 약진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가 철도 개혁의 근거로 삼으려 했던 "철도공공성 강화를 위한 철도산업 구조평가"연구 용역마저 강제 중단 시켰다. 개혁은 개혁대로 발목이 잡힌 채 한국철도의 미래는 안개 속에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달 29일에는 제3회 동아시아 철도공동체포럼 정책세미나가 서울포스트 타워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경욱 국토부 차관은 "국제관계 등 여건이 성숙될 때 동아시아철도공동체가 신속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며 동아시아 철도공동체포럼 같은 민간단체의 활약을 주문했다. 한국철도는 내부에서 곪아 터지는 정책을 일관되게 고수하면서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를 말하는 차관의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한국철도가 동아시아 철도 강국 사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려면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 한다.
철도노조는 20일 파업돌입을 예고하고 있다. 파업 이유 중 하나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공공성 강화를 위한 철도개혁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다. 국토부는 파업을 유도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철도노조와 시민사회단체의 대화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대통령도 국민과의 대화의 나서는 마당이다. 사회적으로 큰 영향이 미치는 철도 파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화와 중재에 나서는 것이 주무부처의 당연한 역할이 아닌가? 철도 파국을 막기 위해 관계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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